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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소리를 더 듣고 싶구나”<br>정찬주 장편 ‘천강에 비친 달’-27

정찬주 | ibuljae@naver.com | 2014-05-29 (목) 17:36

천강에 비친 달 〈27〉


왕의 약속


세종은 두 팔을 뒤로 젖히며 심호흡을 했다
. 삼각산 숲에서 들려오는 상쾌한 뻐꾸기 소리까지 이른 아침의 신선한 공기와 함께 폐부 깊숙이 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심호흡을 천천히 몇 번을 더 반복했다. 이른 아침에 심호흡을 하면 무언가 충만한 기분이 더 배가되는 것 같았다. 신하들의 줄기찬 반대에도 불구하고 흥천사 사리전을 대대적으로 중수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어머니 원경왕후의 재를 지냈던 흥천사 주지스님과 신미의 원을 비로소 들어준 것도 마음이 놓였다. 더구나 신미는 세자와 수양, 안평 등과 비밀리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우리 글자를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승려였던 것이다. 가끔씩 심호흡을 하는 세종의 습관을 아는 사람은 내시뿐이었다. 내시가 허리를 구부린 채 자라처럼 고개만 빼고 말했다.

전하, 기분 좋은 일이 있사옵니까?”

오늘은 흥천사 사리전이 내 뜻대로 중수(重修)가 시작되는 날이다.”

지지난 해에 시작되지 않았사옵니까?”

과인이 수리를 지시한 것은 8년 전이다. 아마도 초봄이었을 것이다. 추위가 풀리자마자 지시했으니까.”

세종의 기억은 정확했다. 세종 11(1429)2월에 흥천사 주지스님의 청원을 들어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기울어진 지붕을 고치는 부분 수리였는데, 승지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던 것이다.

흥천사의 사리전은 태조께서 창건하신 전각이다. 이제 들으니 기울어져 위태하므로 중들을 불러들여 일한다고 하니 도첩을 주어 수리하게 하고, 석수와 목공은 선공감에서 주관하고 감역관은 조성도감에서 파견하는 것이 좋겠다.’

선공감은 건축과 토목공사를 주관하는 공조 소속의 관청이었고, 조성도감은 선공감과 기능은 같으나 공사가 있을 때만 임시로 설치한 관청이었다. 또한 감역관은 공사를 책임지고 감독하는 종 2품의 관원이었다. 세종이 높은 벼슬아치를 감역관으로 정한 것은 그만큼 흥천사 사리전을 중시했던 까닭이었다.

네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지지난 해에 이르러서야 사리전을 크게 중수하라고 지시했으니 말이다.”

사리전을 다시 짓는다는 계획으로 크게 중수할 것을 명했던 것이다. 재작년, 그러니까 세종 175월이었다. 세종은 형인 효령대군을 감역관으로 명하고 승지 권채(權採)에게 세종의 당부가 담긴 권문(勸文)을 지어 백성들이 보게 했다.

우리 태조께서 운수에 응하여 나라를 열어서 만 가지 교화가 함께 새롭고, 나라를 넉넉하게 하고 백성에게 은혜롭게 하는 정치가 시행되지 않음이 없었는데, 불씨(佛氏)의 교()도 유명(幽明; 저승과 이승)을 이롭게 할 수 있다 하여 그 도()를 폐하지 않았다. 병자년에 흥천사를 정릉 곁에 창건하여 국도(國都)의 서쪽에 두었는데,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위에는 (1층 규모) 부도를 세우고 팔면사층의 전당을 지었는데, 까마득하게 높아서 동국 고래(古來)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태조께서 이 절에 뜻을 두고 머무시다가 말년에 이르러 태종에게 정녕하게 부탁하신 바, 태종께서 뜻을 이어받아 수리하셨으니, 자손 된 자가 마땅히 삼가 지키어 무너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탑전은 형세가 높고 위태하여 오랜 세월의 풍우에 기울어지기가 쉽다. 근일에 절의 중이 와서 말하기를 썩고 기울어진 것이 전보다 더욱 심하니, 만일 층각(層閣)이 갑자기 무너진다면 석탑도 따라서 무너질 것이 뻔합니다.” 하였는데, 내가 그 말을 듣고 슬프게 여겼다. 내가 석씨의 설에 대하여 감히 알고 있어 혹신(酷信)하지 않지마는 조종(祖宗)께서 염려하시던 것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되었는데 무심하게 걱정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차마 못할 일이다. 일으켜 수리하려고 생각하여 신하들에게 의논하고 목공에게 물어보니, 모두 말하기를 이 집이 처음에 지은 이래로 40년도 못 되었지만 두 번이나 수리한즉 무궁하게 전하지 못할 것은 분명한 일이옵니다. 지금 비록 고쳐 수리한다 하더라도 또한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하니, 그 말이 일리가 있다. 지금 탑 위를 없애고 앞에 새 전각을 지어 대신한다면 성조(聖祖)의 남긴 뜻을 배반하지 않고 자주 수리하는 폐단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역(工役)의 번거로움을 백성에게 미치게 할 수는 없으니, 만일 석도(釋徒)들의 뜻있는 자만으로도 도모해진다면 탈 없이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시종 여일하게 힘을 다하는 중이 있다면 비록 도첩이 없는 자라도 추가하여 발급하겠고, 양식이 부족하다면 내가 보충해주겠으니 내 뜻을 받아 노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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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어진. 사진=세종대왕기념사업회


그런데 흥천사 사리전 중수는 신하들의 반대가 심했다. 왕명이 떨어졌는데도 1년 동안 수시로 신하들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착공을 못했다. 할 수 없이 세종은 작년 6월에 승정원의 승지들에게 강력한 지시를 내렸다.

지금 흥천사의 탑전이 오래되어 장차 무너지려 하므로 내가 개축하고자 함은 이단을 믿어서가 아니다. 조종의 유훈을 따르려 함인데 전날 개축하고자 하였으나 유생들이 반대하는 바가 컸다. 나는 재상 중에 착한 마음이 있는 자로 하여금 그 일을 주장하게 하고, 중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시주를 권하도록 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반대하는 유생의 뜻을 버리고 내가 조종을 따르는 마음을 받아서 재상 중에 이 일을 맡아서 할 사람을 골라 아뢰어라.’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상소에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리전을 관아건물의 상태처럼 보고하는 관리를 두도록 했다. 공조의 선공감에서 4품 이상의 관원 두 사람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창덕궁의 종루와 같이 석 달마다 돌아가며 사리전의 상태를 친히 가서 점검한 뒤 보고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전하, 사리전 공사는 언제쯤 끝나는 것이옵니까?”

매번 수리할 수 없으니 이번에 시일이 걸리더라도 완전하게 개축할 것이니라. 앞으로도 3, 4년은 걸릴 것이다.”

물론 세종은 사리전을 개축하는데 세세한 것까지는 몰랐다. 자잘한 부분은 흥천사 주지스님의 청원을 참고했다. 흥천사 주지스님이 세종에게 청원한 내용은 옛 모습대로 5층으로 중수하되 단청은 예전대로 고졸하게 하고, 맨 아래층 처마를 늘리고 벽을 물려 안이 더욱 넓어지는 것이었다. 또한 주지스님의 원대로 층계와 축대, 난간, 담 등은 태조 때보다 더 정교하게 공을 들였고, 잡인들이 흥천사 안을 엿볼 수 없게끔 바깥담을 높이 쌓았다.

사리전 중수에 반대하는 신하들은 주로 사헌부와 사간원 벼슬아치들이었다. 그들은 불교를 요사스런 이단으로 보아 배척했다. 다행히 효령대군을 비롯한 세자와 수양과 안평은 물론이고 왕실의 종친과 정효강 같은 불자신하들이 있었으므로 세종은 사리전 불사를 밀고 나갈 수 있었다.

전하, 조금 있으면 수라를 드실 시간이옵니다.”

오늘은 저 명랑한 뻐꾸기 소리를 더 듣고 싶구나.”

세종은 흡족한 기분을 더 즐기겠다는 듯이 침전 뒤 숲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뻐꾸기 소리는 문득 15년 전에 아버지 태종의 냉대와 학질을 앓다가 숨을 거둔 어머니 원경왕후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자 뻐꾹 뻐꾹 하는 소리가 슬픈 울음소리로 바뀌어 가슴을 파고들었다. 세종은 숲길을 더 걷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결국 흥천사 사리전 중수 문제는 세종의 의도대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흥천사 사리전에 있던 사리를 궁내에 둘 수 없다며 대간들이 들고 일어났다. 사리전을 중수하면서 임금의 의복을 관장하는 공조 소속의 상의원(尙衣院)에 잠시 보관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흥천사 사리전 사리는 창덕궁 금소전 옆 내원당에 있었는데 금소전을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흥천사 사리전으로 갔던 것이다. 신하들은 사리를 부처의 뼈라 하여 불골(佛骨)이라고 불렀다. 신하들은 상의원에 사리가 보관된 것을 두고 흉하고 더러운 물건이라 하여 하나같이 용납하지 못했다.

사헌부 권자홍이 엎드려 아뢰었다.

신 등이 듣자오니 사리탑의 불골을 궁내로 들여왔다, 하옵는데, 곰곰이 생각하여도 불가한 일이오니 속히 밖으로 내보내시기 바랍니다.”

자홍이는 불골의 내력을 모르는구나. 불골은 원래 궁내에 있었느니라.”

신은 처음 듣사옵니다.”

불골은 원래 창덕궁 금소전 옆의 내원당에 있었느니라. 그러던 것이 금소전을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도난에 대비하여 흥천사로 갔느니라. 그러니 불골이 궁 안에 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느니라. 더구나 상의원은 궁내라고 할 수 없느니라.”

사리가 어떤 사연으로 흥천사로 갔는지 밝혀지자 권자홍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며칠 후 사간원 헌납 최수(崔脩)가 나아가 권자홍을 대신해서 아뢨다.

불골은 지극히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 비록 서민의 집이라 할지라도 안으로 들이는 것을 즐겨 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궁궐 안이겠습니까? 흥천사 공사를 다 마치지 않았다 하오나 태조께서 창건하신 큰 절이 아직 성안에 있사온즉, 어찌 간직할 만한 곳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즉시 밖으로 버리도록 하옵소서.”

그러나 세종은 최수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다시 또 사헌부에서 좀 더 강력하게 사리전 중수는 태조에 대한 효성의 발로라 할 수 있지만 상서롭지 못한 마르고 썩은 불골은 임금의 의복을 관장하는 상의원에 둘 수 없으므로 승도에게 돌려보내라고 상소를 올렸지만 세종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이는 흥천사 주지스님과 신미와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세종의 굳은 의지였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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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안담 2014-05-30 12:2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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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석씨의 설에 대해 감히 알고 있어 혹신하지 않지마는..." 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리고 "불골은 지극히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아뢰는 당시의 풍토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순시대를 흠모하며
유교 이상국가를 만들겠다는 조선의 개국이 역설적으로 종교 철학의 암흑기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하나만을 용납하는 근본주의는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성에 반하는 짓이라 생각합니다.
청현 2014-05-30 14:09:50
답변  
어떤 사물은 그것의 본질을 스스로 밝히지 않기 때문에 때에 따라, 보는 이에 따라, 있는 곳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하게 만들지요. 도량이나 불골에 대한 조선 초기의 거대한 흐름은 분명 대세를 따라 배척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종은 단호하게 이에 대한 신념을 밝히면서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칩니다. 신미스님과의 굳은 약속, 이제 열매를 맺어갑니다.
은행나무꽃 2014-06-03 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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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왕이라지만
신하들의 눈치를 보지않을 수 없는 세종.
그래도 소신이 있었기에
거듭되는 상소를 애써 물리치고...

이불재 매실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쌍봉사 차 나뭇잎이 통통 살이쪘는지 궁금합니다.
무진 2014-06-11 12:5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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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향한 공덕과
부모께 극진한 효행으로
큰 즐거움에 들뜬 대왕
믿음과 굳은 의리로 더함에
그만 숙연해져서 모든 이들이 우러른다.
동천 2014-06-23 18: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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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의 국왕이면서  한 어머니의 자식으로 고뇌속에 행동하나 하나를 선택하여야 했을 대왕세종 !!!  자신의 소신과 유교이상 국가 실현이라는 두가지의 현실을 놓고 타협과 실행이라는 방법을 적절히 병행하셨던 세종대왕 요즘을 사는 우리가 본보기가 될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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