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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란 대문을 두드리는 기와조각이다”

정찬주 | ibuljae@naver.com | 2012-11-12 (월) 10:22

현대인의 병든 영혼과 불안한 삶을 치유하는 참선

선가(禪家)의 용어인 화두(話頭)가 이제는 산중 선방에서 저잣거리로 내려와 보통명사로 활용되고 있는 느낌이다.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참선(參禪)이 출가 수행자들의 울타리를 넘어 도회지에 사는 가정주부나 직장인들은 물론 목사와 신부들에게도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도심 속의 빌딩에 시민선방이나 명상센터 등이 빠르게 자리 잡고 있는 현실이 그 증거다.

화두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접근법이 다분히 실용적이어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자들의 참선수행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나지만 그래도 참선이 현대인의 병든 영혼과 불안한 삶을 치유하는 데 좋은 대안이 되고 있음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화두를 들고 고요히 자기를 관조하는 순간만은 시비와 갈등으로 ‘파도치는 나’에서 거울처럼 잔잔한 ‘본래의 나’로 돌아올 수 있어서다. 선 수행자들은 그러한 상태의 마음을 무심(無心)이라 하는데,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임시방편으로 이름을 붙이자면 ‘본래의 나’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공안(公案) 혹은 고칙(古則)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화두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두(頭)는 접미사로 아무 뜻이 없으므로 ‘선사들이 쓰는 특별한 말(話)’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화두를 생각과 말길이 끊어진 ‘일상적인 말을 초월하는 격외(格外)의 말’인 말머리로 풀이할 수도 있다.

‘불전(佛前) 삼천배’로 유명한 성철스님은 해인사 법당에서 법문하던 중에 화두를 암호에 비유하기도 했다.

“예전 종문(宗門)의 스님들은 화두를 암호밀령(暗號密令)이라 했습니다. 암호는 말하는 것과 그 속뜻이 전혀 다릅니다. 암호로 하늘 천(天) 할 때 그냥 하늘인 줄 알았다가는 영원히 모르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안은 모두 다 암호밀령입니다. 깨쳐야만 알 수 있는 것이지 그 전에는 모릅니다.”

그러니 사유와 분별을 거부하는 화두를 놓고 그 속뜻을 풀이한다는 것은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이다. 화두의 생명은 체험하는 데 있을 뿐이므로 설명하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화두의 생생한 역동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은 일본 어느 대학교에서 30여 년 동안 연구하여 간행한 <선학대사전(禪學大辭典)>을 보고 독설을 퍼부은 것도 그런 우려에서였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가장 나쁜 책이 무엇이냐 하면 <선학대사전>입니다. 화두를 해설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두말 할 것도 없이 화두를 드는 데 생각으로 헤아리는 알음알이(知解)를 경계하라는 당부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화두가 탄생한 역사적 배경이나 그 경위까지 부정한 말씀은 아닐 터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인천 용화사에 계셨던 전강스님이나 통도사 극락암에 계셨던 경봉스님 등 깨달음을 이룬 우리나라 현대고승들의 법어집이나 어록을 보면 자주 조사들의 공안을 예로 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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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의 종정을 지낸 가야산 해인사의 성철스님(왼쪽)과 혜암스님.

선가에는 1700여 가지의 공안이 있는데, 그 공안을 모아 소개하고 있는 대표적인 중국 선어록으로 무문(無門) 혜개(慧開)선사의 <무문관(無門關)>과 원오 극근(克勤)선사의 <벽암록(碧巖錄)> 등이 있다. 그렇다고 공안이 1700여 개뿐이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나라 고승들도 화두를 남기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케 한 성철스님의 ‘불전 삼천배’나 경봉스님의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 등이 바로 그것이다.

가장 많은 공안을 남긴 고승이 있다면 바로 중국의 조주선사이리라. 화두 중에 화두라고 불리는 무(無)자 화두도 조주선사와 한 학인의 문답에서 유래하고 있다. <무문관>의 제 1칙이기도 한데, 무자 화두가 탄생한 배경은 이렇다.

어느 때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에 조주선사가 대답했다.
“없다(無).”
그 스님이 다시 물었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합니까?”
“그대에게 분별망상(業識性)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아직 깨치지 못하여 분별하는 마음을 내고 있으니 “없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 조주 무자 화두가 탄생한 배경이다.

<무문관>의 제 7칙은 조주세발(趙州洗鉢)이란 화두를 소개하고 있다.

조주에게 어느 학인이 물었다.
“총림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잘 지도해 주십시오.”
이에 조주선사가 도리어 물었다.
“그대는 죽을 먹었는가, 아직 안 먹었는가?”
“먹었습니다.”
“그렇다면 바리때를 씻게나.”

조주선사는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道)라는 사실을 그렇게 말했다.

무자 화두 못지않게 많이 회자되는 조주선사가 남긴 화두는 <무문관> 제 37칙에 나오는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이다. 조주선사가 입적 때까지 40년간 주석한 관음원(觀音院; 지금의 栢林禪寺)을 찾아가 보니 실제로는 잣나무가 아니라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측백나무였으나 일상을 초월하는 화두의 세계에서는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침묵을 하려면 앞니에 곰팡이가 필 정도로 하라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祖師西來意)?”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전국의 어느 선원이나 동안거와 하안거가 있다. 철이 되면 결제에 들어간다. 안거 3개월 동안은 앞니에 곰팡이가 필 정도로 처절하게 침묵의 정진을 해야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는 화두가 생겨났다. <조주어록> 중권에 다음과 같은 공안이 나온다.

어느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이에 조주선사가 말했다.
“앞니에 곰팡이가 났다(板齒生毛).”

판치(板齒)는 판자처럼 넓은 이, 즉 앞니를 가리킨다. 달마대사를 ‘앞니 없는 노인(板齒老漢)’이라고 불렀다. 이교도의 박해를 받아 앞니가 부러졌던 것이다. 그래서 달마대사를 결치도사(缺齒道師)‘라고도 부른다. 조주선사는 달마대사가 조그만 동굴에서 9년 동안 면벽 수행을 했기 때문에 앞니에 곰팡이가 났다고 대답했던 바, 육조 혜능스님도 일찍이 ’침묵이 부처임을 믿는다면 입에서 연꽃이 피리라‘는 게송을 남겼던 것이다.

10여 년 전에 입적한 해인사 일타스님의 회고다.

“전강스님께서는 후학들에게 판치생모 화두만 들게 하고 있습니다. 화두를 타파하는 데 판치생모가 지름길입니까?”
“지름길이 따로 없어. 다만 나 같은 성정의 사람이 의심을 단박에 짓는 데는 판치생모가 더 도움이 된다고 확신하고 있다네.”

실제로 전강스님은 직지사 천불선원, 예산 보덕사, 정혜사 등에서 참선정진을 멈추지 않고 밀고 나가다가 23세 때 곡성 태안사 누각에서 처음으로 견성하였으나 만공을 만나 미진한 데가 있었으므로 재발심을 하게 된바, 판치생모 화두를 붙들고 반 철 만에 확철대오했던 것이다. 그때 전강이 떠나려 하니 만공이 물었다.

“부처님은 계명성(鷄鳴聲)을 보고 오도하였다는데, 저 하늘의 가득한 별들 중에서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전강은 대답을 않고 엎드려 땅을 더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만공이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옳거니, 옳거니(善哉 善哉).”

만공은 전강을 칭찬하며 즉시 전법게를 내렸다.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이날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뒷봉우리에 있구나.

佛祖未曾傳 我亦無所得
此日秋色暮 遠嘯在後峰

이처럼 25세에 오도를 한 전강은 33세에 통도사 대중의 요청으로 통도사 선방인 보광선원의 조실이 되었고, 그때부터 누구에게나 판치생모 화두를 즐겨 주었던 것이다.

화두를 들고 ‘왜, 어째서’ 하고 의심하는 목적은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다. 본래 나의 성품을 보아 나와 우주가 한 뿌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견성(見性)을 한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화두가 잘 안 들리면 바꿀 수도 있고, 가능하면 선지식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아 드는 것이 좋다고 한다. 화두가 들릴 때 어디까지 참구하는 것이 좋을까? 고승들의 말을 참고해 보면 이렇다.

화두를 들고 의심덩어리와 씨름하다 보면 첫 번째로 동정일여(動靜一如)의 단계를 체험하게 된다. 일상생활에서 가고 오거나, 가만히 있을 때나 말을 하는 동안에도 화두가 들려 있는 경지를 말한다. 두 번째는 몽중일여(夢中一如)가 있는데, 이는 꿈속에서도 화두가 달아나지 않고 들려 있는 상태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잠이 깊이 들었을 때도 화두로 깨어 있는 경지가 되어야 하는데, 이 상태가 바로 숙면일여(熟眠一如)다. 이 숙면일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홀연히 화두가 타파되는 동시에 문득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일찍이 원오 극근선사는 화두를 가리켜 ‘대문을 두드리는 기와조각(敲門瓦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분명하고 틀림없는 말씀이다. 화두란 ‘본래의 나’가 누구인지 내 집으로 들어가게 하는 암호가 내장된 열쇠인 것이다. <계속>

*알림: 본지에 게재 중인 '정찬주 불교이야기' 원고의 저작권 및 게재권은 필자와의 협약에 의해 <미디어붓다>에 있으므로 허락없이 무단으로 원고를 옮겨 전재하는 것은 저작권 위반에 해당됩니다. 허락없이 원고를 게재하는 일을 삼가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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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질문 2012-11-12 13:4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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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니에 곰팡이가 났다(板齒生毛).”...에서,
毛를 왜 '곰팡이'로 해석했는지요, 뜻 그대로 '털'로 해도 될 것을.
원문 그대로 해석하는게 '원래의 화두'에 맞는 것같습니다.

-달마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앞니에 털이 났다

앞니(판치)빨에 털이 날 까닭이 없죠. 질문한 제자는 그 말도 안되는 대답 때문에 "침묵"으로 가는 것입니다. 즉, 질문 이전(생각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죠. 거기서 민감한 제자는 침묵의 맛을 보게 됩니다. 아! 하고.

침묵을 하려면 입에 곰팡이 필때까지...라는 의도 때문에 판치생모를 "앞니에 곰팡이 났다"고 해석했는지 몰라도 곰팡이 보단 '털'이 훨씬 직접적인 것 같네요. 뭐 곰팡이라 해도 뜻이 크게 달라지지 않지만요. 달마대사가 앞니가 없었기 때문에 없는 앞니에서 '털'이 났다고 대답하면 더 좋구요. 없는 앞니에서 털보다는 곰팡이가 끼닌 좀 상식적으로 보여 해석을 곰팡이로 하셨다면...글쎄요. 별로 설득력 없어보입니다.
이학종 2012-11-12 17:01:43
답변  
질문에 대해 작가 정찬주 선생님께서 친절히 답변을 전해오셨습니다. 참고하시어 도움이 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生毛’는 <중국어사전>이나 북한판 <조중사전>에 ‘곰팡이가 피다’로 뜻풀이 되어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곰팡이가 피다’로 사용하고 있다는 얘기지요. ‘판치생모’라고 말한 조주선사도 중국인이니 ‘곰팡이가 피다’라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화두의 특성인 초월성에 충실하거나 혹은 우리식의 직역으로 ‘앞니에 털이 나다’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도 같습니다만 저는 언어를 다루는 소설가로서 중국인들이 한 얘기이므로 중국의 언어현실을 먼저 참고하였다는 것을 밝힙니다.
질문 2012-11-12 18: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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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꾸벅(__)

'생모'가 '곰팡이가 피다'로 풀이된다니 재미있네요.
곰팡이에 해당하는 글자기 있을 것인데 왜 쓰지 않았을까 궁굼했습니다.
사실 질문후에 좀 찾아 봤습니다.
다수는 그냥 '앞니(판치)에 털이 났다'는 식이더군요.
털이 났다와 곰팡이가 났다 둘을 동시에 쓰는 사람도 있고
어떤 스님은 고정관념을 깨라, 이렇게 사용도 하시고

뭐 어쨌든,
기사 전체와는 별 관련없는 질문에도 답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_()_
사족 2012-11-13 10:58:29
답변  
사족을 다는 것 같아서 댓글을 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래도 한말씀 보태는 것이 자비심의 발현인 것 같아서 적습니다. 고깝게 생각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질문'님의 댓글적는 습관인 듯 한데요, 작가의 설명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리고 털이 났다고 다수가 해석해서 질문을 했다는 경위설명도 좋습니다. 기사 전체와 별 관련 없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 감사를 표하는 것도 너무 보기에 좋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장점을 한꺼번에 까먹는 말투, 그것이 바로 '뭐 어쨌든,'이라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은 꼭 필요한 말도 아닌데, 집어넣어서 그만 전체의 선의를 의심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말투를 조금은 의식해서 사용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거듭 고깝게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질문 2012-11-13 11:5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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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쨌든 <= 이 말투를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시는 데
저는 부정적으로 쓴 말이 아닌데요?  매우 황당합니다^^;;

뭐 어쨌든 <= 단지 이 말 하나로 저의 모든 말을 "의심"한다구요?
저의 말투를 고치고 싶으세요?
대체 어떤 경험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으나 님께서 느끼는 그 불편함은 저 때문이 아니라
님이 살아온 내력 때문인 것 같네요.

뭐 어쨌든<= 이말은 "결론적으로" 이런 뜻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제가 질문한 사연이 이렇궁 저렇궁 말했는데 뭐 어쨌든 제말은 "감사하다"는 말이다.

저는 고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님의 지적으로 인해 제가 고까워 할 것이란 것도 '님의 생각'입니다.
님의 지적은 자비심의 발현이라기 보다 그냥 님의 편견인것같네요.

저는 님의 말투나 생각을 고쳐줄 위치에 있지 않고요
살면서 누군가의 말투,태도,어법,스타일을 나의 취향에 맞게 해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점심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사족 2012-11-13 15:50:09
답변  
결과적으로 하나마나한 소리를 한 게 되었네요. 말을 물가까지 끌고 갈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고 안마시고는 말의 알아서 할 일이라던데, 그런 듯 합니다. 이것으로 사족은 그만 두겠습니다. ^^
질문 2012-11-13 16: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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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남의 말이 목마른지 아닌지도 모른 체' 목마른게 분명하다며
지레짐작으로 강가로 끌고가 억지로 물을 먹이려는 사람들을 가끔씩 보기도 하죠.
말에게 물을 이미 먹인 주인장이 '말이 목말라해서 물을 먹이려 했다, 나의 행위는 자비행이다'한다고 해서 과연 이해해 줄까요. 지계를 어겼을 때는 어떠한가요^^
사족 2012-11-14 12:12:57
답변 삭제  
^^^
제3 2012-11-16 17:12:34
답변 삭제  
곰팡이든 털이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판치에 무엇이 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두란 죽어 있는 말 가운데 그걸 뚫고 나오는 생명의 꽃을 말합니다.
언어에 있지 않고  말 해주는 조주의 뜻에 있습니다.
이건 말로 해줄 수는 없지만 스스로 아는 자만이 알고 모르면 참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걸 바로 하면 자기 생각이 일체 그치게 됩니다.
그리고 노력함이 없는 의구심이 있게됩니다.  그걸 화두에서 의정이라고 하지요. 
이건 이해를 요하지 않고 경험을 요합니다.

왜냐하면
조주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묻는者  자신에게 있기때문입니다.,
다만 조주를 통해서 자아를 돌아 보는 지혜가 함축된 선의  묘미익 때문이지요.
그리고 말을 해가며 서로 말꼬리를 잡는 것은  불교적인 태도 아니라고 봅니다.
 
어쨋든..... 혹은 말을 강가에 대리고 간다는 등....

 부처가 하는 말을 기억하여 남에게 써 보는 것은 불교의 가장 병폐입니다.
 석가가 해야 될 것이 있고 중생인 나가 ㅡ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턱대고 석존의 말이 좋아서 타인에게 스승의 자리에 서있는 사람처럼 언어를 쓰면 좋아 뵈지 않습니다.
지극히 부자연스럼고 야칫 지나치면 사람만 버려 놓습니다.
아만은 이런 곳에서 생깁니다, 불교가 제공한 가장 큰 단점입니다.
대개 스님들이
  승이 되면 이런 병에 99%가 떨어져 있습니다.
불교가 망합니다.
행이 따르지 않습니다.
남 가르치려고만 듭니다.
세속에서 익한 잡된 선입견을 제거 하지도 않는체 불설을 익혀 놓으면 자신도 모르게 부처의 제자가 된양 착각합니다.
그게 스스로에게 정직하기 어려운접입니다,
 그러나 법은 고른 것이어서 승과 속을 두지않습니다.
법은 법으로 가려 두어도 病이고 승으로 거려 두어도 病입니다.
 어느 것으로 가려도 그것은 佛을 가린것이 됩니다,
그래서 화두가 나오게 된 동기이고 의구심을 갖게 하는 이유입니다.
미강 2013-01-05 22:55:32
답변 삭제  
위 제 3님께..

덧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정찬주님 컬럼을 이제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너무 시간이 흘러 이 메모를 못보실 수도 있지만 혹여 해서 메모 남겨봅니다.^^

제가 하나 여쭤볼 것이 있는데 메일로 질문 드리고 싶사오니 번다이 여기지 마시고 자비심으로^^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ikmi406@hanmail.net
입니다.

새해에도 건강과 정진 있으시길 바랍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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