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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은 잃어버린 시심(詩心)과 낭만을 되찾는 곳이다

비슬산 산자락에 있는 유가사를 다녀왔다. <삼국유사>를 읽다가 발견한 절인데, 아주 오래 전에 해질녘이 되어 절 언저리만 스치고 말았으므로 이번에는 작심하고 들렀던 것이다. 자기가 사는 처소를 나선다는 것은 바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 ‘바람 쐬기’이다. 집을 나서 다른 마을의 바람만 쐬어도 근심 걱정은 덜어진다. 우리 속담에도 이웃 마을 가는 것을 ‘바람 쐬러 간다’고 한다.

봄가을에 절 나들이하는 삼사순례도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바람 쐬기’ 혹은, 바람처럼 걸림 없이 돌아다니는 순례이므로 ‘바람 타기’라고 해도 무방할 터이다. 바람의 특성은 집착이 없다. 머문다는 생각 없이 머물다 간다. 그러니 늘 신선하다. 바람이 있는 그늘에서는 음식물도 잘 썩지 않는다. 또한 바람은 어디든 가고 싶은 데로 불어가다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부처님은 해탈의 경지를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라고 했다. 상대방의 수준에 따라 설법하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의 한 단면이다. 그러고 보면 부처님이야말로 어떤 시인이나 철학자보다도 비유와 상징을 세련되게 구사했던 언어감각이 탁월했던 분 같다.

아무튼 ‘바람 쐬기’나 ‘바람 타기’는 곰팡이처럼 달라붙은 일상의 고통을 털어내는 작용을 한다. 부처님은 인생을 고(苦)라고 했다. 고란 나를 괴롭히는 모든 스트레스다. 이제는 스트레스가 고와 동의어가 돼버린 듯하다. 과거에는 외부에서 원인을 살폈지만 현대의학에서는 내부에서 원인을 찾는다. 한 마디로 내 탓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이는 두말 할 것도 없이 부처님이 2천5백 년 전에 깨달은 관점이다. 현대의학이 내 탓이라고 깨닫는 데 2천5백년이란 시간이 걸렸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쨌거나 ‘바람 쐬기’로 스트레스가 씻기어진다는 것은 본래의 건강한 나로 돌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불자가 절에 가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대부분 기도와 염불이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잃어버린 시심(詩心)이랄까, 낭만을 되찾는 공간의 절이 돼야 한다. 기도와 염불이 어떤 종교적인 목적을 갖는 유의(有爲)의 행위라면, 시심의 솟구침이나 감미로운 낭만은 신명 나는 무위(無爲)의 행위이다.

원래 원시사회에서는 일과 노는 것이 하나였다. 그러나 현대로 오면서 일과 노는 것이 분리돼 버렸다. 일은 쓸모가 있고, 노는 것은 쓸모가 없다는 식으로 변질돼버린 것이다. 그러나 일만 하는 인간이 행복한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일 때문에 현대사회에서는 해괴한 병명도 생겼다. ‘일중독증’이 바로 그것이다. 이웃과 더불어 잘 쉴 줄 알고, 잘 놀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또 그런 환경을 만들어가는 국가가 일류국가인 것이다.

절에는 정신의 유희라고 할 수 있는 시(詩)가 있다. 절은 한 권의 시집(詩集)이다. 표의문자인 한자의 시(詩)자는 말씀 언(言)자와 절 사(寺)가 결합된 것이다. 욕심을 털어버린 불자의 말이나, 수행자의 탈속한 말은 곧 시가 되는 이치다. 불립문자라 하여 시문을 경원시하는 스님이 더러 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천년고찰을 가보면 어디나 고승들의 시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런데 그것들을 보여주지 않으니 아쉽고 안타깝다. 절창의 시들을 한 편 한 편 시판(詩板)으로 제작하여 보여주는 절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스님들의 관심과 인식이 부족해서다. 검박하게 살았던 고승들의 시를 거창하게 바윗돌에 새길 필요는 없다. 쓰고 남은 나무판자에 대중스님의 붓글씨로 소박하게 소개한다면 더 정겨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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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선사의 시혼이 깃든 비슬산 유가사.

바람의 흐름을 보고 마음을 읽는 것이 풍류다

유가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2년 도성국사(道成國師)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도성은 보각국사 일연스님이 편찬한 <삼국유사>에 나오는 도인이다. <삼국유사> 제 5권 피은편(避隱篇) 포산 이성(包山二聖), 즉 포산의 두 성인을 얘기하는 부분에 나온다. 포산은 현재의 비슬산을 말하는데, 그 아름다운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신라 흥덕왕 때 관기(觀機)와 도성(道成)이란 두 스님이 포산에 숨어 살고 있었다.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짓고, 도성은 북쪽 굴에 살았는데 서로의 거리는 10리쯤 되었다. 두 스님은 달이 뜨는 밤이면 구름길을 헤치고 노래하면서 서로 오갔다.

두 스님의 마음을 산 속의 나무들이 전해 주었다. 도성이 관기를 만나고 싶어 하면 비슬산 나뭇가지들이 일제히 관기가 사는 쪽으로 굽혀 주었고, 관기가 도성을 만나고 싶어 하면 그 반대로 움직여 주었다.

이렇게 서로 왕래하기를 몇 해가 지났다. 도성은 어느 날 자신이 좌선하던 높은 바위에서 하늘로 몸을 날려 떠났다. 이에 관기도 뒤따라 세상을 떠났다. 도성이 좌선하던 도성암(道成岩)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훗날 스님들이 그 굴 아래에 절을 지었다.’

그런데 미당 서정주 시인은 <삼국유사>의 이 구절을 보고 <도인의 상봉시간>이란 제목의 시를 지어 남긴다.

‘도인 관기는 소슬산 남쪽 봉우리 아래 초막을 엮어 살고, 도인 도성이는 소슬산 북녘 모롱 밑 동굴 속에 계시면서, 서로 친한 친구인지라, 십리쯤 되는 둘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지냈습니다만, 그 만나는 시간 약속은 모년 모월 모일 모시와 같은 우리들이 쓰는 그런 딱딱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멋들어진 딴 표준을 썼습니다.

즉- 너무 거세지도 무력하지도 않은 이쁜 바람이 북에서 남으로 불어 산골 나뭇가지의 나뭇잎들이 두루 남을 향해 기울며 나부낄 때면, 북령의 도성이는 그걸 따라 남령의 관기를 찾아 나섰고, 그 바람을 맞이해서 관기는 또 마중을 나왔어요.

적당히 좋은 바람이 그와 또 반대로 남에서 북으로 불어 산의 나뭇가지의 나뭇잎들을 모조리 북을 향해 굽히고 있을 때는, 남령의 관기가 북령의 도성이를 찾아 나서고, 도성이는 또 그 바람을 보고 마중을 나오고..... 어허허허허허허!..... ’

유가사 입구에 이르니 일연스님의 시비(詩碑)가 먼저 반겼다. 바위 앞면과 뒷면에 각 한 편씩 새겨져 있는데, 두 편 모두 관기와 도성의 얘기를 듣고 쓴 일연스님의 시로서 빼어난 절창이었다.

산나물 풀뿌리로 배를 채우고
나뭇잎 옷으로 몸을 가리우니
누에 치고 베 짜지 않았네
찬 솔 나무 돌너덜에 소슬바람 불어
해 저문 숲엔 나무꾼도 돌아가고
깊은 밤 달 아래 앉아 선정에 들어
이윽고 부는 바람 따라 반쯤 날았도다
해진 삿자리에 가로누워 잠이 들어도
꿈속에서라도 혼은, 속세에 이르지 않았으니
구름이 놀다 간 두 암자 터에
산 사슴 마구 뛰놀고 인적은 드물구나.

같은 바위 다른 면에 새겨진 시도 역시 속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달빛 밟고 서로 오가는 길 구름 어린 샘물에 노닐던
두 성사의 풍류는 몇 백 년이나 흘렀던가
안개 자욱한 골짜기엔 고목만 남아 있어
뉘었다 일어나는 찬 나무 그림자 아직도 서로 맞이하는 듯.
相過踏月弄雲泉
二老風流幾百年
滿壑煙霞餘古木
偃昻寒影尙如迎

특히 이 시에서는 두 번째 행의 풍류(風流)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풍류란 음주가무가 아니라 관기와 도성처럼 바람이 흐르는 것을 보고, 서로의 마음을 읽는 ‘절정의 낭만’인 것이다. 우리 한국인만의 멋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처마 밑을 스치는 바람에 귀를 맡겨보고, 절 마당가에 선 나뭇잎의 흔들림을 보고서 시심에 젖어보는 그런 낭만이 바로 풍류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돌아온 최치원은 풍류를 유불도 삼교가 포함된 우리나라 고유의 그윽하고 현묘한 도(玄妙之道)라고 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도(道)라고 한 것이다.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고도의 정신, 삶의 방법, 고상한 낭만이란 뜻이다. 풍류도 일종의 노는 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의미가 자못 깊다. 일하는 것만 가치 있는 일은 아닐 터이다. 어쩌면 시를 읊조리는 것과 같이 풍류 차원의 노는 일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네덜란드의 학자 하위징아(Johan Huizina)는 인간을 아예 ‘노는 인간(호모루덴스)’이라고 정의할 정도인 것이다.

천왕문 가까이에서는 백담사 조실 오현스님의 시비도 보았다. 아직 관기와 도성의 풍류에는 이르지 못한 느낌이나 ‘싸락눈 매운 향기’라는 구절이 가슴을 적셨다.

비슬산 구비 길을 누가 돌아가는 걸까
나무들 세월 벗고 구름 비껴 섰는 골을
푸드득 하늘 가르며 까투리가 나는 걸까
거문고 줄 아니어도 밟고 가면 韻 들릴까
끊일 듯 이어진 길 이어질 듯 끊인 緣을
싸락눈 매운 향기가 옷자락에 지는 걸까
절은 또 먹물 입고 눈을 감고 앉았을까
萬첩첩 두루 적막 비워 둬도 좋을 것을
지금쯤 멧새 한 마리 깃 떨구고 가는 걸까

경내로 들어서니 외호신장을 모신 깜찍한 국사당(局司堂) 옆에 육조 혜능대사의 게송이 새겨진 시비도 서 있었다.

보리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때와 먼지가 끼리요.

방아지기 행자 혜능은 이 게송을 지어 오조 홍인대사의 법을 잇는 상수제자(上手弟子)로 비약하였던 것이다. 주지스님은 출타하고 없었고, 소임을 보는 한 스님이 차를 권하나 나는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혜능대사의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때와 먼지가 끼리요’ 하는 구절에서 눈에 낀 헛것이 떨어진 것 같아 좋은 차를 마신 것 이상의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