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
ibuljae@naver.com 2014-08-06 (수) 18:59내불당에 온 지 3년 만이었다.
신미는 그동안 흥천사를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세종의 심부름으로 세자와 수양, 안평 등의 대군이 아무 때나 내불당에 오므로 자리를 비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신미는 흥천사에 마음의 빚을 진 것 같아 늘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다. 자신이 내불당으로 거처를 옮긴 뒤 바로 회암사 주지였던 만우(卍雨) 노승이 세종의 명을 받아 흥천사에 주석하게 된 것도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만우는 중국 두보(杜甫)의 시, 즉 두시(杜詩)에 조예가 깊은 시승(詩僧)이었다. 세종은 노승 만우에게 예우를 극진하게 했다. 붉은 비단으로 지은 가사를 하사하고 예빈시(禮賓寺)에서 3품 관직에 해당하는 녹(祿)을 주도록 명했다.
만우는 두시에 정통했던 이색, 이숭인과 논할 정도의 시승이었으므로 세종은 집대성한 두시를 주해함에 있어서 집현전 학사들에게 그를 찾아서 의심나는 점을 묻도록 지시했다. 신미는 흥천사에 들러 바로 만우의 방으로 갔다. “노스님, 신미가 왔습니다.” “어서 들어오시게.” 만우가 환하게 웃으며 신미를 맞아들였다. 만우의 흰 눈썹과 두 눈이 경련하듯 가늘게 떨었다.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뚝이 작대기처럼 말라 있었고, 얼굴은 무말랭이 같이 쭈글쭈글했다. 예전에 회암사에서 보았을 때와 너무 달랐다. 그러고 보니 세수 90세를 바라보는 만우의 늙은 모습이었다. 신미는 공손하게 오체투지 하듯 삼배를 올렸다.
“늦게 찾아뵈어 송구합니다.”
“무슨 말씀인가. 내불당 일이 분주할 텐데.”
“노스님께서 흥천사에 오셨다는 소식은 진즉 들었습니다. 헌데도 이제야 시간을 냈습니다.”
“상감마마께서 명을 내려 이곳 흥천사로 왔네만 이 늙은이는 회암사가 좋아.”
“두시 주해를 하시고 계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이 늙은이가 다 하는 것은 아니네. 나는 참여한 선비들에게 조언만 해줄 뿐이네.”
만우는 세종의 명으로 흥천사에 왔지만 회암사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두시를 주해하고 언해하는 일 때문이었다. 고령인 만우의 나이를 고려하여 실무는 시승 월창(月窓)과 의침(義砧), 그리고 충청도 서산 출신으로 선대의 죄에 연좌되어 평민이 된 유휴복과 유윤겸, 집현전의 몇몇 학사들이 맡았다. 물론 인원을 선발한 사람은 만우가 아니라 세종이 손수 했다. 세종은 벼슬아치나 평민, 승려를 가리지 않고 두시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을 추천받아 발했던 것이다.
“잘 왔네. 언해할 인재가 필요했어. 언해라면 신미스님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제 힘이 닿는 데까지 하겠습니다만 지금은 내불당 일이 너무 바쁩니다.” “일단 두시를 모으고 주해를 먼저 해가겠네. 상감마마께서는 나라에서 두시를 잘 아는 사람들을 다 선발하셨네. 신분을 불문하고 추천받으셨어. 상감마마께서 얼마나 두시를 애송하시는지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두시를 언해하여 백성들에게 읽히고 싶은 상감마마의 마음까지도 짐작이 되네.”
“두시의 대가인 이색 대감이나 그분의 문인인 이숭인 대감이 계시지 않는 것이 유감입니다.”
“나도 처음에는 이색 대감한테 두시를 묻곤 했어. 허나 두 분 모두 태종 때 돌아가시었으니 애석한 일이 되고 말았네.”
신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 같아서는 만우 노승과 밤이 깊도록 정담을 나누고 싶었지만 내불당으로 불시에 누가 찾아올지 몰랐다. 뿐만 아니라 언문청에 떨어진 일도 적지 않았다. 유서(儒書)를 옮겨 적는 일은 물론 내명부에서 부탁하는 불경을 언해하는 일도 맡아야 했다. 내명부(內命婦)는 상궁이나 궁녀들을 관장하는 관청이었던 것이다. 신미는 두시를 언해하는 만우의 일에 적극적으로 돕지는 못했다. 자신에게 쏟아진 내불당의 많은 일로 잠깐 동안이라도 흥천사에 머물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두시언해는 만우가 고령이었으므로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명으로 흥천사에서 유생들이 애독하는 두시를 주해하고 언해를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불경이 아닌 서책으로서 최초의 언해였기 때문이었다.
훈민정음 반포는 자꾸 뒤로 미뤄졌다. 세종의 선대 여섯 분의 공덕을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지어 시험해 보기도 했지만 훈민정음 반포는 3년도 더 지연되었다. 신숙주 등에게 지시하여 시작한 중국의 한자음 사전의 일종인 〈운회(韻會)〉를 훈민정음으로 언해하는 작업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훈민정음 창제를 찬성했거나 호의적인 유신들이 훈민정음으로 〈용비어천가〉를 편찬한 사실이었다. 정인지, 안지, 권제 등이 먼저 악장을 짓고, 이후 집현전 학사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이 주석을 달았다. 그리고 간행 전에 서문은 정인지, 발문은 최항이 썼다. 물론 자문은 훈민정음 창제에 오랜 동안 간여했던 신미가 했다.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했던 최만리 등은 세종의 총애를 잃은 채 〈용비어천가〉를 편찬하는 데는 참여하지 못했다.
중궁(中宮, 소헌왕후)의 병환도 훈민정음 반포를 늦추는 요인이었다. 봄에 갑자기 병환이 든 중궁은 세자와 대군들의 지극한 간병을 받았지만 내전(內殿)의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세종은 부처의 가피로 중궁이 병환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따금 내전으로 신미를 불러 설법을, 정효강에게는 염불을 요청했다. 정효강은 자신의 집에 절을 지어 아침저녁으로 염불하고 때때로 흥천사에서 수행할 정도로 신심이 돈독했던 것이다. 내전에서 신미가 중궁을 위해 법문한 불경은 주로 〈약사경〉이었다. 신미가 법문하는 동안에는 세자는 물론이고 수양과 안평, 정효강 모두 무릎을 꿇고 합장한 채 귀를 기울였다. “약사여래는 12대원을 서원하신 부처님이십니다. 약사여래부처님의 일곱 번째의 대원은 이렇습니다. ‘병들어 온갖 고통당하는 유정들이 내 이름을 한 번만이라도 듣게 된다면 온갖 병이 없어지고 심신이 편안하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신미의 설법이 끝나면 세자는 늘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사님이 설법하신 바를 아바마마께 그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세종은 또 중궁의 쾌유를 위해 집현전 수찬 이영서와 돈령부 주부 강희안에게 명하여 성녕대군의 옛집에서 금을 녹인 금물로 불경을 쓰게 했다. 금괴는 수양과 안평이 조달하고 감독했다. 이 일 역시도 승려와 다름없는 정효강이 주관했고, 신미는 내불당으로 옮기어온 금자 불경의 오탈자를 감수했다. 금자 〈약사경〉은 두 달 만에 완성되었다. 〈약사경〉 표지에는 금물로 그려진 용이 살아 있는 듯 꿈틀거렸다. 금자 〈약사경〉이 대자암으로 옮겨지기 전날이었다. 세종은 신미를 세자가 거처하는 별궁으로 불렀다. 신미가 별궁 침전으로 들자마자 세종이 물었다.
“대사, 중궁의 병환이 깊소. 금자 〈약사경〉을 대자암으로 이운한 뒤 법석을 크게 연다면 부처의 영험이 있을 것 같소? 과인은 반드시 감통한 점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소.”
“전하, 법석을 연다고 해서 중궁마마께서 병환을 떨치시고 일어나시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금자 〈약사경〉까지 만들어 대자암에 시주했는데도 중궁이 쾌유치 못한다는 말이오?”
“금자 〈약사경〉을 시주하여 법석을 여는 것은 복을 짓는 일임에는 틀림없사옵니다. 하오나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전생의 빚이 있는 법입니다. 전생에 지은 빚은 반드시 금생에 병고나 우환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궁마마의 병환은 전생 빚을 갚는 일이기도 하니 오히려 빚 갚을 기회라 여기고 기쁜 마음을 갖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이옵니다.”
“얼마 전 세자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약사여래부처가 한 대원의 말을 귀에 스치기만 해도 병고가 사라진다고 했다는데 그것은 또 무엇이오?”
“생로병사가 인간의 모습인데 찾아든 병고가 어찌 쉬이 사라지겠습니까? 다만 병고가 나아지기를 바라는 약사여래부처님의 대원을 알고 마음이 편안해지거나 병고로 인한 공포에서 벗어난다는 뜻이옵니다.”
신미는 병석에 누운 중궁이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병마에 시달리는 중궁이 할 수 있는 것은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고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을 떨치는 일이었다. 복을 지으면 그 덕화의 그늘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알게 모르게 드리워지는 법이었다. 지금 걱정해야 할 사람은 중궁이 아니라 몰라보게 야윈 세종이었다. 몇 년 전부터 세종은 눈이 침침해지는 눈병에다 물을 마셔도 점점 갈증이 심해지는 소갈증과 오줌을 누는 동안 가끔 급통(急痛)이 생기는 석림(石淋, 요도결석)을 심하게 앓고 있었던 것이다.
“대자암에서 법석을 여는 것은 중궁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이오?”
“전하, 아뢰옵기 외람된 말씀이오나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또 그 죄를 부처님께 고한 뒤 불단에 한 그릇 밥과 과일을 올린다고 해서 어찌 그 죄가 사라지겠습니까? 다만 불단에 올린 공양물을 주린 백성들이 먹고 허기를 면한다면 그것이 바로 덕을 쌓는 적선이 되는 것이옵니다. 부처님은 죄를 묻고 벌하는 분이 아니고 복을 짓게 하는 복전일 뿐이옵니다. 옛날 말에 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고 했사옵니다. 전하께서 계시는 궁도 마찬가지이옵니다.”
세종은 집현전 응교로 복직된 정창손 등이 ‘법석을 열게 되면 불씨(佛氏)를 신봉하는 백성들이 많아질 것이며 그로 인한 폐단과 허탄함이 심해질 것’라고 반대했지만 대자암에서 법석을 열 것을 명했다. 세종 28년 5월 27일의 일이었다. 즉시 세자, 수양과 안평, 정의공주는 세종의 명을 받아 법석을 추진했다. 신미는 법석을 증명하는 법사가 됐다.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대자암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대자암으로 가는 산길마다 백성들이 개미떼처럼 줄을 이었다. 금자 〈약사경〉의 경찬회 법석을 연 지 3일이 되자, 농사짓는 양인은 말할 것도 없고 팔도의 거지들까지 무리지어 나타났다. 법당의 불단 말고도 대자암 뜰에는 떡과 과일이 산처럼 쌓였고, 야외에 설치한 여러 개의 가마솥에서는 밥 익는 구수한 냄새가 진동했다. 궁에서 파견 나온 장설내시들은 대군 주변에 모이는 사람들을 밀치느라 분주했다. 법당 안은 물론이고 뜰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북적였다. 전국의 절에서 달려온 승려만도 2천여 명이나 되었다. 신미가 주지에게 신신당부한 바는 결코 고상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백성들에게 베푸는 공양물에 정성을 다하라는 것이었다. “대군마마나 공주님은 장설내시들이 잘 알아서 할 터이니 스님들은 백성들을 잘 챙기시오. 모두가 생불이라 여기고 공양해야 합니다. 주린 이들부터 밥과 떡, 과일을 나눠주어 배가 불러야 합니다. 관원과 양인들도 줄을 서되 앞서지 말고 주린 이들 뒤에 서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 같은 신미의 당부는 경찬회 법석이 열리는 7일 동안 지켜졌다. 경찬회를 파회하는 날 정효강은 합장하며 눈물을 흘렸다.
“우리 화상(和尙)이 공자, 맹자와 같이 거룩한 묘당(廟堂)에 드시더라도 무슨 부족한 점이 있겠는가!”
대군들도 모두 신미를 찬탄했다.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든 것은 모두 대사님의 거룩한 법문을 듣고자 함입니다.”
“아닙니다. 모두 병석에 계신 중궁마마의 덕입니다. 백성들은 결코 중궁마마의 덕화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 대자암 공양소식은 나라 안 백성들 사이에 번개처럼 빠르게 퍼질 것입니다.”
대자암은 이름만 절이지 실제로는 왕실행궁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경찬회 법석은 백성들을 직접 상대하는 왕실정치와 다를 것이 없었다. 물론 구병이나 극락왕생을 빌고자 경찬회나 수륙재를 왕실 후원으로 열기는 했지만 또 하나의 목적은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 신하들을 거치지 않고 직접 백성들을 만나 그들의 소리를 듣고 마음을 사는 것이었다.
중궁은 신미의 예감대로 대자암에서 법석을 연 지 한 달이 조금 못돼 수양의 별궁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빈소는 수양의 별궁에 차렸고, 수양은 조문객들을 맞아 몇 달째 밤낮으로 슬피 곡을 했다. 소갈증으로 수척해진 세종과 원래 병약한 세자의 심신은 더욱 약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