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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생명은 또 다른 ‘나’이다

정찬주 | ibuljae@naver.com | 2012-11-26 (월) 10:04

나는 살려고 하는 생명에 둘러싸인 생명이다

면소재지 가게에서 살충제를 사다 놓은 지 꽤 오래 지났으나 아직도 남아 있다. 실제로 파리나 모기를 잡는 데 사용한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손님이 오면 밤중에 지네가 나타날까봐 한두 번씩 방구석에 뿌려주었을 뿐이다. 우리 부부가 살충제 용기를 들고 호들갑을 떤 기억은 거의 없다.

멧박쥐들이 방안 대들보 위에 살고 있어 파리나 모기가 살지 못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백과사전을 들춰보니 멧박쥐와 곤충은 먹이사슬 관계였던 것이다. 산중에 집을 지은 뒤 몇 해 동안은 새카만 산모기와 파리들이 여름만 되면 들끓었는데 어느 해인가 멧박쥐 네댓 마리가 집 안에 들면서 곤충들이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부부가 잠을 자는 시간과 멧박쥐의 활동 시간이 겹친다는 것이었다. 멧박쥐의 날갯짓하는 소리에 예민한 아내는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자다가 전등불을 켜게 되면 나도 할 수 없이 일어나 멧박쥐의 동태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방 안이 밝아지면 멧박쥐는 날갯짓을 멈추고 방바닥에 떨어지거나 기둥에 붙어서 미동도 안 했다.

할 수 없이 우리 부부는 최근에 모기장을 구입하기로 결정하고, 멧박쥐를 방 밖으로 내보기로 했다. 잠을 설치고 나면 다음날 하루 종일 개운치가 않고 피곤하고 무기력해지기 때문이었다. 멧박쥐를 내보는데 무슨 특별한 기구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방 안에 언제나 비치하고 있는 집게 하나면 족했다. 집게는 밤중에 출몰하는 지네를 집어 사립문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마련해 둔 것이었다. 지네를 잡아 죽이게 되면 더 많은 지네가 달려든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웃 농부의 말을 듣고 작년 여름에 집게를 하나 가게에서 사왔던 것이다.

침실 대들보 위에 사는 멧박쥐는 세 마리였던 것 같다. 어느 날 새벽 3시쯤 불을 켠 뒤 제법 큰 멧박쥐를 집게로 집어 창밖으로 날려 보내주었고, 두 번째로 본 작은 멧박쥐는 방바닥에서 비명을 지르듯 푸드덕거렸으므로 집게로 살짝 집어 창밖으로 내보내려고 하다가 거실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실수라기보다는 느슨한 집게 사이로 멧박쥐가 미끄러져버렸다. 녀석은 잽싸게 다탁 밑으로 도망쳐버렸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녀석은 겁도 없이 잠자는 내 베개 위에서 파닥거리고 있었다. 불을 켜고 보니 집게를 들이미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살결이 유난히 말랑말랑한 아기 멧박쥐였다. 박쥐의 눈은 퇴화된 것으로 아는데 녀석은 장님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차가운 집게가 자기 살에 닿으면 찍찍 울었다. 마치 나를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에게 하소연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저씨, 싫어요, 싫어. 방 밖으로 나기가 싫어요. 저는 이 방에서 아저씨 부부와 함께 살래요. 제발 밖으로 내보지 말아 주셔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녀석을 창밖으로 날려 보내지 못하고 거실로 내보냈다. 말하자면 거실이나 서재, 처마 밑 등등 내 집에서 살게 하되 침실만 들어오지 못하게 주거제한을 한 것이었다. 방 안에서 살았던 멧박쥐들이 거실과 내 서재로 이사를 간 셈이었다. 우리 부부와 멧박쥐 가족이 타협한 결과로 내 마음은 지금도 흡족하다. 특히, 나는 그날 밤에 아기 멧박쥐가 나에게 하소연한 말이 생생하다. 실제 소리는 ‘찍찍’이었지만 나는 그 소리 속에서 아기 멧박쥐의 마음을 읽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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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생명에게 자애로운 빛을 뿌리는 강가강 백사장 너머에서 떠오르는 태양.


아프리카 성자 슈바이처 박사의 말이던가. 슈바이처는 생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인간 의식의 가장 절실한 사실은, 나는 살려고 하는 생명에 둘러싸인 살려고 하는 생명이다.’

사람이 절실하게 살려고 하는 것처럼 다른 생명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살려고 하는 의지는 우리 부부나 멧박쥐나 같다는 말이다. 그러니 슈바이처의 윤리는 모든 생명을 아우르게 된다.

‘인간의 진정한 윤리란 모든 생물에 대해서 끝없이 퍼진 책임이다.’

슈바이처가 왜 성자로 추앙받는지 그의 고백 한 토막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나는 나무 잎사귀 하나라도 의미 없이는 뜯지 않는다. 한 오리의 들꽃도 꺾지 않는다. 벌레도 밟지 않도록 조심한다. 여름 밤 램프 밑에서 일할 때, 많은 날벌레들이 날개가 타서 책상 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창문을 닫고 무더운 공기를 호흡한다.’

마하트마 간디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두루 계시고 속속들이 꿰뚫어보고 계시는 신을 보려면, 가장 하잘것없는 미물일지라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는 일은 자기 정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기 정화 없이 아힘사(不殺生)의 법칙을 지킨다는 것은 한낱 허망한 꿈이다.’

여기서 ‘자기 정화’란 수행을 뜻하는 말이다. 수행을 해야만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간디는 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뱀을 징그럽게 인식하지만 깨달은 수행자는 그런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육도 중생이 모두 내 아버지요, 어머니다

서산시 고북면 천장암으로 올라가서 경허선사가 장좌불와 했던 골방을 보고 그곳 스님에게 들었던 얘기다.

어느 날 만공은 골방 안에 누워 있는 경허스님을 보고 깜짝 놀란다. 스승의 배 위에 독사 한 마리가 스르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스님, 배 위에 독사가 있습니다.”

만공의 다급한 말에도 경허스님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배 위에 있는 독사를 쫓지도 않았다.

“내버려두어라. 실컷 배 위에서 놀다 가도록 내버려두어라.”

잠시 후 독사는 경허스님의 배 위에서 내려와 뒷문으로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경허스님에게 적의를 느끼지 못한 독사가 공격할 리 만무했던 것이다. 경허스님의 제자 수월이 만주에서 짚신을 엮으며 오가는 길손들에게 나눠주며 살던 때의 일화도 청담에 의해 오랫동안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다.

수월은 눈이 내리면 절 울타리 밖으로 나가 산짐승들을 불러 먹이를 주곤 했다. 수월이 부르면 산토끼, 노루, 꿩, 산새들이 모여들었다. 하루는 청담이 수월을 흉내 냈다. 그러나 산짐승들이 하나도 모여들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청담이 수월에게 물었다.

“산짐승들이 스님이 부르면 오고, 왜 제가 부르면 오지 않습니까.”

“이 사람아, 자네 마음에 살생심(殺生心)이 아직 남아 있어 산짐승들이 그것을 알고 오지 않는 걸세.”

수월선사가 청담에게 한 말은 불살생하는 본래마음이 드러날 때까지 수행을 더 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도 <범망경>에서 간절하게 당부하셨다.

‘목숨 있는 것을 자기가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이거나, 수단을 써서 죽이거나 칭찬해 죽게 하거나, 죽이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주문을 외워 죽여서는 안 된다. 즉, 죽이는 인(因)과 죽이는 연(緣)과 죽이는 방법과 죽이는 업(業)으로 목숨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 된다. 보살은 항상 자비스런 마음과 공손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구원해야 할 터인데, 도리어 방자한 생각과 통쾌한 마음으로 산 것을 죽인다면 그것은 큰 죄가 된다.’

‘불자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산목숨을 놓아주는 일을 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육도 중생이 모두 내 아버지요, 어머니다. 그러므로 산목숨을 잡아먹는 것은 곧 내 부모 형제를 죽이고 내 옛 몸을 먹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누가 짐승을 죽이려고 하거든 방편으로 구원해 재난에서 벗어나게 해주어라.’

초기경전인 <법구경>에도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다.

모든 것은 폭력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 이치를 자기 몸에 견주어
남을 죽이거나 죽게 하지 말라.

모든 생명은 안락을 바라는데
폭력으로 이들을 해치는 자는
자신의 안락을 구할지라도
그는 안락을 얻지 못한다.

십여 년 전이던가, 천성산에 터널공사를 시작하려고 했을 때 어느 비구니스님이 단식하며 반대한 적이 있다. 터널을 뚫으면 지하수가 고갈되어 습지에 사는 도롱뇽이 살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반대의 이유였다. 도롱뇽의 목숨이 스님의 목숨을 걸게 했다. 그러자 터널공사 책임자와 관리들은 고작 도롱뇽 때문에 엄청난 경제적인 손실을 감수해야 하느냐며 스님을 힐난했다.

몇 년 전에는 4대강 개발문제로 나라의 국론이 분열되어 시끄러웠다. 천일 동안 동구불출의 무문관 수행을 하던 스님이 소신공양하는 장렬한 국면을 맞이했고, 급기야는 산사에서 정진하던 5천여 명의 스님들이 4대강 개발의 반대대열에 합류했다. 스님과 불자들이 반대하는 명분은 너무나 분명하다. 나와 세상의 유무정물이 한 몸이라는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설하신 부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세상은 인간만의 공간이 아니라 뭇 생명의 터전인 것이다. 인간을 위해 뭇 생명의 터전이 위협받는다면, 그것은 뭇 생명에 대한 예의도 아닐 뿐더러 부처님 법을 거스르는 일인 것이다.

강을 직선으로 만들고 보를 만드는 공사는 강과 강 주변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일과 다름 아닌 것이다. 얕은 물에서 사는 물고기가 있는가 하면 깊은 물에서 사는 물고기가 있고, 빠른 물길에서 사는 물고기가 있는가 하면 느린 물길에서 사는 물고기가 있을 텐데, 강을 획일적으로 개발해 버린다면 결국에는 각양각색의 물고기는 사라지고 획일적인 어종만 사는 활력을 잃은 강이 되지 않겠는가. 강변의 습지나 모래밭, 혹은 강둑의 야생의 생물들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인간만을 생각하는 인간 중심의 개발론자들에게 뭇 생명의 존엄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공허한 메아리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부처님 말씀을 되새겨보는 것은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머잖아 살 터전을 잃게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평화로운 강의 뭇 생명을 경시하는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가신 문수스님의 명복을 늦게나마 죄송한 마음으로 빈다. 문수스님의 소신공양이야말로 뭇 생명을 경시하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우기는 인간들을 향한 매섭고 외로운 사자후라는 생각이 번갯불처럼 스친다. <계속>

*알림: 본지에 게재 중인 '정찬주 불교이야기' 원고의 저작권 및 게재권은 필자와의 협약에 의해 <미디어붓다>에 있으므로 허락없이 무단으로 원고를 옮겨 전재하는 것은 저작권 위반에 해당됩니다. 허락없이 원고를 게재하는 일을 삼가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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