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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 대중이 과인을 기쁘게 했소"<br>정찬주 장편 ‘천강에 비친 달’ -6-

정찬주 | ibuljae@naver.com | 2013-12-13 (금) 10:59

천강에 비친 달 <6회>


흥천사 천도재


세종은 천도재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다. 재를 지내는 5층 사리전(舍利殿)에는 흥천사 승려들과 왕족들 및 신하 몇몇이 들었다. 세종은 흥천사에서 가장 큰 방인 대중방에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대중방에서도 재 지내는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세종은 군주의 법도에 따라 대중들과 함께 있지는 못했지만 대방에 홀로 앉아 애절한 염불소리를 낱낱이 다 듣고 있었다.

특히 세종은 젊은 승려의 염불소리에 빠져들었다. 댕그랑 댕그랑- 하는 요령소리로 시작한 젊은 승려의 <아미타불> 염불소리는 고즈넉하고 청아한 낙숫물소리처럼 또록또록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의 소리는 물길 따라 흘러가는 물이듯 살랑살랑 불러가는 바람이듯 머뭇거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세종이 잠시 와 머물고 있는 흥천사는 임시 행궁(行宮)이나 다름없었다. 내시들과 한 무리의 궁녀들이 따라와 시중을 들었고, 늙은 호위대장은 대방 문을 지켰다. 그리고 산문 안팎에는 어영군 병졸들이 궁을 지키듯 빈틈없는 경계를 폈고, 병졸의 우두머리인 어영대장은 산문과 대방을 수시로 오갔다. 서울의 오위(五衛)를 지키는 병졸들도 1백여 명이나 차출되어 호군(護軍)의 지시를 받으며 사하촌 언저리까지 올라와 대기하고 있었다. 간밤에 어영청에서 종 2품의 어영대장과 정 4품의 호군이 만나 흥천사 안팎 경비를 분담해서 맡기로 했던 것이다.

세종은 대중방 불단 앞 법석에 앉아 꼼짝을 안 했다. 낮은 법상(法床)에는 세종이 볼 수 있도록 <아미타경> 1부가 놓여 있었다. 어쩐 일인지 세종은 <아미타경>을 펼쳐보지 않고 젊은 승려의 염불소리를 듣기만 했다. 염불소리가 절절하게 고조되자 괴로운 듯 한동안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니 원경왕후가 친정집의 형제들을 모두 잃고 작은 소리로 흐느끼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져 자신도 모르게 두 눈에 힘을 주었던 것이다.

‘아, 어머니의 한이 이 천도재로 말미암자 영영 사라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인답지 않게 담대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어머니 원경왕후는 일을 무섭게 추진하는 아버지 태종과 언쟁할 때가 많았다. 두 사람 다 고집이 셌다. 태종은 거칠 것 없이 고집을 밖으로 드러냈고, 원경왕후는 고집을 마음속에 두고 버텼다. 그러나 원경왕후는 태종이 방심하고 놓친 것들을 뒤에서 잘 챙기기 때문에 크게 도움을 주곤 했다. 태종은 두뇌회전이 빠르고 재주가 뛰어나 큰일들을 한꺼번에 추진하면서 더러 실수를 저지르곤 했던 것이다. 훗날 세상 사람들이 ‘왕자의 난’이라 부르는 사건 때도 원경왕후가 없었더라면 결과가 어찌 됐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른바 ‘왕자의 난’ 10일 전에 정도전 일파가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고자 그들의 활과 창을 수거해 불태울 때 원경왕후는 방원의 무기를 몰래 숨겨두기도 했고, 왕자들이 태조를 병간하며 숙직하고 있는 동안 방원을 따로 불러내어 정도전 일파의 급습 가능성을 알려주고는 사병들에게 무기를 내어주어 방원으로 하여금 기선을 제압하도록 했던 것이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불화는 성격 탓이 컸다. 태종은 이미 세상 사람들을 다스리는 주군이 되었는데도 원경왕후는 태종을 자신의 울타리 속에 가둬놓으려 했다. 그럴수록 태종은 반발하여 원경왕후를 경원하면서 후궁들을 자주 간택하기에 이르렀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원경왕후는 고립돼가는 자신의 처지를 친정과 내통하며 동생들에게 하소연하곤 했다. 특히 태종이 자신의 여종을 후궁으로 맞아들였을 때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채 “어찌 계집이 없어서 종년을 취하여 후궁으로 삼는다는 말입니까?” 하고 쏘아붙이며 대들었다. 그리하여 엉뚱한 방향으로 비화된 사건이 ‘민무구(閔無咎)의 옥사(獄事)’였다.

태종이 느닷없이 세자 양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황희 등 대신들이 모두 만류한바 전위(傳位)를 그만 둔 일이 있었다. 그때 모든 대신들은 왕의 복위를 기뻐하였으나 원경왕후의 동생인 민무구, 민무질과 몇몇의 신하들만이 슬퍼하였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더 나아가 그들은 세자 양녕을 끼고 권력을 잡으려 하였으니 대역의 죄로 물어야 한다고 삼공신(三功臣)들이 논의했다. 당시 세자 양녕은 동궁보다는 외갓집인 원경왕후의 친정집에서 더 많이 살았는데 그때 민무구 형제가 아무 것도 모르는 세자를 회유했을 것이라는 탄핵이었다.

이는 불같은 성격의 원경왕후에 대한 불만과 외척의 발호를 막기 위한 태종의 계책이었는데, 삼공신이 태종의 마음을 읽고 앞장서 나서준 것에 불과했다. 양심적인 대사헌 박은은 차마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운 민무구 형제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수가 없어 삼공신이 논의할 때 칭병하며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해가 되자, 태종은 노하여 민무구 형제에게 죄 주기를 지연시킨 간관을 귀양 보내고 박은의 계급을 내렸는데, 이는 태종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결국 민무구 형제는 귀양 갔다가 자진(自盡)했고, 나머지 두 동생 무휼과 무희도 원경왕후를 문병 갔다가 중궁에서 양녕을 만나 “우리 형 무구와 무질이 어찌 모반하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세자께서 우리 집에서 자라셨으니 저희 형제는 세자의 은덕 입기를 바랍니다.” 했는데 이 말이 또 세자 양녕을 회유했다는 식으로 전파되어 그들도 역시 국문을 받고는 멀리 귀양을 간 뒤 사사당하고 말았다. 이때 원경왕후는 집안의 친형제를 모두 잃고서 이름만 중전이지 무간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고 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피를 토하며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이것이 ‘민무구 옥사’의 전말인데, 훗날 뒷사람들은 이 사건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무구 등은 원경왕후의 동기(同氣)이다. 방간(芳幹; 태종의 형)의 변에도 공이 많이 있었는데 집안 전체가 화를 당한 것은 무슨 죄로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만일, 역적을 범하였으면 이것으로 끝날 것이 아닐 터이다. 그것이 교만 방자하고 불법한 짓을 한 때문이라면 함께 연좌될 사람이 없을 듯한데, 그 아뢴 것이 자세하지 못하고 뒤에 내려오는 전설도 확실히 믿을 수가 없다. 중국의 당 태종이 장손을 용서치 않은 것은 밝게 결단하는 데서 나온 것이나 세자가 외숙을 대접하는 도리는 박한 데 가깝다.’

정릉 흥천사의 대방 모습. 서울에 남아 있는 대방으로는 유일한 것이어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사진=미디어붓다 DB


결국 원경왕후는 화병을 달고 살았고, 가끔 넋을 놓고 허깨비처럼 살다가 56세로 고해(苦海) 같은 생을 마치고 말았다. 원경왕후의 생을 지켜본 세종은 어머니의 깊은 한을 알기에 장례(葬禮)를 치르는 동안 누구보다도 슬퍼했다. 수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였으며, 때마침 날씨가 덥고 습했으나 평상을 버리고 짚자리에 엎드려 밤낮없이 통곡하였다. 신하들이 짚자리 대신 유지(油紙)를 깔았으나 세종이 알고 걷으라고 명했다. 또한 큰비가 와 빈소에 물이 스며들었으나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신하들이 굳이 옮기를 청하니 드디어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는 날이 밝자 다시 빈소로 돌아왔다. 이 모두는 어머니의 한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한 고례(古禮)를 따른 상례였다. 이때의 장례만은 원경왕후를 멀리 했던 태종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세종은 자신의 뜻대로 치렀다.

세종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눈을 떴다. 그러자 궁중에서만 사는 장번내시가 법상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전하, 아직 재는 끝나지 않았사옵니다.”

“과인의 가슴이 답답하여 견딜 수 없구나. 지금 당장 재를 보아야만 슬픈 마음이 가실 것 같구나.”

“그건 모든 사람들을 의아해하게 할 일이옵니다. 그러니 이곳 대방에 계셔야 하옵니다.”

“대비의 영가를 만나고자 하는데 누가 의아해한다는 말이냐?”

“전하의 법도가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대비의 영가가 측은해서 그런다. 임금은 어머니의 영가도 위로해 주지 못하는 사람이란 말이냐?”

“전하.”

대중방을 나서자마자 이번에는 어영대장이 막았다.

“전하, 장번내시의 말이 맞습니다.”

“어영대장은 과인의 걸음을 막지 말라.”

“전하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사옵니까만 내일이면 당장 간관의 계문이 빗발칠 것이옵니다.”

“알았다. 과인이 모두 책임을 질 것이니 그리 알라.”

사실, 세종이 흥천사 천도재에 직접 참석한 것만도 비난받을 일이었다. 태상왕(太上王) 태조가 태종의 간청으로 서울로 돌아와 흥천사에서 대장불사(大藏佛事)를 베풀고자 행차한 적은 있었지만 재에 직접 참석한 예는 전무했던 것이다. 세종이 즉위년에 신하들에게 흥천사에서 화엄법석(華嚴法席)을 펴라고 지시를 내렸을 적에도 오지 않았고, 수륙재 같은 재를 지낼 때는 신하들이 임금의 교서를 들고 와 읽는 것이 임금의 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원경왕후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자 율을 어기고 있었다. 그것도 임시 궁인 대중방을 나와 사리전의 어머니 영가 앞에 서겠다는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세종은 재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사리전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거리를 둔 채 서서 재를 지켜보았다. 내시가 키 큰 세종에게 그늘을 드리우기 위해 일산을 펴서 까치발을 했다. 어느 새 붉은색 가사 차림의 주지가 사리전에서 달려 나와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 날씨가 덥습니다. 어서 대중방으로 들어가시옵소서.”

“과인은 염불소리를 듣고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졌다. 염불하는 저 중은 누구이더냐?”

“신미라는 젊은 중이옵니다.”

“여기서 보니 앉아서 경을 보지 않고 반듯하게 서서 다 외우고 있구나.”

“희유한 일이옵니다. 경을 외는데 단 한 자도 틀리지 않았사옵니다.”

“대비를 위한 정성이 대단하구나. 과인은 때를 보아 크게 격려를 할 것이다.”

함허도 다가와 한 마디 했다.

“전하, 소승의 제자이옵니다. 현재는 현등사에 머물며 천축의 글자인 범자를 공부하고 있사옵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이구나. 과인은 대사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소. 말썽을 일으키는 중들이 많지만 대사나 흥천사 대중들은 과인을 기쁘게 하고 있소.”

세종의 격려를 받은 주지는 감읍하여 엎드려 절을 했다. 임금과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무너지고 허물어지는 가람을 중창하는데 결정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태조가 건립한 사리전 지붕이 기울고 비가 오면 샜던 것이다.

재가 끝나자 세종은 바로 흥천사를 떠나려고 채비했다. 임금이 전용으로 타는 연을 오르면서 잰걸음으로 뒤따라오는 주지를 보더니 선물하듯 말했다.

“사리전은 태조께서 창건하신 전각인데 이제 들으니 기울어져 위태하므로 과인이 원을 세워 수리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니라.”

세종이 흥천사 가람들 중에서 특히 사리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문득 상왕이 된 태종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장마가 오기 전의 어느 날 태종이 충녕(세종)에게 “태조께서 사리전을 보수 수리하여 만세(萬世)에 전하라” 하고 부탁하였다는 말을 들려주었던 것이다.

사리전 불단에 놓인 재물은 일부만 남겨두고 다 치워졌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좋은 기운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사리전을 수리해주겠다는 세종의 약속을 받은 주지는 흥분하여 합장한 채 두 손을 내려놓지 못했다. 안도하는 얼굴로 사리전 천정을 두리번두리번 올려다보았다. 신미를 보더니 고마워하며 큰소리로 흥천사 방을 하나 내주겠다고 말했다. 세종의 마음을 움직여 대방을 나오게 한 것은 신미의 염불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미는 송광사에서 올라온 스승 함허가 이제는 오대산 영감암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오대산으로 갈 계획이었다. 함허가 굳이 시봉을 받지 않겠다면 자신은 영감암에서 지척인 상원사 선방에서 두어 철 동안 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찬주 작가의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가 한양에 올라왔을 때 자주 주석했던 고찰, 정릉 흥천사가 협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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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안담 2013-12-14 14: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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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치세를 의해 외척의 발호를 미리 막았다는 태종의
많은 옥사는 정치적 입장을 떠나 매우 잔인한 짓이었습니다.
아내인 원경왕후와의 불화를 감안하더라도 처남 넷을 모두
죽인 처사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핏빛 역사입니다.
세종은 어머니의 일을 회상할 때마다 큰 슬픔에 잠겼을 것입니다.
북쪽에서 벌어진 비슷한 일도 봉건왕조적 시각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말만 시끄럽겠지요. 성군의 길을 가기 위한 것도 아니고...
참 어이없는 피바람입니다. 제발 더 이상의 살생이 멈추기를 빕니다.
한글로이돈규 2016-11-18 12:43:11
답변  
역사는 그 시대를 사는 분들의 지혜이고 결정입니다.
고려 호족사회에서 조선의 관료체제로 넘어온 이유도
북방 함길도 출신의 이성계 가계의 기반이 취약한 시대적 배경이 깔려 있읍니다.
지엽적인 문제보다는 그런 어려운 여건에서더 큰 전란의 피해없이 역성혁명을 이룩한 조선의 건국 배경을 이해하고 함허스님의 가르침처럼
대중을 교단의 타락을 스스로 경계하고 혼자가는 스님의 삶의 모습에서 대중교화의 큰 뜻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청현 2013-12-16 09:3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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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를 근본으로 삼는 시대에 절을 찾아 부모를 회상하는 세종의 모습을 낳은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역사는 많은 것을 묻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종의 고뇌와 함허스님, 신미스님과 세종의 만남이 더욱 인상적입니다.
오동 2013-12-16 10: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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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불심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게하는군요. 세종은 타락한 조선불교의 모습을 힐난하는 유생들의 주장에 의해 선교양종으로 불교를 재편하는 등 억불의 모습을 보인것도 사실이지만 한글창제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편 불심대왕이기도 합니다. 흥천사에서 신미대사와 세종의 만남. 한글창제와 불법홍포로 이어지는 대하드라마가 기대됩니다.
은행나무꽃 2013-12-16 15:3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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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500년의 역사에 기틀을 놓은 대서사시가 드라마틱하게 펼쳐지고 있군요.
 흔들림없는 왕권 강화를 위해 무자비하게 처족을 살해한 태종은 과연 아버지로서 어떤 강박에 시달렸을까요?
 유교 이데올로기를 내팽개치고 어머니 영가를 부처님께 맡기는 세종은 또한 필부들과 아픔을 함께 한 성군인지?
 신미대사 불경 소리가 들릴듯 말듯..
무진 2013-12-20 10: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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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는 소리 없이 울고, 아들은 소리 내어 우누나
그리운 천륜은 하늘을 감동시키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어라

영겁의 인연은 세한의 겨울도 마다하지 않누나
온 누리 저 너머로 찬란한 햇살이 퍼질 진데,,,,
외곬으로 나아가는 신미의 뒷모습이 그토록 아름다울 줄이야,,,
보산 2013-12-24 10:5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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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냉혹함과 사람 본래의 마음이 극명하게 대조되는 느낌입니다. 세상의 가장 숭고한 대상 어머니....한서린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축원하는 천도재에 임하는 세종의 마음, 그 마음의 영혼을 깨우는 신미의 염불...읽는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감사합니다.
동천 2013-12-26 14:3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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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할수도 멀리할수도 없는 권력
과유불급 !!!
이방원이 왕만안되었어도 처족을 죽이는 행위는 없었을것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
그저 어느 시골에서 어떠한 이름없이 살다가 조용히 사라져간 수많은 이름없는 촌부들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것이 저뿐만 이더이까?
배동진 2014-06-01 20: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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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된다면 흥천사에 가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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