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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28년, 훈민정음이 반포되다<br>정찬주 장편 ‘천강에 비친 달’-40

정찬주 | ibuljae@naver.com | 2014-08-25 (월) 11:13

천강이 비친 달 〈40〉


슬픈 훈민정음2


세종이 내준 가마를 타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정인지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자신의 저고리에 쓰인 정음 28자가 눈을 감지 못하게 했다. 보름달빛이 창호에 어릴 때쯤에는 정음 28자가 발광하는 듯했다. 금쪽같은 보름달빛이 방안에 깊숙이 들자 정음 28자도 환해졌다. 정인지는 혼잣말로 소리쳤다.

‘아, 이보다 아름답고 거룩한 글자를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정인지는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아침을 맞았다. 정음 28자에 홀린 듯 뜬눈으로 밤을 새워버렸다. 그런데도 피곤함은 조금도 없었다. 피로하기는커녕 정신은 점점 더 초가을의 못물처럼 맑아졌다. 정인지는 아침 일찍 집현전으로 나가 최항 등에게 세종의 명이라며 훈민정음의 해설을 쓰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서문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서문은 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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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용자례. 사진=문화재청 제공


‘천지와 자연의 소리가 있다면 반드시 천지와 자연의 글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은 소리에 따라 거기에 맞는 글자를 만들어 만물의 정을 통하였고, 삼재(천지인)의 도리를 책에 실었으니 후세의 사람들이 능히 이를 바꾸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방의 기후와 토질이 다르며, 소리의 기운이 또한 이에 따라서 다르다. 그런데 대개 중국 이외의 말은 소리는 있으나 글자는 없어서 중국 글자를 빌어서 사용을 같이 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가는 구멍에 모난 괭이를 맞추어 넣는 일과 같은 것이다. 어찌 능히 통달해서 막힘이 없겠는가? 요컨대 글자란 각자가 살고 있는 곳에 따라 정할 것이지,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예악(禮樂)과 문장에 있어서 중국의 찬란했던 하나라와 견줄 만하나, 다만 우리의 지방의 말과 사투리가 중국과 같지 않아서 글 배우는 이는 그 뜻을 깨우치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그 뜻을 아는데 힘들게 여기고 있다. 옥사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 곡절을 서로 통하기가 힘들고 옛날 신라의 설총이 처음으로 이두글자를 만들어 관청과 부처와 민간에서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 한자를 빌어서 사용하므로 어떤 것은 어색하고 어떤 것은 들어맞지 않는다. 속되고 이치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말을 적는데 곧 만분의 일도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계해년(세종 25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처음으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게 예(例)와 뜻을 들어 보이시고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시었다. 꼴을 만들되 글자가 옛날의 전자와 비슷하고, 소리의 원리를 따랐으므로 음은 칠조(七調)에 맞고, 삼극(三極)의 뜻과 음양의 묘가 다 들지 아니함이 없다. 28글자는 옮기고 바뀌는 것이 무궁하여 간단하고 요긴하고 정묘하고 통하는 까닭에, 슬기로운 사람은 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 정도면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이 글자로써 한문을 풀면 그 뜻을 알 수 있고, 이 글자로써 송사를 심리하더라도 그 실정(實情)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자음의 청탁을 능히 구별할 수 있고, 노래는 곧 음률이 고르게 되며, 쓰는 데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고, 어떤 경우라도 통달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와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라도 모두 이 글자로 쓸 수가 있다.

전하께서는 자세한 해석을 더해서 여러 사람들을 가르치라고 분부하시니라. 이에 집현전 신하들은 응교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교리 신숙주, 수찬 성삼문, 돈령부 주부 강희안, 부수찬 이개, 부수찬 이선로 등은 여러 가지 해설과 예(例)를 짓고 그 개념을 서술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였으나.’

정인지는 다음 문장에 이르러 호흡을 가다듬었다. 비록 서문을 쓰고 있지만 훈민정음 창제에 자신과 집현전 학사들은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이름만 올린다는 송구함이 솟구쳤기 때문이었다.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양심의 가책이었다. 다른 집현전 학사들도 자신과 같은 심정일 것 같았다. 정인지는 자신은 물론이고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 창제에 직접 간여하지 않았고, 또 그럴 만한 실력이 없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문장을 단 한 줄이라도 서술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깊은 연원과 정밀한 뜻이 묘연하여 신 등은 (정음을 창제함에 있어서) 능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다(若其淵源精義之妙 則非臣等之所能發揮也).’

집현전 학사들은 훈민정음이 어떠한 문자에 근거하였는지 그 깊은 연원과, 또한 훈민정음의 글자마다 정밀한 뜻이 미묘하므로 창제에 간여할 능력이 없었다는 고백이었다. 집현전 학사들이 중국의 〈운회〉를 번역하고 훈민정음으로 〈용비어천가>〉등을 지었던 것은 모두 정음 창제 이후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훈민정음 창제의 모든 공덕은 세종에게 돌아가야 했다. 정인지는 그렇게 믿었다. 그에게 신미의 존재는 없었다. 신미는 훈민정음 창제에 있어서 세종은 물론이고 대군들과의 묵계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린 지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그것이 신미의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정인지는 붓을 다시 들었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서 지으신 법도와 베푸심이 백왕(百王)을 초월하시니, 정음을 지으심도 선대의 것을 이어받음이 없으며 자연으로 이룩하신 것이다. 어찌 그 지극한 이치가 이르지 아니한 데가 없다고 하여, 사람이 이룩한 개인의 업적이 아니라 하랴. 대저 동방에 나라가 있음이 오래 되지 않음이 아니지만 만물을 여시고 힘써 일을 이룩하신 큰 지혜는 대저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음이랴!’

정인지는 끝으로 자신의 품계와 관직, 그리고 이름을 남겼다.

‘정통 11년(세종28년) 9월 상한(上澣, 상순). 자헌대부, 예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지춘추판사, 세자 우빈객, 신 정인지는 두 손 모아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삼가 글을 올립니다.’

이때 정인지가 절한 대상은 자신의 저고리에 쓰인 훈민정음 28자였다. 간밤에 세종이 친히 써준 중국의 진서보다 우수하고 아름다운 우리 글자 28자였다. 마침내 세종은 정인지의 서문과 집현전 학사들의 해례(解例)를 여러 번 독회한 뒤 9월 29일이 되어 우리 글자 훈민정음을 세상에 반포했다. 세종의 나이 50세 때의 경사였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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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안담 2014-08-25 16:4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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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으로 1446년이니 지금으로부터 568년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자가 세상에 공표되었습니다.  그 뒤로 세계 언어학자들은 이 글자 체계보다
더 나은 문자는 없다는 사실에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마땅히 국보이자 보물 1호가 되어야 합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조선이란
왕조는 우리글 하나로도 그 존재 이유를 삼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인류역사적 업적 뒤에 불교가 있었고 신미라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수미산 만큼의 인연이라 여깁니다.
청현 2014-08-26 08:53:50
답변  
창호에 비치는 달빛의 그 안락함은 훈민정음의 탄생에서 오는 기쁨이겠지요. 긴 세월 동안 한자를 사용했음에도 우리 한글은 완벽히 우리 글로, 그것도 세계가 인정해주는 독특하고 과학적인 글로 태어났지요. 신미의 업적이 어쩔 수 없이 세종이라는 나랏님의 이름으로 가려지는 걸 정인지가 조금은 안타까워하는 것 같습니다.
은행나무꽃 2014-08-26 17:13:18
답변 삭제  
사실과 진실의 차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이렇듯 약간의 괴리가 있는듯 합니다.
 진실이 오히려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도 허다하고..
 대제학 정인지의 양심의 가책에 자꾸 신경이 쓰입니다.
 한글 창제의 고뇌를 조금은 알았으니 올해 한글날은 그냥 의미없게 보내지 않아야 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한글날을 국경일에서 제외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할텐데..
 그럴일은 이제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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