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붉은 승려<29>

연극 <안중근>

중일전쟁이 치열해지자 중국내 조선의 민족주의 우파와 좌파는 각각 진용을 정비했다. 민족주의 우파는 여러 단체를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민족주의 좌파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1937년 11월 한구(漢口)에서 김원봉을 따르는 조선민족혁명당, 김성숙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해방동맹, 유자명이 이끄는 조선혁명자연맹 등은 서로의 조직을 유지하면서 연합했다. 이 연합체에서도 김성숙은 반월간지 <조선민족전선>을 창간하여 유자명과 함께 주필을 맡았다. 김성숙은 창간호에서 안창호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도도산선생(哀悼島山先生’이란 글을 발표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무한 외곽지역은 피아 2백여 만 명의 병력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전장 터로 변했다. 밤이 되면 포성이 하늘을 찢었다. 일본군은 십여 개 사단 수십만 병력으로 무한 외곽을 공격해 왔고, 중국 국민당은 110만 병력을 모아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그러나 날이 쌀쌀해진 10월 초순에 중국군의 무한 남부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장강 이북의 방어선도 여의치 못했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무한의 방어선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무장조직인 120명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급조했다. 총대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이제는 총을 들고 눈앞에 다가선 일본군과 맞서 투쟁해야 했던 것이다. 10월 10일에 한구 기독교청년회 사무실에서 창립식을 가졌다. 창립식은 전쟁 중이었지만 긴 시간 동안 주은래의 축사와 곽말약(郭沫若)의 축시 등의 순서로 진행했다. 주은래는 차분한 어조로 동방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주제로 연설했는데 조선의용대 대원들에게 깊은 투쟁의지를 심어주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 정치부 조직인 지도위원회의 지시를 받았다. 지도위원은 총 8명으로 중국인 4명과 조선인 4명이었다. 조선인은 김원봉, 김성숙, 김학무, 유자명 등이었다. 창립식을 가진 3일 뒤에는 축하공연을 성대하게 무한청년회관에서 가졌다.

조선의용대는 주로 무한 외곽지대로 나가 정치선전, 부상자구조, 전투지원 등의 활동을 했다. 그런데 중국군은 속전속결 전술을 펴는 일본군의 총공격 앞에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장개석은 밀리는 중국군의 전투력을 보존하고 지구전을 위해 무한 철수를 명령했다. 중국군은 무한을 완전히 철수했지만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이 무한 시가지를 점령하기 2시간 전까지도 선전활동을 했다.

가을바람이 부는 텅 빈 거리는 낙엽만 뒹굴었다. 주택과 상점, 그리고 공장의 문을 모두 닫아버린 무한은 유령의 도시 같았다. 조선의용대 제 2구대는 한손에는 붓을, 또 다른 손에는 페인트 통을 들고 전날 곽말약이 지어준 반일(反日)의 선동문구를 벽이나 거리에 쓰고 다녔다. 이미 제 1구대는 장사(長沙)로 가 이재민 구호와 도시복구 작업을 돕고 있는 중이었다. 조선의용대 지도위원인 김학무는 대원들을 네댓 명씩 조를 짜 통솔하면서 눈에 잘 띄는 곳마다 반일구호를 썼다.

‘일본형제들이여, 착취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말라.’

‘총구를 상관에게 돌려라.’

‘병사들은 전선에서 피를 흘리고 재벌들은 후방에서 향락을 누린다.’

시가지를 진입하는 일본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심리전술의 일환이었다. 김학무는 사다리를 들고 뛰어다니며 담벼락이나 공장굴뚝, 물탱크 같은 곳에 일본어로 선동문구를 썼다. 대포 소리는 물론 일본군이 지척에 온 듯 화약 냄새가 풍겨왔다. 또 다시 사다리를 놓고 전신주를 오르는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동지들 철수하시오!”

“한 자라도 더 쓰고 철수하겠소.”

소리치고 있는 사람은 국민정부 정치부 간부인 곽말약이었다. 그는 마지막 철수를 앞두고 무한 시가지를 시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걱정 마시오. 우리 조선 청년들은 왜놈들이 코앞에까지 왔을 때 철수하겠소.”

“두 시간 후면 일본군이 시가지로 진입할 것이오. 그러니 어서 내려오시오.”

곽말약이 탄 차가 사라졌다. 바람에 실려 온 화약 냄새가 역하게 콧속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김학무는 전신주에 선동문구를 마저 쓰고 나서야 그 자리를 떠나 조선의용대 본부로 돌아왔다. 조선의용대 제 2구대 대원들의 활동을 보고 감동한 곽말약은 주은래에게 사실대로 보고했다.

“지금 시가지에서 선동문구를 쓰고 있는 사람은 모두 조선인 전사들입니다.”

“정말이오? 아직까지도 활동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사실입니다.”

“우리 중국인 중에도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소?”

“일본 유학생만 해도 수십만 명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중국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오.”

“확실합니다. 무한이 위험해진 지금 이 시각에 선동문구를 쓰고 있는 사람은 조선의 벗들뿐입니다.”

주은래는 의자에 앉아서 보고를 받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곽 동지, 조선의용대 본부를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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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삔에서 이등박문을 처단한 안중근 의사. 사진=안중근기념사업회


조선의용대 본부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건물 한쪽에 있었다. 본부 사무실에는 조직표가 벽에 붙어 있었다. 대장 김원봉, 기밀주임 신영삼(申榮三), 총무조장 이집중(李集中), 정치조장 김성숙, 그리고 대원으로 이형래(李瀅來), 주세민(周世敏), 이춘암(李春岩), 석성재(石成才), 김인철(金仁哲), 한지성(韓志成), 윤세주, 진일평(陣一平), 김석락(金錫洛) 등 총 13명이었다.

주은래는 조선의용대 본부 대원 및 제 2구대 대원들과 악수하고 난 뒤 감사의 말을 했다.

“조선의용대 동지들 수고 많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중국이 가장 위험한 시기에 무장조직을 결성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동지들이 마지막까지 무한에 남아 용감하게 활약하고 있다는 보고를 곽 동지에게 받았소.”

곽말약은 주은래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적들은 무한을 점령하더라도 조선의용대 동지들이 쓴 선동문구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것입니다. 써놓은 선동문구를 지운다 해도 머릿속에 박힌 선동문구는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무한의 주민들은 다투어 중경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런데도 조선의용대 여러분은 무한에 남아서 적들에게 정신적인 지뢰를 매설해 놓은 것입니다.”

곽말약은 중국인으로서 솔직한 감정을 김성숙을 비롯한 의용대 대원들 앞에서 토로했다.

“조선의용대의 두려움을 모르는 용감한 행동은 저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또한 저를 가장 부끄럽게 하였다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동문구를 쓰고 다니는 중국인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으니까요.”

주은래가 조선의용대 대원들에게 명령했다.

“정치부 부부장으로써 동지들에게 명령하겠소. 무한에 더 이상 남아 있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오. 그러니 더 큰 투쟁을 위해서 즉각 철수하기 바라오. 광서성 계림으로 가 제 4전구 국민당 부대를 따라 함께 행동하시오.”

“지금 포구로 나가 철수하겠습니다.”

김원봉이 주은래의 지시를 받았고, 곧바로 김성숙도 본부 대원들과 함께 장강의 포구로 나가 계림으로 이동했다. 제 2구대 대원들은 하남성 낙양으로 가 제 1전구 국민당 부대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났다.

그런데 조선의용대 본부는 계림으로 간 지 두 달 만에 광서성 계림마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자 중경으로 옮겨갔다. 두군혜도 감(甘)과 건(健), 두 아이를 데리고 중경으로 이사를 했다. 이제 두 아이는 두군혜 등에 업히지 않고 스스로 걸어 다닐 수 있는 12살, 7살이었다. 김성숙은 모처럼 가장으로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 자신이 활동할 만한 단체가 여의치 않았으므로 일종의 휴가를 받은 것 같은 기간이었다. 임정옹호 세력인 우파와 좌파인 조선민족전선동맹의 연합전선이 결렬되면서 김원봉과 김성숙의 입지는 좁아져버렸고, 조선의용대 대원들 수십 명이 공산당의 홍군을 따라 중경을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김성숙에게 중경생활은 가족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낮에는 대부분 가족과 시간을 보냈고, 밤이 되면 호롱불을 켜놓고 독서하거나 번역과 집필을 했다. 어느 날은 중경 공산당 팔로군 판사처에서 여는 연회에 초대를 받았다. 조선 독립투사들을 위로하는 자리로써 주은래의 지시로 마련한 연회였다. 김성숙 부부도 초대받아 갔다. 홍군을 따라 가지 않고 남은 민족주의 좌파나 임시정부의 민족주의 우파들이 함께 모였다. 두군혜는 두 아들 손을 잡고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주은래는 아내인 등영초와 연회장 문 앞에 나란히 서서 손님들을 맞았다. 주은래는 김성숙을 보더니 반갑게 악수를 청했고, 등영초는 두군혜의 두 아들을 보더니 머리를 쓰다듬고 볼에 입맞춤을 했다. 아직도 아이를 갖지 못한 때문인지 등영초는 두군혜의 두 아들을 유난히 귀여워했다.

사회자가 다소 엄숙하게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주은래는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조선이 해방될 때까지 중국이 협력할 것이라는 요지의 축사도 좋았지만 박수소리가 크게 터진 것은 두 번째로 연단에 올라 얘기할 때였다.

“우리는 조선의 혁명동지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조선의용대 동지들이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위기일발의 무한에 남아 선전활동을 한 용기는 우리 중국인들에게 오래도록 귀감이 될 것입니다. 또한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등이 단신으로 일본군 적장을 쓰러뜨린 일은 몇 백만의 우리 중국군도 해내지 못한 위대한 거사였습니다. 저는 여러분 앞에서 약속을 하나 하겠습니다. 우리 중국인들이 항일의식을 굳세게 가질 수 있도록 당장 안중근 의사의 일생을 연극무대에 올리도록 당에 지시할 것입니다.”

안중근 일생을 연극무대에 올리겠다고 약속하는 부분에서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연회장의 분위기가 단번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김성숙은 콧잔등이 시큰거려 견딜 수 없었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마음을 진정한 뒤 돌아왔다. 바로 옆 테이블에 앉은 윤세주도 투박한 손으로 두 눈을 훔치고 있었다. 얼굴은 실제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으며 손톱에는 까만 때가 끼어 있었다.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투쟁해온 것이 조선 독립투사들의 삶이었다.

두군혜가 김성숙에게 말했다.

“중국 정통요리에요. 어서 드셔요.”

“주은래 지도자 동지의 말에 난 이미 배가 불러버렸소. 당신이 좋아하는 요리이니 많이 드시구려.”

“아니에요.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니 저도 배불리 먹은 것 같아요.”

사회자가 주은래 옆에서 그림자처럼 조용하게 앉아 있는 등영초를 불러 세웠다. 그러면서 연회장의 모든 요리는 등영초가 당의 여성동지들과 함께 밤을 새우며 만들었다며 박수를 유도했다. 등영초도 주은래 못지않게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그러니까 연회는 주은래 부부의 합작품인 셈이었다. 김원봉은 연회가 끝나갈 무렵에 연단 위로 올라가 즉흥적으로 고맙고 감사하다는 내용의 답사를 했다.

한 달 뒤였다. 주은래는 약속을 지켰다. 연극 <안중근>을 중경의 한 회관을 빌려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다. 회관 안은 이미 중국인들로 만원이었다. 입장하지 못한 중국인들은 회관 밖으로 길게 줄을 서 다음 공연을 기다릴 정도였다. 주은래가 기획한 연극 <안중근>은 첫 공연부터 성공작이 됐다. 그의 의도대로 중국인들에게 항일 투쟁의지를 고취시켜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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