지난연재 > 정찬주의 불교 이야기

나를 나라고 착각하지 말자

정찬주 | ibuljae@naver.com | 2012-12-24 (월) 18:49

나는 현실의 고통에 대해서 둔한 편이다. 사업하는 후배나 친구들이 진퇴양란의 어려움을 호소해 오면 그때서야 ‘아, 정말 살기가 힘든 모양이구나!’ 하고 늘 한 박자 늦게 느낀다. 삶이 고통인 것은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2천5백 전에 사셨던 부처님도 삶을 고(苦)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불법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고통으로부터의 행복’일 터이다. 작년에 광주 도심지의 큰절에서 5개월 동안 신도와 일반인들에게 강의했는데, 그때 절 휴게소에서 주지스님을 찾아온 어느 개척교회 목사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젊은 목사는 불법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았다.

“불교가 무엇입니까.”

나는 신도들에게 들려주는 얘기를 똑같이 반복했다.

“나를 행복하게 하고, 남을 행복하게 하고, 더 나아가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행복하게 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불교를 바르게 알면 행복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의 사랑과 같은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서도 사랑하면 행복해진다고 믿습니다.”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나와 남까지이지만 불교의 자비는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까지 나와 한 몸이 되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목사는 내 답변을 수긍하는 듯 놀랐다. 다른 질문도 했다.

“소승과 대승은 무엇이 다릅니까.”

나는 달라이라마의 말을 인용해 설명했다.

“소승은 남을 해치지 않기 위해 정진하는 수행자이고, 대승은 남을 돕기 위해 정진하는 수행자입니다.”

“자비란 말이 너무 커서 이해하기 힘듭니다.”

“달라이라마가 유럽에 갔을 때 그곳의 기독교인들이 ‘자비’가 무엇이냐고 묻자 ‘친절’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달라이라마께서 자비를 21세기의 언어로 친절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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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타 마을 가는 길에 핀 유채꽃과 네란자라 강변의 여인 모습.


목사와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주지스님이 휴게소로 와 동석했기 때문이었다. 목사는 대화가 아쉬웠던지 내 산방을 들르겠다고 했지만 아직까지는 찾아오지 않고 있다. 그의 열린 태도를 보아 짐작하건대 불교가 ‘행복의 종교’이자 ‘자비의 종교’라는 말에 수긍했을 것도 같다.

행복해지려면 그 조건과 방법은 무엇일까. <반야심경>의 가르침도 결국 ‘고통으로부터의 행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관자재보살은 변화하는 모든 존재 속에서 무엇을 보고 행복의 조건을 발견했던 것일까.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관자재보살은 오온이 다 공한 것임을 햇살이 비추듯 밝게 보게 된다. 오온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다섯 가지의 무더기(蘊), 즉 눈에 보이는 물질, 받아들이는 감각, 분별하는 인식, 의도하는 행위, 감각대상을 아는 지식의 무더기를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현대시 중에 김춘수의 <꽃>이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1연은 오온 중에서, 꽃은 나와 관계를 맺지 않은 현상의 물질인 색()일 뿐이다. 2연은 꽃을 불러 나와 관계를 맺는 수()와 빛깔과 향기를 분별하는 상(), 그리고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름을 불러달라고 행위를 하는 행()에 해당된다. 마지막 연은 잊혀지지 않는 대상이 되고자 기억하는 식()에 해당된다.

그러고 보면 김춘수의 <꽃>이야말로 조견오온을 형상화한 뛰어난 명시이자 불교시가 아닐 수 없다. 다만 개공(皆空), 즉 그 모두가 공한 것까지 형상화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그렇다고 시인이 <반야심경>의 첫 줄에 나오는 조견오온개공을 몰랐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김춘수 시인은 오온에서 꽃의 시상(詩想)을 절제하고 말았을 것 같다. 모두가 공한 것이라고 설파해버리면 <꽃>은 문학작품으로써 긴장과 사색의 여백이 없는 밋밋한 작품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김춘수의 <꽃>의 여백에서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사색해야 한다. 그래야 <꽃>은 비로소 감상하는 우리 마음에서 완성된다. 시인이 발표한 <꽃>뿐만이 아니다. 오온으로 형상화된 우리 자신도 공하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찰나적으로 변화하는 오온의 나를 ‘참나’라고 착각하고 우기는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온에 끌려 다니는 집착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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