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
ibuljae@naver.com 2014-08-18 (월) 09:34천강에 비친 달 〈39〉
슬픈 훈민정음1
예조판서이자 집현전 대제학인 정인지는 세종의 지시를 받고 퇴궐하지 못했다. 정인지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 전에 신하들에게 면박을 주고 꾸짖는 세종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여러 가지 지병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까닭이라고 하지만 최근에 세종은 무슨 일이든 조급해 했다. 중궁이 별세한 뒤부터 더욱 그랬다. 그런가 하면 곧잘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연민에 빠져 눈가를 적시기도 했다. 신하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있는 승지들이 가장 난감해 했다.
“세상을 떠난 중궁을 위해 세자와 수양과 안평이 불경을 간행한다고 해서 과인이 신하들이 싫어하는 것을 알지만 허락했느니라.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전하, 중궁마마께서 병환이 계셨을 때에는 사정이 급하여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원하옵건대 불경을 간행하지 마옵소서.”
세종이 미간을 찌푸리며 우부승지 이사철(李思哲)에게 화를 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세종의 모습이었다.
“그대들은 불경 간행을 그르게 여기는구나! 어버이를 위하여 불사를 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가!”
“백성들이 눈으로 보고 배우는 것이오니 행하지 마시옵소서. 불경을 간행한다 해도 중궁마마께 조그만 도움도 없을 것이옵니다.”
이사철 뿐만 아니라 좌승지 황수신(黃守身), 좌부승지 박이창(朴以昌), 동부승지 이순지(李純之) 등이 반대를 하자, 세종은 굽히지 않고 다른 신하들을 불러오도록 명했다.
“과인은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대들과 잘못 의논했으니 사간과 집현전의 관원을 불러오라.”
그러나 세종 앞에 나타난 사간 변효경(卞孝敬)과 집의 장창손, 교리 하위지는 승지들보다 더욱 완강하게 극언(極言)을 했다.
“신하들이 싫어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옳지 않을 것을 아시면서 어찌 하시려고 합니까? 지금 또 불경을 간행하신다면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성학의 나라에 어찌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라시는 것이옵니까?”
세종은 끝내 그들의 의견에 굽히지 않았다. 그들이 나가자 실망하여 정전 안이 울릴 만큼 큰소리로 나무랐다. 크게보기
훈민정음. 사진 문화재청 제공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선비 같군! 자기 머리도 간수 못하는 지저분한 더벅머리 선비 같은 자들이군!”
잠시 자리를 떠났다가 돌아온 세종은 풍채가 듬직한 정인지를 보고 나서는 평정심을 되찾았다. 정인지는 훈민정음 창제도 그랬고, 세종이 하는 일에 맞서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세종이 정인지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예판대감, 술 한 잔 생각이 나서 남으라고 했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용비어천가〉를 편찬한 공이 큰데 중궁의 일로 과인이 챙기지 못했소. 그러니 오늘은 과인이 술 한 잔 내겠소.”
세종은 정인지를 데리고 내전으로 갔다. 내전은 주인이었던 중궁이 없었으므로 빈 방들이 더욱 휑했다. 대방에는 이미 술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술상의 안주는 세종이 좋아하는 닭고기, 돼지고기와 과일들이었다. 세종은 비린내 나는 생선보다는 고기를 더 좋아했던 것이다. 과일은 백자 그릇에 붉은 앵두가 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예판대감, 세자가 과인을 위해 동궁 뜰에 심은 앵두나무에서 딴 앵두라오. 과인을 괴롭히는 눈병과 소갈증에 앵두를 복용하면 효험이 있다 해서 세자가 앵두나무를 심었다 하오.”
“효성스러운 세자마마이십니다. 앵두는 피를 잘 돌게 하고 오장육부의 기운을 돋아주는 열매라고 들어 알고 있사옵니다.”
세종도 자식자랑을 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다. 정인지가 세자를 추켜세우자 흡족하게 미소를 지었다.
“수양과 안평도 뒤지지 않소. 수양은 중궁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용문사를 원찰 삼아 불상을 조성한다고 하오.”
“세상에 드러내 백성들이 본받을 만한 대군마마의 효성이옵니다.”
“과인의 마음을 알아준 이는 정 대감뿐이라니까!”
세종이 건네는 술잔을 받아든 정인지가 황공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예판대감, 술을 한 잔 더 받아야 할 이유가 있소.”
“전하, 하교하여 주시옵소서.”
“자, 과인이 아끼는 이 앵두를 먹어보구려.”
세종이 갑자기 묘기를 부리듯 앵두를 위로 던졌다가 입으로 받아먹었다. 그 바람에 정인지는 크게 웃었고, 임금 앞에 독대하고 있다는 긴장감이 사라졌다.
“대감, 방금의 술잔은 과인이 그대에게 부탁이 있어 권한 것이오.”
“하교하여 주시옵소서. 소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가을에 훈민정음 반포를 할 것이오. 더 미룰 이유가 없어졌소. 예판대감이 훈민정음 창제를 찬성한 최항 등에게 정음을 해설하게 하고 예를 지어서 서술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 없이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시오. 물론 서문은 예판대감이 써야 하오.”
“신 등은 〈용비어천가〉를 편찬하면서 정음의 원리와 과정을 낱낱이 이해하였사옵니다. 신, 신숙주, 성삼문은 전하의 명을 받고 훈민정음 창제 이후 요동으로 가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만나 음운을 연구한 바도 있사옵니다. 전하께서 품으신 임금으로서의 원(願)과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을 서문에 다 담겠사옵니다.”
정인지는 초저녁 시간을 알리는 고루(鼓樓)의 북소리가 나기도 전에 대취했다. 취기를 빌어 용기를 내 한 마디 했다.
“전하,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여 소신이 춤으로 감축 드리면 안 되겠사옵니까?”
“하하하.”
세종이 너털웃음으로 허락하자 정인지가 술상 뒤로 물러나 스스럼없이 춤을 추었다. 학이 날개를 치며 날아가듯 정인지는 두 팔을 들고 두 다리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세종도 취한 탓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었다. 잠시 후 정인지가 방 안을 몇 번 돈 다음에야 앉았다. 세종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정인지에게 말했다.
“대감, 저고리를 벗어 과인에게 가져올 수 있소?”
“소신은 어떤 지시라도 다 받들겠다고 이미 맹세했사옵니다.”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전하.”
“벼루와 붓을 가져오너라.”
장번내시가 가져온 붓은 노란 족제비털 붓이었다. 벼루에는 흑룡이 양각돼 있었다. 세종은 정인지의 저고리를 펼친 뒤 붓에 먹물을 듬뿍 묻혔다. 그리고는 훈민정음을 써내려갔다.
“과인이 창제한 정음 28자를 대감에게 먼저 하사하는 것이오.”
“전하, 지난날이 떠올라 눈물을 참을 수 없사옵니다.”
세종이 정인지의 말에 씁쓸하고 허허로운 표정을 지었다.
“대감은 과인을 춤으로 즐겁게 하더니 지금은 눈물로 슬프게 하는구려.”
정인지는 훈민정음을 대하는 세종의 진심과 열정이 새삼 느껴져 가슴이 울컥했다. 집현전 학사와 대간들의 반대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인지는 세종에게 훈민정음 28자가 쓰인 자신의 저고리를 돌려받으면서 끝내 눈물을 떨어뜨렸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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