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22>

팔상도2

팔상도를 보면서 법문하는 신미의 태도는 열정적이었다. 수년 전에 세종의 마음을 염불로 사로잡았던 것처럼 세자 일행은 부처님 일생을 절절하게 얘기하는 신미의 법문에 귀를 기울였다. 신미의 목소리는 대나무 구멍을 울리는 대금처럼 낭랑했다. 북을 치지 않았는데도 대자암 대중들이 법당 토방 아래로 모여들었다. 대중들은 가랑비를 맞으며 신미가 법문하는 동안 내내 합장했다. 군사들도 끝내는 세자 일행과 대자암 대중들을 분리시키지 못했다. 젊은 신미가 야단법석을 주재하는 듯 분위기가 바뀌어버렸던 것이다.

신미는 세자 일행에게 정성을 다해 말했다. 마치 왕자들 중에서 누군가를 출가시키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법문했다. 세자 일행 중에서 신미의 법문에 가장 매료된 왕자는 수양이었다. 수양은,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 마야 부인이 죽는다는 얘기를 듣자 눈물을 보였다. 두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신미는 일부러 수양의 시선을 피했다. 수양은 대중들에게 자신의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세자 저하께서는 방금까지 싯다르타 태자가 룸비니동산에서 태어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출가 전까지의 얘기를 하겠습니다. 태자는 카필라성에서 유년기, 청년기를 보내는데 보통사람과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전륜성왕의 모습보다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왕위를 물려받기를 원하는 아버지 정반왕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미는 세자 일행에게 팔상도 가운데 태자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는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에 이어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벽화 앞에서는 태자가 12살 때 참여한 카필라성의 국가적인 행사인 농경제를 이야기했다. 농경제란 왕이 성 밖으로 나와 직접 농사일을 시현하며 백성들에게 농업을 장려하는 풍속이었다.

정반왕은 나무쟁기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밭을 일구었다. 그런데 정반왕이 쟁기질하는 순간 태자의 얼굴은 갑자기 어두워졌다. 쟁기질로 뒤집힌 흙 속에서 벌레 한 마리가 꼬물거리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새가 날렵하게 벌레를 물고 날아갔다. 태자는 그 광경을 보고 난 뒤부터 우울한 표정이 되었다.

‘왜 저 새는 벌레를 죽여야만 할까. 왜 저 새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벌레를 불행하게 만드는 걸까.’
‘왜 강자는 약자를 먹이로 삼을까.’

이윽고 태자는 카필라성 백성의 문제로 비약했다.

‘왜 왕족은 천민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대할까.’

정반왕이 쟁기질을 끝내자 왕족들은 박수를 쳤고 백성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태자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농경제의 마지막 순서가 진행되었다.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카필라성 백성이면 누구나 배불리 먹는 순서였다. 생각에 잠긴 태자는 음식을 먹지 않고 염부수 그늘로 갔다. 난생 처음으로 석양이 기울 때까지 삼매와 같은 정관(靜觀)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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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카필라성의 거대한 스투파에서 합장예경하는 스님들.


“세자 저하, 정반왕은 염부수 그늘에 앉아 있는 태자를 보고 걱정이 앞섰습니다. 태자가 태어났을 때 찾아온 아시타 선인(仙人)이 ‘태자님은 부처님이 되실 분’이라고 예언했던 말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정반왕은 ‘아들아, 너는 화려한 왕궁보다 성 밖의 염부수 그늘이 더 어울리는구나. 나는 그것이 슬프고 두렵구나.’ 하고 불길한 생각에 빠집니다.”

신미는 태자를 바라보는 정반왕의 고민과 불안을 얘기했다. 정반왕을 불안하게 하는 고민거리는 태자가 자신의 왕위를 물려받아 전륜성왕이 되지 않고 출가하여 부처님이 되는 것이었다. 이윽고 정반왕은 태자를 왕궁에 묶어둘 방법을 궁리하고 찾았다. 정반왕의 결론은 서둘러 태자비를 구해 강제로라도 결혼시키는 일이었다. 정반왕은 세 명의 태자비를 구했다. 두 번째가 아쇼다라였다. 아쇼다라는 데바다하성 선각왕의 딸로 자존심이 아주 강했다. 태자의 어머니 마야부인의 친정아버지도 데바다하성의 왕이었으므로 아쇼다라는 외사촌 동생뻘이었다. 정반왕은 태자가 세 명의 부인을 데리고 살 수 있도록 세 채의 궁을 지어주었다. 그런데도 태자는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태자궁에는 궁녀와 술과 음악이 있었지만 태자는 행복하지 못했다. 결국 태자는 왕궁 밖의 세상으로 눈을 돌렸다. 정반왕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네 번이나 동남서북의 성문을 나갔다. 성문을 나갈 때마다 인생의 덧없음을 절감했다.

“첫 번째로 태자는 동문으로 나갑니다. 태자는 동문 밖에서 뼈만 앙상한 노인을 만납니다. 태자는 성 안으로 돌아와서 ‘사람은 저렇게 늙어가는 존재인가. 늙어가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는 것일까.’ 하고 번민합니다.
두 번째로 태자는 남문으로 나갑니다. 태자는 남문 밖에서 병고에 시달리는 환자를 만납니다. 세 번째로 서문으로 나갑니다. 서문 밖에서는 죽은 시신을 두고 슬피 우는 가족을 만납니다. 이로써 태자는 생로병사를 다 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태자는 북문을 나갑니다. 북문 밖에서는 황색가사를 걸친 수행자를 만납니다. 태자는 조용하게 걸어오는 수행자에게 존경심이 절로 들어 ‘사문이시여, 출가에는 어떤 이로움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수행자가 ‘저는 일찍이 생로병사를 겪어보고 삶이 덧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가족의 곁을 떠나 고요한 곳에서 수행해 왔습니다. 수행은 맑고 성스러운 길입니다. 세간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영원히 해탈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출가의 이로움입니다. 순간 태자는 마음속으로 ‘이 길이야말로 내가 찾던 길이다.’ 하고 작심합니다.”

마침내 태자는 출가를 결행했다. 태자의 출가 모습은 팔상도 중에서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에 그려져 있었다. 백마를 탄 태자는 카필라성 동남쪽 성벽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벌레 한 마리에 연민을 느낀 태자였습니다. 그래서 태자가 마음 여리고 허약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태자는 코끼리를 들어 던질 정도로 아주 힘이 셌습니다. 화살을 쏘면 누구보다도 멀리 날아갔습니다. 말을 타고 성을 훌쩍 넘어갈 정도로 날렵했습니다. 태자는 성을 뛰어넘으면서 다짐합니다.”

나는 하늘에 태어나기를 원치 않는다.
많은 중생이 삶과 죽음의 고통 속에 있지 아니한가.
나는 이를 구제하기 위해 집을 나가는 것이니
위없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

“태자는 백마를 타고 밤새 동쪽으로 갑니다. 숲속 길에서 마부와 헤어집니다. 그때 태자는 ‘여기가 바로 내가 세속이라고 하는 새장에서 나올 수 있는 곳이고, 가족이라고 하는 속박에서 떠날 수 있는 곳이며, 말을 버릴 수 있는 곳이구나.’라고 말하며 마부에게 자신의 모자와 옷에 붙은 보석을 떼어주며 부왕과 아내 아쇼다라에게 전해주라고 합니다. 태자는 곧 그곳에서 고행하는 수행자들을 만납니다."

자기 육체를 학대하는 수행자 무리들은 고행과 기행을 일삼았다.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 있거나, 나뭇가지나 풀을 먹고 있거나, 흙이나 쇠똥을 먹고 있거나, 날카로운 가시 위에 앉아 고통을 참고 있거나 했다. 태자는 고행하는 수행자들을 이해할 수 없어 그들 곁을 떠났다. 이번에는 양을 죽여 제사 지내는 수행자들을 만났다. 태자는 다음 생에 복을 받기 위해 제사를 지낸다는 그들 곁도 떠났다. 이윽고 300명의 제자를 거느린 첫 스승을 만났다. 그는 16세에 출가하여 120세가 된 무념무상의 고요한 경지까지 오른 수행자였다. 태자는 제자가 되어 스승의 경지까지 올랐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무소유처까지는 도달했으나 태자가 얻고 싶은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는 경지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태자는 자신의 교단을 함께 이끌자는 첫 스승의 제의를 거절했다. 태자는 다시 스승을 찾아 길을 떠났다.

신미의 법문은 계속되었다. 팔상도 중에서 6년간 유영굴에서 극단적으로 고행하는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마왕의 항복을 받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다섯 비구들에게 설법하는 녹원전법상(鹿苑傳法相), 마침내 열반에 드는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까지 신미는 부처님의 거룩한 일생이 눈앞에 펼쳐 있듯 생생하게, 때로는 어둔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맑혀주는 폭포수처럼 법문했다.

그날 밤.
법당 불단의 밀랍 불마저 꺼지자 대자암은 검은 장막 같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랑비는 그쳤지만 축축한 남풍이 꿈결인 듯 살짝살짝 불어왔다. 대자암 처마에 달린 풍경이 댕그랑댕그랑 소리 냈다. 자정이 넘자 홀연히 나타난 사람 하나가 팔상도 벽화 앞에서 서성였다. 신미에게 가장 많은 질문을 던졌던 수양이었다. 수양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팔상도 벽화 앞에 서 있었다. 수양은 울고 있었다. 쌍림열반상에 그려진 부처님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부처님도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어린 수양을 슬프게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