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10>

은부채

신미는 늦잠을 잤다. 그 바람에 출가한 이후 처음으로 새벽예불에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신미를 깨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미는 아침공양 시간 뒤에 겨우 일어났다. 그것도 주지스님의 헛기침 소리를 듣고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지스님이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스님, 죄송합니다.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아닐세. 얼마나 고단했으면 새벽예불에 나오지 못했겠는가. 아무 걱정 말게.”

방 안에 들어온 주지스님은 곱은 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신미는 당황하여 승복의 첫 단추를 엉뚱한 구멍에 꿰고 말았다.

“임금님께 사리전 중수를 부탁했는가?”

“제가 아뢰기 전에 임금님께서 사리전을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아이고, 그랬던가! 신미스님이 백일기도한 감응일세.”

“아닙니다. 임금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잊지 않고 계셨을 뿐입니다.”

“신미스님이 큰일을 해냈어. 이제야 나는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겠네. 우리 중들 힘으로 어찌 비새는 사리전을 중수할 수 있겠는가. 돈이 한두 푼 드는 불사가 아니잖은가. 더구나 태조 임금님의 명으로 지은 전각이 아닌가. 나라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일세.”

주지스님은 과장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사리전에 비가 새지 않으려면 번와장(翻瓦匠)이 기왓장 몇 십장 교체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태종 때 새 기왓장으로 바꾸어 보았지만 층마다 지붕 한쪽이 조금씩 기울어진 채 위태로웠다. 빗물이 스며들어 이미 서까래가 썩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임금님께서는 각별하게 생각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 까닭이 무언가?”

“사리전은 조선 왕조의 상징입니다. 태조 임금님의 명으로 지은 전각이기 때문입니다. 태조 임금님께서는 5층 사리전을 불사하심으로써 조선왕조의 위의를 천하에 드러내고자 했을 것입니다.”

“옳거니. 사리전이 기울고 있다는 것은 태조 임금님의 위의가 빛을 잃고 있다는 것일세. 그러니 하루 빨리 중수해야 할 명분이 있는 것일세.”

“아마도 임금님께서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리전을 잊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신미스님의 안목은 대단해. 놀랍다니까!”

주지스님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신미를 칭찬했다. 그러나 신미는 주지스님의 칭찬이 부담스러웠다. 흥천사에 사는 대중에 비해 신미는 아직 풋중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주지스님은 신미를 고승처럼 대접하려 했다.

“신미스님, 공양시간은 이미 지나갔네만 밥상을 차리라 할까? 큰일을 보느라 늦잠을 잤으니 그걸 탓할 일은 아니네.”

“아닙니다. 절대로 그러지 마십시오. 늦게 일어난 것은 제 잘못입니다.”

신미는 방에서 일어나 주지스님에게 절을 했다.

“갑자기 왜 내게 절을 하는가?”

“스님, 새벽예불을 나가지 못한 것을 참회합니다.”

“어허! 참회라니, 무슨 망발인가. 날마다 건성으로 예불하면서 무위도식하는 중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함허스님께서 예불하지 않은 중은 가짜중(假僧)이라고 했습니다.”

“신미스님도 알다시피 함허스님이야 고지식한 스님이 아니신가. 조선 천지에 함허스님 눈에 들 중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신미는 함허를 믿고 따랐다. 특히 함허가 쓴 <금강경오가해 설의>는 달달 외울 정도였다. 서설(序說)의 첫 설의(해석)는 신미에게 화두나 다름없었다.

그 어떤 하나란 무엇인가? O 이 하나는 아주 적막하여 생각과 말이 끊겼고, 언뜻언뜻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 소리는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아득하고, 그 빛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번쩍인다. 어리석음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라서 범부다, 성인이다 할 수도 없으며 나도 없고 남도 없으므로 나다, 남이다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저 ‘어떤 것 하나’라고만 해두었다.

육조(六祖)는 이렇게 말하였다.

“어떤 것이 하나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이름도 없고 성도 없지만, 위로는 하늘을 떠받치고 아래는 땅을 지탱한다. 태양같이 밝은가 하면 칠흑같이 어둡다. 항상 움직이는 가운데 있지만 움직임에 속하지 않는 것이 이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그 어떤 것 하나’라는 그 말도 억지로 붙였을 뿐이니, 그래서 남악회양(南嶽懷讓) 화상이 ‘어떤 것 하나’라고 표현해도 맞지 않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어떤 것이 하나 있다’고 한 것은 지금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항상 고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눈이 쌓인 밖은 온통 하얀 은세계였다. 5층 사리전 지붕도, 널따란 마당도, 절을 에워싼 숲도 모두 하얀 빛깔이었다. 두 눈을 부시게 하는 은세계 속에도 신미에게는 ‘어떤 것 하나’가 자석처럼 끌어당기고 있었다. 신미는 은세계를 향해서 합장하며 중얼거렸다.

‘침묵하는 눈은 내가 다다르고자 하는 궁극일지 모른다. 침묵하는 눈은 하늘이 주는 최고의 선물일지 모른다. 침묵하는 눈은 하늘이 내게 주는 화두다. 어리석은 내가 하늘의 뜻을 모를 뿐이다.’

그때였다. 신미의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났다.

“무얼 하고 있느냐? 나를 좀 보자구나.”

함허의 목소리였다. 함허의 등 너머에서는 까치 두 마리가 날아와 먹이를 찾는지 눈을 헤집고 있었다.

“네, 스님.”

“저 방으로 들어오너라.”

신미는 뒷짐을 진 함허를 따라 갔다. 함허는 대중 큰방 옆의 요사로 들어갔다. 그 방은 주지스님이 손님들을 접견하는 방이었다. 남창이 난 방 한쪽에는 함허의 바랑이 놓여 있었다. 함허는 곧 오대산으로 떠날 것이 분명했다. 남창을 타고 넘어온 아침햇살이 함허의 얼굴에 비쳤다. 함허의 얼굴은 잠을 못잔 탓인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기 놓인 내 바랑을 가져 오너라.”

함허가 바랑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은칠을 한 부채였다.

“임금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동별궁을 나서는 순간 내시가 너에게 주라고 하더구나. 은선(銀扇)이라고 하는데 귀한 은부채이니 잘 보관해야 한다. 잘 쓰면 땀을 시원하게 식혀 줄 것이요, 잘 쓰지 못하면 진땀을 흘리게 할 것이니라.”

“명심하겠습니다.”

“어젯밤 임금님 앞에서 ‘전하, 우리 글자를 만드시옵소서’ 하는 너의 말에 나는 등골이 오싹했다. 허나 임금님께서 잠시 상념에 잠기시는 것을 보고 임금님과 너의 뜻이 통하는 것을 느꼈다. 이 은선은 임금님께서 너를 격려하여 내린 특별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너는 우리 글자를 만들어야 하는 숙명을 떠안은 셈이다.”

“저는 한문으로 된 <대장경>을 무지렁이 불자들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우리 글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불경스럽게 불쑥 말씀드린 것뿐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다. 임금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문으로 된 유가의 경전까지도 백성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우리 글자를 생각하고 계신 것 같았다. 그러니 어젯밤 그 순간 너와 뜻이 통했던 것이다. 은부채는 임금님께서 주신 너에 대한 정표이니 잘 간수하도록 해라.”

은부채를 건네받은 신미는 마음속에서 무언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은부채는 신미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신미는 세종이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주먹이 자신도 모르게 꽉 쥐어지기까지 했다.

“앞으로 네 화두는 임금님을 도와 우리 글자를 만드는 일이다.”

“스님, 부족하고 어리석은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 일도 세수하다가 코를 만지는 것처럼 쉬울 수 있다. 무지렁이 백성들을 위해 우리 글자를 창제하겠다는 일념을 자나 깨나 붙들고 산다면 몰록 글자들의 원리와 이치가 네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너의 하화중생의 길이다.”

함허는 점심공양 전에 오대산으로 떠났다. 신미는 함허가 산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뒤 사리전에 들어 가부좌를 틀었다. 함허가 당부한 대로 화두를 ‘그 어떤 것 하나’ 즉 ‘이 뭣고?’에서 세종과 이심전심으로 통했던 ‘우리 글자’로 바꾸었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