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25>

대자암 비밀

조랑말이 가쁘게 숨을 쉬면서 자꾸 뒤뚱거렸다. 말구종이 고삐를 잡아끌지만 조랑말은 끄덕끄덕 가다가 서곤 했다. 재를 다 올라서서는 힘겨워서 생똥을 길바닥에 떨어뜨렸다. 할 수 없이 정효강은 말에서 내려 걸었다. 한 순간도 지체할 수 없는 처지였다. 신미를 급히 만나 알려줘야 할 전언이 있었다. 해지기 전에 대자암까지 가려면 주막에 들러 술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었다.

재 너머 논밭은 이미 추수가 끝나가고 있었다. 비어가는 논밭에 내려앉은 까마귀들이 흙을 파헤치고 있었다. 몇 마리는 을씨년스럽게 울면서 볏가리들 너머로 느릿느릿 날아갔다. 야산의 숲속으로 스며들었다. 힘을 낸 조랑말이 겅중겅중 다가와 정효강 앞에 섰다. 조랑말은 머리가 턱없이 큰 탓인지 몸집은 왜소해 보였다. 말구종이 눈에 낀 눈곱을 떼어주자 큰 눈을 순하게 껌벅거렸다.

정효강은 다시 말을 탔다. 이윽고 고양현 동헌으로 나드는 평지 길로 들어섰다. 해는 서녘하늘에 지루한 듯 은전처럼 떠 있었다. 잠시 후면 들판 너머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하늘 한 자락부터 노을이 솟구쳤다가 번질 것이었다.

늙은 말구종이 말했다.

“나으리. 이 길이 지름길입죠.”

“어찌 대자암 가는 길을 잘 아느냐?”

“문산 역참에 있을 때 이 길을 자주 다녔습니다요. 그러다가 운좋게도 안평대군 나으리 눈에 띄어 대군 나으리 사저로 갔습지요.”

“잘 됐군. 안평대군 나으리 사저로 간 것이 말이다.”

“역참에 있던 말먹이꾼들이 다들 부러워했습니다요.”

“헌데 어찌 내 집으로 왔느냐?”

“대군 나으리가 보냈습죠.”

“그래서 낙심하고 있는 것이냐.”

“아닙죠. 힘 좋은 젊을 때는 모르지만 늙어서는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것이 말먹이꾼 운명입니다요.”

“왜 그러느냐?”

“일 잘하는 젊은 말먹이꾼은 어느 역참을 가든 인기가 좋습니다요. 허지만 늙어 갈비뼈가 드러난 쓸모없는 조랑말 같이 되면 이리 저리 주인이 보내는 대로 팔려 다닙죠.”

“안심하거라. 난 너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나으리. 쇤네는 목숨 바쳐 모시겠습니다요.”

안평이 정효강에게 지금의 말구종을 보낸 것은 쓸모없는 늙은이어서가 아니었다. 안평이 평소에 신임해 왔던 정효강에게 충직하고 믿음직한 말구종을 하사한 셈이었다. 입이 가벼운 말구종은 주인에게 언젠가 독이 될 수도 있었다. 주인이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가는지 사사로운 비밀을 다 알 수밖에 없는 말구종이기 때문이었다.

정효강이 대자암에 이르렀을 때는 서녘하늘에 이미 핏빛 노을이 질펀하게 번져 있었다. 노을 속으로 날아드는 새떼는 마치 검붉은 피딱지처럼 보였다. 산문 앞에는 문지기 군사들이 서성였다. 왕실의 누군가가 대자암에 와 있음이 분명했다. 산문 안으로 들어선 정효강은 원주스님을 찾아 용건을 말했다. 원주스님은 얼굴이 통통하고 피부가 백옥처럼 깨끗했다.

“신미대사님을 뵈러 왔소.”

“뉘시라 여쭐까요?”

“정효강이 왔다고 전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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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해남 미황사 제공

원주스님은 정효강을 안내했다.

신미가 주석하는 곳은 법당 뒤 조실채였다. 신미는 예전에 함허가 머물던 방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정효강은 신미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사헌부의 정 5품 지평이 승려에게 절을 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왕실의 원찰 대자암에서는 수양과 안평도 신미에게 왕사의 예를 갖추어 절을 했다. 이를 두고 조정의 유신들 사이에 소문이 나 비웃곤 했지만 수양과 안평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정 지평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대사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달려왔습니다.”

신미가 손짓으로 원주스님을 물리쳤다. 사미승처럼 어린 원주스님이 나가고 난 뒤에도 정효강은 밖의 동정을 살피듯 방문을 한 번 더 열었다가 닫았다.

“대사님, 큰일입니다.”

“말씀해 보시지요.”

“헌부의 감찰이 저에게 보고한 얘깁니다. 헌부의 대관들이 대사님을 감찰하려 하고 있습니다.”

“빈도(貧道)를 왜 감찰한다는 것입니까?”

“집현전 학사 되신 것을 시기하기 때문이옵니다.”

“전하께서 명하신 일이 아닙니까?”

“전하를 독대하는 대사님을 무조건 원치 않는 것입니다.”

“빈도 또한 이 나라 백성인데 전하를 친견하는 것이 사특한 일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신미는 헌부의 대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승려를 혹세무민하는 사특한 사람으로 단정 짓고 세종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것일 터였다.

“헌부에서는 이미 영동현감에게 대사님의 과거행적을 조사해 보고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출가한 빈도에게 과거는 없습니다. 오직 지금만 있을 뿐이지요.”

“허물을 뒤져 대사님을 탄핵하겠다는 저의입니다.”

“허허허. 헌부의 대관들이 그리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인지 몰랐습니다.”

신미는 어이가 없어 낮은 소리로 웃었다. 헛웃음이었다.

“허물이 없다면 어찌할 것 같습니까?”

“허물이 없어도 마침내는 허물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리하여 탄핵하고야 말 것입니다.”

“전하께서 탄핵을 허락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정효강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나 신미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일이기 때문에 숨길 수도 없었다. 정효강은 신미를 바로 보지 못하고 천정을 잠시 응시하다가 어금니를 물었다.

“대사님께 위해를 가할지도 모릅니다.”

“빈도에게 달려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니 서글픕니다.”

“대사님, 사실입니다. 옥체를 보존하셔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빈도는 이 몸이 공(空)한 것을 깨달았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래도 당분간은 입궐하시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하하.”

이번에는 헛웃음이 아니라 호탕하게 파안대소를 했다. 정효강이 움찔 할 정도로 큰 소리로 웃었다. 사헌부 대관들의 음모를 꾸미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웃음이었다.

“소문도 아니고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빈도는 전하가 명하시면 불구덩이 속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정효강은 대관들의 태도를 무시하고 입궐하겠다는 신미 앞에서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방문에 그림자가 어렸다. 원주스님이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대군님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지, 그렇지. 공부하실 시간이지.”

“무슨 공부를 하십니까?”

“우리 글자를 만드는 공부로 대자암 비밀입니다.”

“대사님, 혹시 전하께서는 우리 글자 만드는 일 때문에 대사님을 부르시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순간 정효강은 왜 세종이 신미에게 학사의 벼슬을 내리고 궁으로 불러들이는지를 이해했다. 그러나 정효강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신미의 목숨은 살았다 할 것이 없었다. 명나라를 섬기는 것이 국시(國是)인데 한자를 버리고 우리 글자를 만들어 쓴다는 것은 국시를 위배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일은 역모로 몰아갈 수도 있을 만큼 위험했다. 정효강은 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가 쭈뼛거렸다. 신미가 우리 글을 만드는데 간여하고 있음은 과거행적의 허물과 견줄 바가 아니었다.

“대사님, 저는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정 지평께서는 안평대군의 신뢰를 받고 있는 분입니다. 또한 대군께서 누구보다도 좋아하시는 분인데 빈도가 무슨 얘기인들 털어놓지 못하겠습니까? 더구나 불자이신 정 지평께서는 빈도를 위해서 만사를 젖혀놓고 달려온 분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감추겠습니까? 전하의 명입니다. 동궁, 그리고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정의공주님께서 천학 비재한 빈도를 돕고 있습니다.”

“대사님, 절대로 이 일은 발설되어서는 안 됩니다. 유신들이 격렬하게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대군께 인사 드려야지요.”

정효강은 신미를 따라 일어났다. 정효강으로서는 대자암에서 불심이 돈독한 수양과 안평을 만나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수양과 안평은 대자암이나 흥천사에서 신미와 더불어 우리 글자를 만드는데 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 흥천사에서는 세자인 동궁(문종)과 정의공주까지 회동하여 궁리하곤 했다. 법당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다급하게 소리를 냈다. 찬바람이 법당을 핥고 지나갔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