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8회>

첫눈

신미는 승려가 된 이후 처음으로 백일기도를 무탈하게 끝냈다. 늦여름에 땀을 쏟으며 시작한 백일기도는 찬바람이 엄습하는 초겨울 문턱에서 회향했다. 신미는 사십이수관세음보살이 영험하다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깊이 절감했다. 사십이수관세음보살이 준 가장 큰 가피라면 술과 여색을 좋아하던 아버지 김훈이 흥천사로 찾아와 삼보에 귀의한 것이었다. 신미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유가를 숭상했던 아버지가 스스로 흥천사를 찾아와 사십이수관세음보살 앞에서 절하며 난봉꾼처럼 잘못 살아온 자신의 과거를 참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생겼다. 지난 8월초에 오대산으로 떠났던 함허가 흥천사로 돌아왔다. 싸락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나목에 매달린 활엽수를 두들기는 첫눈이었다. 싸락눈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다가 멈추곤 했다. 흥천사 마당은 순식간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했다. 그때 신미는 침침한 골방에서 낙엽에 떨어지는 싸락눈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삼각산 고갯길 허공은 잿빛 구름이 잠시 사라진 채 깊은 우물처럼 파래지곤 했다. 그러다가도 눈구름이 나타나 슬그머니 하늘을 감추어버리자 수십 점의 흰 눈송이가 어두운 허공에서 나붓나붓 날리기도 했다. 주지스님이 고개를 움츠린 채 신미가 있는 골방으로 왔다.

“함허스님께서 오셨네. 어서 가 인사드리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좋은 일인 모양이네. 첫눈을 서설(瑞雪)이라고 하지 않은가. 신미스님이 직접 물어보시게.”

함허의 성정으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대산으로 떠날 때 함허는 1년은 그곳에서 살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던 것이다. 어쩌면 한양에서 급한 일을 본 뒤 다시 돌아갈지도 몰랐다. 문득 신미는 눈구름이 걷힌 하늘처럼 가슴이 환해짐을 느꼈다.

‘어쩌면 나를 데리고 가실지도 모른다. 내가 흥천사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 흥천사를 위한 사리전 백일기도도 무사히 회향했으니 주지스님이 나를 더 붙들 이유가 없지 않은가. 사리전이 임금님의 지시로 보수된다면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니겠는가. 그 응답이 비록 사리전 기왓장에 떨어진 싸락눈 한 알만큼일지라도 기도한 메아리가 아니겠는가.’

대중 방으로 들어간 신미는 함허를 보자마자 절을 했다.

“스님, 절 받으십시오.”

“한 번만 해라.”

그래도 신미는 공손하게 삼배를 했다. 함허의 얼굴은 지난여름보다 맑았다. 그러나 날선 눈빛 때문인지 광대뼈가 더욱 튀어나온 듯했고 얼굴은 야위어 보였다. 입을 다물 때마다 입가에 잔주름이 선명하게 접혔다.

“강건하신지요?”

“아무렴.”

“저는 백일기도를 회향했습니다.”

“주지스님에게 들었다. 중은 기도만 잘해도 잘 사는 것이다. 잘한 일이다.”

신미를 칭찬하는 함허의 몸에서 소나무 송진 냄새가 났다.

“스님 몸에서 소나무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나옹선사 진영을 벽에 걸고 산 영감암 주변이 소나무와 잣나무뿐이니 그럴 것이다. 일찍이 나옹선사께서 말씀했어. 생선을 엮은 새끼줄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기가 난다고. 무섭게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다.”

영감암은 월정사에서 상원사 가는 중간쯤에 있는 암자였다. 함허는 암자에 부처님 대신 나옹선사 진영을 모시고 살았다. 훗날 함허의 이름이 기화, 호가 득통으로 바뀐 것은 영감암으로 들어가 이틀째 되는 날 밤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이름과 호를 그렇게 점지해 준 까닭이었다. 함허는 미소를 지으며 다소 길게 말했다.

“꿈에서 이름과 호를 받고 홀연히 깨어나 보니 몸과 마음이 맑고 가벼워 하늘을 날 것 같았다. 다음날부터 졸리면 암자 밖으로 나와 산자락의 소나무 잣나무 숲을 오르내렸지. 너는 그런 나의 모습을 꿰뚫어본 것이다.”

“스님, 흥천사에 무슨 일로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여기서 겨울을 나실 것입니까?”

“아니다. 곧 떠날 것이다. 지난여름에 네게 한 말이 있지 않느냐. 오대산에서 1년 동안 살기로 한 생각에는 털끝만큼도 변함이 없다. 여기서 이틀 이상은 머물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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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창제의 주역 신미스님과 두보시의 권위자 만우스님이 주석했던 흥천사 전경


함허는 한양에 잠시 머물 것이라는 얘기만 했다. 스님들이 오가는 대중 방에서는 깊은 얘기를 할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무겁게 다물어버렸다. 한양을 급히 와야만 할 긴요한 일이 생긴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신미는 그 일이 무엇인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함허는 신미에게 현등사에서 저술한 <금강경오가해 설의>와 유생들의 배불을 논리적으로 반박한 <현정론(顯正論)> 필사본을 각각 1부씩 바랑에 넣어두도록 지시만 했을 뿐이었다. 저녁공양 시간까지도 신미는 함허가 왜 흥천사에 왔는지 눈치 채지 못했다.

사리전 앞에는 저녁공양 뒤부터 궁중에서 사용하는, 왕비나 후궁이 타는 가마 두 대가 놓여 있었다. 가마는 어영청의 군사가 에워싸고 있으므로 흥천사 대중이라도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나 흥천사의 누구도 궁중 귀인이 사리전에 참배 왔겠지 하고 관심을 더 이상 갖지 않았다. 예전에도 종종 궁중의 가마가 저녁 무렵에 들어오곤 했기 때문이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신미는 주지 방으로 불려갔다. 낮에 간간히 내리던 싸락눈은 갑자기 함박눈으로 변해 내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희끗희끗한 눈송이들이 신미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눈송이들은 신미의 눈썹을 하얗게 만들었다.

주지 방에는 세 사람이 신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늙은 어영대장이 아랫목에서 두 다리를 접개고 있었고, 주지스님과 함허가 반가부좌 자세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주지스님이 어영대장에게 신미를 소개했다.

“어영대장 나으리. 임금님께서 찾으셨다는 중입니다.”

“그대의 이름은 무언가?”

“신미라 하옵니다.”

“전하께서 보자고 한 중이 정녕 맞는가?”

주지스님이 대신 대답했다.

“어영대장 나으리. 틀림없습니다.”

신미는 느닷없이 임금을 들먹이는 어영대장의 흰 수염을 엿보았다. 어영대장은 말할 때마다 자신의 흰 수염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자신의 높은 신분을 과시하는 몸짓 같기도 했고,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은근히 드러내는 습관인 듯도 했다. 어영대장이 흥천사에 온 이유를 주지스님이 말했다.

“신미스님, 기뻐하시게. 임금님께서 고명한 함허스님은 물론이고 스님을 입궐시키라고 했다네. 우리 절집의 큰 경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소승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일세. 전하를 알현해야 알 수 있을 것이네.”

함허가 잠자코 앉아 있다가 반개한 눈을 뜨고 말했다.

“잠시 후 궁궐로 갈 것이니 승복을 정갈하게 갖추고 있거라.”

“오늘 밤에 입궐한다는 것입니까?”

어영대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이 일이 탄로가 나면 그대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니라.”

어영대장의 말은 과장이나 위협이 아니었다. 승려가 세종의 침전에 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간원이나 사헌부의 관리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날 일이었다. 세종이 그들을 만나는 일은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져 있었다. 그러니 세종의 명을 받은 어영대장으로서는 신미에게 거듭 주의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있는 중들의 입만 조심한다면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할 것이니라. 알겠는가?”

신미와 주지스님이 입을 맞춘 듯 말했다.

“나으리. 명심하겠습니다.”

주지 방을 나온 신미는 함박눈이 쌓인 섬돌에 선 채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임금님이 나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미는 문득 지난여름 원경왕후의 재를 마쳤을 때 세종이 한 말이 떠올랐다. 세종은 ‘때를 보아 너를 격려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신미는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하여 한 손으로 왼쪽 가슴을 문질렀다. 뒤따라 달려 나온 주지스님이 두 팔을 벌리며 신미를 가로막더니 말했다.

“신미스님, 임금님을 뵙거든 잊지 말게. 사리전에 비가 새니 흥천사 대중 모두가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다고 말일세.”

“저에게도 말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연히 아뢰겠습니다.”

“고맙네. 이제야 좀 안심이 되네. 이런 부탁을 함허스님은 받아주시지 않아. 들어주기는커녕 타박만 하시니 내 애간장이 탄다네.”

“스님, 유념하겠습니다.”

주지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눈발이 눈보라로 변한 듯 거칠게 휘몰아쳤다. 기온도 뚝 떨어졌다. 어영청 군사들은 가마 둘레에서 부동자세로 오들오들 떨었고, 가마꾼들은 사리전 처마 밑으로 올라서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창들끼리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나곤 했다. 군사들은 거친 눈보라 때문인지 횃불을 끈 채 대기하고 있었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