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32〉


자객


육조거리에 관원들이 하나 둘 모여드는 아침이었다. 흥천사 뜰에 날아든 새들의 소리가 유난히 시끄러웠다. 먹이를 찾아 수국의 낭창낭창한 잔가지를 건너뛰며 지저귀었다. 팽나무 그늘에서 작은 부리로 풀밭을 헤집는 까치도 보였다. 뜰에 아침 햇살이 들기 전의 풀밭은 촉촉했다. 밤이슬이 풀잎 끝에서 영롱하게 반짝이곤 했다.

신미는 풀잎 끝의 이슬을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풀잎 끝의 이슬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몸을 미련 없이 던지려 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반짝일 수 없었다.

‘그렇다. 비록 내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입궐하여 전하의 뜻을 이루리라. 전하의 명을 받들고야 말리라.’

신미의 모습은 어젯밤과 달랐다. 예리한 삭도로 수염을 밀어버렸기 때문에 나이가 훨씬 젊어 보였다. 옷도 말구종이 입던 옷이었으므로 노비의 모습과 흡사했다. 대신 신미의 가사장삼을 입고 있는 말구종은 영락없는 승려 행색이었다. 다만 영리한 말은 눈치를 챘다. 말구종을 떨어뜨리려 했다. 말구종이 말 등에 올라타자 화가 난 듯 엉덩이를 치켜들곤 했다. 그러한 말도 잠깐 동안 반항하다가 멈추었다. 말구종은 말을 익숙하게 다루었다. 옆구리를 발로 가볍게 차며 고삐를 몇 번 낚아채자 이내 순해졌다.

흥천사 산문을 나서는 동안 아무도 두 사람의 역할이 바뀐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일단 두 사람의 변장은 성공한 셈이었다. 산문에서 육조거리 사이에는 관원들이 산책하는 호젓한 오솔길이 하나 나 있었다. 신미는 광화문 대로보다는 오솔길을 이용하여 입궐하곤 했다. 승려가 역마를 타고 다닌다는 유생들의 손가락질 때문이었다. 오솔길을 들어서는 순간 동면에서 깨어난 오소리 한 마리가 광화문 쪽 숲속으로 느릿느릿 사라졌다. 말을 타고 있는 말구종이 말했다.

“대사님, 놈들은 오소리가 튀어나온 숲에 있을 것입니다요.”

“어째서 그러느냐?”

“오소리가 먼저 놈들을 피해 도망가는 겁니다요.”

“새소리가 멎은 걸 보니 누군가가 숲에 있는 게 틀림없다.”

“대사님은 말 오른쪽에 계셔야 안전합죠.”

말 오른쪽이라 함은 오소리가 사라진 숲 방향이었다. 신미는 새소리가 멎은 숲 쪽을 경계하며 말고삐를 잡고 걸었다. 단검이 날아온다면 말구종이 위험했다.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당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고삐를 쥔 신미를 남겨두고 말을 타고 달릴 수도 없었다.

“일이 여의치 않으면 너 혼자라도 빠져나가거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쇤네가 말을 탄 것은 대사님을 보호하기 위해서입죠.”

“내가 잡히더라도 말먹이꾼으로 변장한 나를 차마 죽이겠느냐.”

“아닙죠. 증거를 없애고자 대사님 목숨도 노릴 것입니다요.”

“인과가 분명하거늘 어찌 악행을 숨길 수 있겠느냐.”

이윽고 나뭇잎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말이 먼저 주춤거렸다. 순간 말구종이 소리치며 말 등에 붙듯 몸을 낮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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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놈이냐!”

말구종을 겨냥한 단검 두 개가 연달아 날아왔다. 단검 하나는 말구종의 등을 스치며 빗나갔고 또 하나는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말구종은 즉시 말에서 뛰어내려 복면을 쓴 자객과 맞섰다. 자객은 칼을 들고 있었고 말구종은 맨손이었다. 말을 사이에 두고 있었으므로 바로 공격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키가 큰 자객이 비호처럼 말을 뛰어넘어 말구종을 공격했고, 또 다른 자객은 말고삐를 잡고 있는 신미에게 다가왔다. 키 큰 자객이 말했다.

“말먹이꾼도 죽이거라.”

신미에게 휘두른 자객의 칼이 나뭇가지를 잘랐다. 겁을 줄 뿐 위해할 칼놀림은 아니었다. 꺾어진 나뭇가지가 자객의 두건을 벗겼다. 신미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일부러 칼을 허공으로 휘두른 자객은 어젯밤에 흥천사로 찾아온 사간원 구실아치였다. 구실아치가 작은 소리로 짧게 말했다.

“대사님, 어서 말을 타고 피신하십죠.”

“그럴 수는 없다.”

말구종과 키 큰 자객의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말구종은 자객의 칼을 피해 나무둥치 뒤로 숨곤 했다. 자객의 칼끝이 말구종의 급소를 노렸지만 그때마다 말구종은 나무둥치를 방패 삼아 요리조리 피했다. 젊은 날 무예를 닦아 놓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방어무술이었다. 신미가 소리쳤다.

“내가 신미다!”

“날 속이려들지 말라!”

말구종이 키 큰 자객을 놀리듯 외쳤다.

“나 신미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서로가 신미라고 주장하므로 키 큰 자객이 칼놀림을 멈칫했다. 그러나 말구종은 벌써 지쳐 있었다. 늙은 몸이 자신의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자객의 칼끝을 피하는 몸이 점점 둔해지고 있었다. 신미가 자신의 팔뚝을 보이며 소리쳤다.

“내 팔에 연비 자국이 보이지 않느냐!”

“죽고 싶다면 조금만 기다려라.”

키 큰 자객이 칼을 든 채 침을 뱉으며 이죽거렸다. 그러더니 잡목넝쿨에 걸려 쓰러진 말구종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디선가 한 무리의 복면들이 나타나 키 큰 자객과 구실아치를 공격했다. 바람처럼 나타난 복면 우두머리는 키 큰 자객보다 무예가 훨씬 출중했다. 현란한 칼놀림으로 키 큰 자객을 제압해버렸다. 키 큰 자객과 사간원 구실아치는 피를 흘리며 숨통이 끊어졌다. 복면 우두머리가 말했다.

“대사님, 뒷수습은 걱정 마십시오.”

“뉘신데 우리를 구해주는 것이오?”

“차차 알게 되실 것입니다.”

“저 사람들을 죽일 필요는 없잖소?”

“그것도 차차 알게 될 것입니다. 어서 이 자리를 떠나십시오.”

신미와 말구종은 숲속에서 옷을 바꿔 입었다. 신미가 말 등에 올라타자 말이 진저리치며 움직였다. 오솔길을 다 빠져나와서야 말구종이 말했다.

“대사님, 구실아치가 불쌍합니다요.”

“날 죽이려 했던 자객도 마찬가지다.”

“그놈은 대사님 목숨을 노렸는데 왜 불쌍한 것입니까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그랬지 나와 무슨 원수를 졌겠느냐.”

“그래도 두 사람은 다릅니다요. 구실아치는 대사님을 살리려 했다가 죽었고 자객은 대사님을 죽이려 했다가 죽었습죠.”

“어쨌든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중으로 변장한 네 덕분이다.”

“쇤네가 아니라 저 이상한 복면들입죠.”

“알 수 없는 일이다. 저 자들이 왜 우리를 살려주었는지 말이다.”

“무예가 보통이 아니었습죠.”

“오랫동안 무예를 갈고 닦은 무인이 틀림없다.”

“그렇습죠. 제 목숨을 노린 놈이 복면대장에게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거꾸러졌으니까요.”

“이 일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

“대사님 수염만 없어지고 말았습니다요.”

“이놈아, 수염은 또 자란다.”

육조거리에 들어서 말구종이 신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고마운 구실아치 천도재는 대사님께서 지내 주십시오.”

“그뿐이냐. 함께 죽은 사람도 극락 왕생시켜줘야지.”

말구종은 신미의 처사를 납득하지 못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린 이까지도 극락왕생을 빌어주겠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신미는 말에서 내린 뒤 궁문을 들어서면서 중얼거렸다.

‘정체를 알 수 없구나. 우리를 살려준 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일이구나.’


다음 날.

이른 아침인데도 사간원 솟을대문 앞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아직 대간들이 일과를 시작하기 전이었다. 사람들 앞에는 칼을 맞아 죽은 시신 두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시신은 복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 검시하는 형조의 관원이 오기 전에는 함부로 복면을 벗기거나 시신을 옮길 수 없었다.

두 구의 시신을 아는 사람은 신미와 말구종뿐이었다. 복면들이 시신을 그곳에 던져두고 사라진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신미를 탄핵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 구의 시신을 사간원 솟을대문 앞에 놓고 갈 리 없었다. 그들은 신미를 제거하려는 사간원의 음모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임에 분명했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