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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한글 원각선종석보가…”<br>정찬주 장편 ‘천강에 비친 달’-34
정찬주 ibuljae@naver.com 2014-07-05 (토) 21:39
천강에 비친 달 〈34〉
〈원각선종석보〉
장맛비가 오락가락했다. 비를 맞아 풀밭에 떨어진 매화나무 매실들이 새알처럼 탐스러웠다. 비에 젖어 싱싱하고 탱탱했다. 그러나 까마귀와 까치는 신맛이 나는 매실보다는 단맛이 들고 있는 자두를 부리로 쪼았다. 아직 덜 익은 자두인데도 날카로운 부리로 쪼아 땅바닥에 떨어뜨리기도 했다. 낙과한 자두들이 내불당 요사 가는 길에 뒹굴었다.
내불당 다모로 온 희우는 불단에 차를 올렸다. 희우로서는 꿈을 이룬 셈이었다. 신미를 가까이서 시봉하게 된 까닭이었다. 추천한 사람은 사헌부 관원 정효강이었다. 내불당에 재가 많아졌으므로 차를 잘 우리는 다모와 음식 솜씨가 좋은 공양주가 필요했던 것이다. 차를 알고 손맛이 뛰어난 구실아치는 희우뿐이었다. 정효강이 불심 깊은 희우를 사헌부에서 오랫동안 지켜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희우는 부처님 사리가 봉안된 금불상에 차를 올리고, 내불당 승려들을 위해 공양주가 된 것을 더 없이 기쁘게 여겼다. 아침저녁으로 부처님 사리를 친견한다는 것은 정복(淨福)에 겨운 일이었고, 세자와 대군, 공주가 존경하는 신미를 시봉하는 일 또한 아무라도 쉽게 가질 수 없는 행운이었다.
다만 내불당은 사헌부와 달리 언행을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궁중과 궐 밖의 차이만큼 몸가짐을 조신하게 다잡아야 했다. 임금의 정비인 소헌왕후와 후궁인 신빈김씨, 그리고 상궁과 선배 궁녀들이 자주 드나들기 때문이었다. 사소하고 공연한 일로 구설수에 오른다면 매를 맞거나 큰 화를 부를 수도 있었다.
최근에는 얼굴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상궁에게 야단을 맞은 적도 있었다. 상궁이 희우를 찾았는데 내불당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미의 심부름으로 궐 밖에 나갔을 뿐 내불당 소임을 태만한 것은 아니었다. 며칠 전이었다. 상궁이 작심한 듯 가자미눈을 하고 희우를 닦달했다.
“공양간을 비우고 어디를 싸돌아다니는 것이냐!”
“대사님 심부름으로 궐 밖에 다녀오곤 했습니다.”
“내가 너를 찾을 때마다 궐 밖으로 나갔다는 말이 이상하지 않느냐.”
“송구합니다.”
“네가 내불당을 비우면 지체 높으신 분들을 누가 시중을 들까?”
희우는 구구하게 변명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신미가 안맹담 집을 드나든다는 얘기를 절대로 하지 말라고 희우에게 함구령을 내렸던 것이다.
“도대체 대사님이 무슨 일로 너를 궐 밖으로 보낸다는 것인지 알 수 없구나.”
“대사님 서신을 전하러 흥천사나 진관사를 다녀오곤 했습니다.”
희우는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다. 그제야 상궁이 마지못해 노기를 풀었다.
“명심해라. 내불당 다모로 들어왔지만 왕비마마를 비롯하여 지체 높은 분들을 시중하는 궁녀라는 사실을.”
“네.”
희우는 벌을 서듯 앞으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신미의 심부름으로 가는 곳은 흥천사나 진관사가 아니었다. 정의공주의 남편인 부마 안맹담(安孟聃)의 집이었다. 안맹담 집은 절과 흡사했다. 너른 뜰에는 절에서 볼 수 있는 불두화가 만발해 있었고, 석탑과 석등이 있었다. 더구나 안채 뒤에는 승려 10여 명이 기거하는 절이 있었다. 안맹담이 자신의 재산 일부를 처분하여 지은 천불사(天佛寺)였다.
안맹담은 공민왕의 조카이자 함길도 관찰사였던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승복을 입고 다녔으므로 승려나 다름없었다. 아침저녁에는 개인 절 천불사로 들어가 승려들과 함께 예불을 보았고, 끼니때가 되면 반드시 불경을 먼저 외고 먹었다. 유생들이 비웃거나 말거나 사람을 만나면 공손하게 합장하며 예를 표했다. 안맹담이 부처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믿게 된 계기는 신미를 스승으로 삼은 정의공주의 영향이 컸다. 안맹담은 자신이 믿어왔던 유교를 버리고 석교로 개종할 만큼 정의공주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안맹담은 자신의 집에 사람들이 출입하는 것을 엄격하게 막았다. 희우도 처음에는 솟을대문 밖에서 정의공주나 안맹담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한참을 기다렸다가 들어가곤 했다. 낯익은 문지기에게 물어봐도 그런 사정을 잘 몰랐다.
“공주마마께 긴히 전해드릴 것이 있으니 어서 전해라.”
“함부로 들이지 말라 했습죠. 무얼 가지고 오셨다고 전할갑쇼.”
“그건 네가 알 바 아니다.”
“쇤네도 귀찮구먼요. 올해부터는 아예 대문 빗장을 걸고 있습죠.”
희우가 안맹담 부부에게 서너 번 전했던 것은 비슷한 분량의 종이뭉텅이였다. 희우로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글자와 한자, 기묘한 형태의 범자가 쓰인 종이뭉텅이였다. 그러니 희우로서는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 내용을 어렴풋이 들은 바는 있었다. 수양이 내불당을 찾아왔을 때 신미가 “전하께서 창안하여 만든 28자를 이용해서 〈원각선종석보〉를 언해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언해란 한자를 언문(諺文; 한자가 아닌 다른 나라 글자)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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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희우는 신미가 왜 종이뭉텅이를 안맹담 집으로 보내곤 했는지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희우는 손에 들지도 못하고 종이뭉텅이를 아기 밴 여인처럼 복대 속에 차고 다녔다. 물론 희우가 신미에게 몹시 궁금하여 물은 적도 있었다. 처음으로 심부름 나설 때였다.
“대사님, 옷 속에 감추라는 것은 무엇이옵니까?”
그러나 신미는 희우를 나무랐다.
“보살은 알 것 없소. 다만 지극히 중요한 것이니 잘 간수하시오.”
“실수할까 걱정되옵니다.”
“때가 되면 알 것이오. 그때 말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내불당에 왕비마마나 상궁이 오시면 갑자기 제 할 일이 생깁니다. 공주마마 댁에 얼마나 가야 되는지 알고 싶사옵니다.”
“장마철 전후로 끝날 것이오.”
“공주마마 댁 출입은 무척 까다롭습니다.”
“머잖아 그 이유도 알게 될 것이오.”
심부름하는 희우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면 분명코 비밀리에 진행하는 무슨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신미가 언해한 〈원각선종석보〉를 정의공주나 안맹담이 검토하거나, 수정하는 일이 아닌 듯했다. 희우를 통해서 안맹담 집으로 가는 종이뭉텅이가 다시 돌아오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중요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문지기를 비롯한 건장한 노비들이 안맹담 집을 철통같이 지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까마귀 몇 마리가 내불당 뒤 자두나무 가지에 앉아서 날카롭게 울었다. 희우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까마귀들이었다. 불단에 올리기도 전에 까마귀들이 열린 자두를 다 쪼아 먹을 수도 있었다. 희우는 일부러 까마귀를 쫓기 위해 자두나무 밑으로 갔다. 장맛비가 고인 땅바닥에는 자두 몇 알이 뒹굴었다. 자두 씨만 남은 것으로 보아 까마귀가 쪼아 먹은 자두였다. 까치는 한두 입 콕콕 쪼고 말지만 까마귀는 살코기 살점 같은 붉은 과육을 다 발라먹었다. 까마귀들이 희우를 경계하더니 자두를 부리에 물고 도망치듯 날아갔다. 그때 신미가 희우를 불렀다.
“보살!”
“네, 대사님.”
“마지막이오. 공주마마 댁에 다녀오시오.”
“다 마치셨사옵니까?”
“그렇소.”
신미가 흡족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두어 마디를 덧붙였다.
“심부름 잘해왔으니 알려주겠소. 공주마마 댁 절에서는 언해한 〈원각선종석보〉를 목판에 새기고 있소.”
“대사님, 저도 책을 볼 수 있사옵니까?”
“다섯 권이나 되니 완성하려면 여름 한 철은 지나야 할 것이오. 늦어도 제비가 강남으로 가기 전에는 볼 수 있을 것이오.”
그런데 희우는 바로 안맹담 집으로 가지 못했다. 신빈김씨와 늙은 상궁이 예고 없이 내불당으로 왔던 것이다. 궁녀 출신인 신빈김씨는 유난히 희우에게 정을 많이 주었다. 명나라에서 들어온, 젊은 상궁들이 탐내는 화장품을 몰래 주기도 했다. 희우가 신빈김씨를 따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신빈김씨의 자애로운 마음씨 때문이었다. 소헌왕후의 손발이 되어 온갖 시중을 다 들면서도 갓난아기 수양을 업고 길렀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희우는 신빈김씨가 살아 있는 관세음보살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해 가을.
신미의 예상대로 초가을이 되자 안맹담 개인 절 천불사에서는 〈원각선종석보〉 5권을 목판본으로 찍어냈다. 책 끝에 정통(正統) 3년, 천불사라고 발간년도와 장소를 밝혔다. 정통 3년은 세종 20년(1435)이었다. 이는 훈민정음을 세상에 반포하기 8년 전의 일이었다.
세종이 창안하고 신미가 만든 28자의 글자는 〈원각선종석보〉 내용을 옮기는데 조금도 부족함 없었다. 신통방통하게 적확했다. 진서라 불리는 한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상의 온갖 소리들을 다 표현할 수 있었다. 〈원각선종석보〉를 받아든 세종은 안맹담과 정의공주에게 노고를 치하하며 노비 30여명을 하사했다. 이는 나라의 일등공신에게 하사하는 예우였다.
그러나 세종은 뒷일을 걱정하며 곧 냉정해졌다. 〈원각선종석보〉의 발간부수를 제한한 뒤 내불당을 출입하는 왕비와 상궁들에게만 유포시켰다. 궁궐 밖에 〈원각선종석보〉가 나도는 것을 어명으로 금지했다. 중국 문자인 한자만이 진실한 글자이고, 성인의 글자라고 추종하는 집현전 유신들의 반발을 염려했다. 집현전 유신들은 한자 이외의 글자는 모두 언문이라며 낮추어 불렀던 것이다. 세종은 몇 해를 넘기더라도 집현전 유신들을 설득하리라고 작심했다. 세종은 찬반이 극렬하게 갈리는 나랏일을 볼 때마다 자신의 독선을 경계했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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