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13>

한양 길

세종이 오두막을 다녀간 지 두 달만이었다. 사헌부에서 나온 중늙은이 감찰이 오두막으로 찾아와 희우에게 대사헌 하연(河演)의 명을 전했다. 희우는 작은 보따리를 하나 만들어놓고 기다리던 참이었으므로 의심하지 않고 감찰을 따라나섰다. 대사헌이 희우에게 내린 명은 다시청 다모로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다시청은 주로 대관들이 차를 마시며 일을 보는 곳이었으므로 사헌부의 지시를 받아 운영되는 곳이었고, 다모는 사헌부 안에서 주로 감찰 이상의 벼슬아치들에게 차심부름을 하는 구실아치였다.

양주나루터에서 새우젓장사 배를 탄 희우는 멀미가 심해 뚝섬나루터에 엎드려 토하는 둥 우여곡절 끝에 마포나루터에 내렸다. 마포나루터에는 수십 척의 고만고만한 장삿배들이 돛을 내린 채 정박해 있었다. 초가가 다닥다닥 붙은 새우젓동네 앞의 널따란 강변은 큰 장터가 되어 지게에 물건을 진 지게꾼들이 부산하게 오갔고, 국밥과 술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난장을 이루고 있었다. 수양버드나무숲 그늘 아래서는 장사꾼들이 선 채로 새참을 꺼내먹고 있기도 했다. 희우는 멀미로 시달렸던 탓인지 난생 처음 보는 낯선 풍경에 현기증을 느꼈다. 양주 산중에서 보지 못했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한양의 첫 풍경이었다.

물이 잔뜩 오른 수양버드나무는 연둣빛이 완연했다. 수양버드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강 건너편의 백사장은 눈을 부시게 했다. 한낮의 햇살이 출렁이는 강물과 백사장에 쏟아지고 있었다. 희우가 어리둥절해 하며 한눈을 팔자 감찰이 말했다.

“처자, 정신 차려야 할 것이야. 눈 뜨고 있어도 코 베어가는 마포나루터니까.”
“나으리, 이제 어디로 갑니까?”
“여기서 도성까지는 십여 리. 걸어서 두 식경이면 도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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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의 마포나루 모습.

감찰은 말수가 별로 없는 중늙은이였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기미가 잔뜩 끼어 얼핏 보면 새우젓장사 같았다. 그러나 입이 무겁고 어쩌다 한두 마디 할 때는 왠지 위엄이 느껴졌다.

“여기서 요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 저기 주막집으로 가자.”
“쇤네는 괜찮습니다.”
“아니다. 처자도 시장할 것이다.”

주막에 들자마자 술청어멈이 예사롭지 않은 감찰의 행색을 보고는 안방으로 안내했다. 벼슬아치만 안방으로 들이는 듯 방 안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상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술꾼들이 떠드는 소리로 시끌벅적한 마당과 달리 방 안은 깨끗하고 조용했다.

“내가 먼저 먹고 나갈 터이니 마음 놓고 배불리 먹거라.”
“나으리. 고맙습니다.”

상이 들어오자 감찰이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희우는 감히 겸상을 하지 못했다. 감찰도 희우를 불러 겸상을 권하지는 않았다. 직급이 낮지만 나름의 도리를 엄히 지켰다. 감찰의 식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밥 다섯 숟가락을 떠먹고는 술병의 술을 한 사발 가득 따라 마셨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일어나 나가버렸다. 희우를 배려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독한 소식이었다. 글자 그대로 음식의 양이 적은 점심(點心)이었다. 반면에 장사꾼들은 함지박 같은 데에 수북하게 담긴 낮밥을 먹고 있었다.

희우도 멀미를 하고 난 뒤끝이라 한두 숟가락 뜨고 말았다. 더구나 감찰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므로 상 앞에서 지체할 수 없었다. 주막의 마당은 여전히 게걸스럽게 낮밥을 먹는 장사꾼들로 소란스러웠다.

“요기는 했느냐?”
“나으리, 감사합니다.”
“나는 네 아버지를 알고 있느니라.”
“그래서 쇤네를 챙기신 것이옵니까?”
“하연 대감이 임금님의 명을 받고 누가 양주를 다녀오겠냐고 물었을 때 내가 자청하였느니라. 네 아버지와 인연이 없었다면 어찌 자청하였겠느냐?”

중늙은이 감찰은 결코 말수가 적은 사람은 아니었다.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을 뿐이었다. 희우는 방금 밥을 먹을 때도 주막집 안방으로 불러들인 이유를 그제야 눈치 챘다. 아버지와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배려한 것일 터였다.

“나으리, 어떤 인연이옵니까?”
“정종 임금님 때 함께 과거를 본 인연이 있느니라. 뿐만 아니라 현감이 되어 한날한시에 네 아버지는 횡성으로 나는 전라도 강진으로 나갔느니라.”
“그 뒤로 이어진 인연은 없는 것이옵니까?”
“아니다. 서간으로 주고받았느니라. 네 아버지는 불교에 조예가 깊은 분이었고 나 또한 고려조부터 대대로 불교를 믿어온 집안이니라.”
“나으리, 함자를 알고 싶사옵니다.”
“정현이라 하면 네 아버지가 기억할 것이다. 헌데 네 아버지는 어디 계시느냐?”
“가평현감으로 계시다가 불교를 신봉한다 하여 향교 교생들이 태종 임금님께 고발하여 갖은 고초를 겪었사옵니다. 지금은 면천이 되어 양인이 됐고 양주 관음사 스님으로 계시옵니다.”
“허허.”

중늙은이 정현이 앞서 걷다가 허공을 바라보며 허허롭게 웃었다. 그러더니 화제를 바꾸어 말했다.

“나도 차맛을 좀 알지. 전하께서 네가 우린 차맛을 보고 하연 대감에게 자랑했다더구나.”
“차를 드신 것은 아니었사옵니다. 다만 차향을 음미하셨을 뿐이옵니다.”
“나는 강진 동헌에서 살 때 가까운 백련사를 드나들면서 차를 마셨느니라.”
“나으리께서 아버님과 함께 과거를 보았다고 하시고 대대로 불교를 믿어온 집안이라 하시니 친지 같은 기분이 드옵니다.”

희우는 그제야 정현에게 경계심을 풀었다. 언행이 무겁고 말수가 적어 차갑고 어려운 사람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희우는 정현의 따뜻한 성품을 감지하고는 마음을 놓았다. 그러고 보니 얼굴에 잔뜩 낀 기미가 친근하게도 보였다. 다시청에 있는 동안 아버지뻘 되는 정현을 의지해도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내 선조가 고려 때 팔만대장경을 만든 정(鄭)자 안(晏)자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숨기고 사느니라. 그러니 너도 아버지가 스님이라는 사실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라.”

정현의 선조가 정안이고, 하동과 남해의 부호였던 그가 팔만대장경을 조성하는데 반을 후원하였다는 것은 고려사에 기록된 사실이었다. 당시 무신으로서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崔瑀)가 대장경조성비 반을, 최우의 처남이었던 정안이 반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들이 조선의 태종 이후부터는 자랑거리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벼슬길에 불이익을 당하는 이력이 되었으므로 정안의 후손들은 선대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손자뻘이 되는 정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정현은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자책하며 희우에게 주의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네 아버지가 생각나 공연한 말을 했구나.”
“나으리, 어찌 공연한 말씀이라 하십니까?”
“몰라서 득(得)이 되는 일이 있고, 알아서 실(失)이 되는 일이 있느니라.”
“쇤네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양주 촌뜨기이옵니다. 아는 것이 실이 되는 일이 무엇이옵니까?”
“네가 물으니 말하지 않을 수 없구나.”

정현은 훗날 돈의문의 전신이 되는 서전문(西箭門)을 통과하기 전에 팽나무 그늘을 찾아가 앉으면서 말했다. 십여 리를 쉬지 않고 걸어왔으므로 다리가 실하지 못한 정현은 쉬고 싶기도 하였던 것이다. 서전문은 도성의 서쪽에 있는데 문 안팎으로 지게꾼들이 부산하게 오가고 있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높은 벼슬아치 대부분이 다 불교를 멸시하는 유신들이니라. 그러니 그들이 네 아버지를 알아서는 곤란하지 않겠느냐. 반드시 피해를 볼 것이니라. 그래서 알아서 실이 된다고 하였느니라.”
“나으리께서도 피해를 본 적이 있사옵니까?”
“나이 든 나는 벼슬이 더 높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제는 벼슬이 더 내려갈 일도 없다. 하연 대감은 나의 선조를 잘 알 텐데 나를 내치지 않는 것만도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

정현이 짐작하기로는 하연의 강한 애향심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연의 고향이 진주이고, 정현은 하동인즉 진주나 하동은 어깨를 맞대고 있는 이웃동네인 것이었다. 특히 하연은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사헌부에 타지역 사람들이 임명되어 오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곤 했다.

정현은 서전문을 지나서는 원래의 과묵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도성 안에도 민가 주변에는 논밭이 붙어 있었다. 물을 끌어가는 방죽도 간간히 보였다. 서전문에서 구릉 같은 능과 절을 지나 기와집들이 늘어선 육조거리까지는 지척의 거리였다.

입을 다물었던 정현이 육조거리에 서서 세종이 정사를 펴는 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말없이 앞서 걸었다. 기와집들은 민가가 아니라 육조의 건물들이었다. 광화문으로부터 좌우로 삼군부와 의정부, 예조와 이조, 중추부와 한성부, 사헌부와 호조, 병조와 기로소(耆老所), 그리고 형조와 공조가 왼편에 나란히 대갓집처럼 들어서 있었다.

희우가 차심부름을 할 사헌부는 왼편 중간쯤에 있었다.

“저기, 솟을대문이 보이지? 뒤편에 수양버들 두 그루가 있는 기와집이 사헌부다.”

사헌부 뒤쪽으로 무논 한 자락이 조금 보였는데 물이 흘러가는 개울이 있는지 처녀의 머리채처럼 잔가지를 늘어뜨린 수양버드나무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희우는 육조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을 보고 숨이 막혔는데, 낯익은 수양버드나무가 눈에 드는 순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