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붉은 승려 <27>

이별

나청은 남경 시내 중심가에 있는 현무호 호숫가의 한 어부 집에 은둔하면서 밤낮으로 낚시질하며 소일했다. 공산당원으로서 중책을 맡지 못한 나청은 당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나청을 자주 찾아오는 사람은 중국인이 아니라 조선인 장지락이었다. 나청은 북경에서부터 의열단 단원이자 유학생이었던 장지락과 친분이 깊었던 것이다.

도마뱀 새끼들이 활발해진 봄이었다. 그날도 장지락과 정율성이 나청을 찾았다. 나청은 묵고 있는 어부 집 부근의 호숫가 버드나무 아래서 낚시삼매에 빠져 있었다. 도마뱀이 자신의 어깨를 타고 넘어가도 몰랐다. 버드나무 그늘은 촘촘한 어망 같이 땅바닥에 어른거렸다. 햇살이 간간히 비늘처럼 그늘 안으로 떨어졌다. 나청은 대나무 의자에 앉아서 호수 수면을 들락거리는 찌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동지, 강태공이 따로 없습니다. 하하하.”

“김산 동지, 어서 와요.”

나청은 장지락을 언제나 김산이라고 불렀다. 하긴 장지락은 남경의 모든 혁명동지들에게 김산으로 알려져 있었다. 장지락이라고 본명을 부르는 사람은 김성숙, 오성륜, 박건웅 등을 비롯한 의형제처럼 친한 몇 명뿐이었다. 정율성은 나청과 구면이었다. 일전에 장지락이 나청을 소개시켜 주었던 것이다.

“김산 동지, 잘 왔어요. 그렇잖아도 만나고 싶었소.”

“무슨 변화가 생겼습니까?”

“며칠 전에 중국청년들이 찾아와 5월문예사(五月文藝社)라는 단체의 고문을 맡아달라고 부탁해서 허락했소. 김산 동지도 참여하는 것이 어떻겠소?”

“저는 명령만 떨어지면 연안으로 갈 텐데 이름만 걸어놓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 그렇군요.”

장지락은 광주봉기 후 해륙풍에서 천신만고 끝에 만주로 가 또 다시 일경에 체포됐다가 무혐의를 선고받고 풀려나, 북경과 상해를 거쳐 남경으로 와 이른바 연안행(延安行)을 꿈꾸며 대기 중이었다. 그러나 공산당 지도부의 성분심사가 두 달째 지체되고 있었으므로 몹시 따분하게 나날을 보내고 있는 처지였다. 자신을 의심하는 공산당 지도부의 처사에 화가 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장지락은 나청을 찾아와 울분을 삭이곤 했다. 누군가가 당에 자신을 일경의 회유를 받은 첩자라고 모함한 것이 현재까지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내가 보증을 섰으니까요.”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걸 보니 저를 왜놈 밀정으로 보는 모양이죠?”

“당 지도부가 최종 서류심사를 하고 있다니까 조그만 기다려 봅시다.”

그래도 장지락은 연안으로 달려가 뜨거운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심신을 단련시키며 자신의 의지를 불태우고 싶어 했다. 지금이라도 당에서 승인이 나면 당장 연안으로 떠날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러니 나청이 참여하라는 5월문예사 활동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정율성 동지는 5월문예사에 참여할 생각이 없소?”

“나 동지께서 추천해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그럼, 평회원이 아닌 이사 자격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추천하겠소.”

정율성은 중국의 해외유학파나 젊은 예술인들과 교류하고 싶었으므로 나청의 권유를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장지락도 정율성의 타고난 음악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며 적극 찬성했다.

“정율성 동지, 중국의 예술인들과 어깨를 당당히 겨뤄볼 기회라오.”

호수에 물결이 일었다. 바람이 오수를 즐기는 듯한 수면을 깨우고 있었다. 소나기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나청이 낚싯대를 거둬들였다. 그런 뒤, 고기망태 속에서 술병과 술잔을 꺼냈다. 세 사람은 버드나무 아래서 빗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술잔을 주고받았다. 버드나무는 잠깐이었지만 낭만적인 우산이 돼 주었다.

1936년 5월 1일.

5월문예사를 창립하는 날이었다. 장개석의 국민당에 실망한 중국 청년들이 회관에 가득 모여들었다. 단상에는 5월문예사 고문 나청과 발기인 주취도(周聚濤), 그리고 작곡가 신성해가 앉아 있었고, 단하에는 중국의 젊은 청년 예술가들과 조선의 청년들이 창립대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청이 연설한 뒤 주취도가 자작시를 낭송하면서 분위기는 한껏 고조됐다.

5월의 석류꽃 붉게 타고

중화의 진한 피 낭자한데

백성의 한, 나라의 수치 누가 씻나

시대의 청년들이여, 앞장서 나아가세.

정율성은 즉석에서 <5월의 노래(五月之歌)>라는 제목으로 악상을 정리하여 노래를 불렀다. 우렁찬 테너의 노래가 끝나자마자 함성이 터졌다. 정율성은 단하로 내려오지 못하고 또 한 곡을 불러야 했다. 이번에는 중국 청년들에게 널리 애창되고 있는 신성해 작곡의 <의용군행진곡>이었다.

그래도 정율성은 단상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또 다시 노래요청을 받고는 잠시 망설인 뒤에 중국말로 얘기했다.

“이번에는 중국 노래가 아닌 조선 노래를 한 번 부르겠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모두 함께 부르는 <아리랑>이라는 노래입니다.”

앞서 부른 <5월의 노래>와 <의용군행진곡>이 장내 분위기를 뜨겁게 달군 노래였다면 <아리랑>은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목젖까지 차오르게 하는 한(恨)의 노래였다. 장내는 금세 숙연한 분위기로 돌변했다. 조선 청년들이 눈물을 흘리자 중국인들이 여기저기서 격려의 박수를 치며 위로했다. 조선 청년들과 중국 청년들 사이에 연대의식이 비장하게 싹텄다.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해야 한다는 분노가 장내의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서 솟구쳤다. 슬픔 같은 것이 느릿느릿 출렁이듯 시작한 <아리랑>의 곡조는 어느새 장내의 모든 이들에게 자발적인 투쟁의지를 고취시켰던 것이다.

5월문예사 창립대회는 중국 음악가들에게 정율성을 노래 잘하는 조선 청년으로 각인시켜 주었다. 실력을 인정받은 정율성은 노래강습 강사로 불려 다녔다. 정율성은 노래뿐만 아니라 반봉건사상이나 반제국주의를 주제로 다룬 문학작품을 대본으로 만들어 연극을 하기도 했고, 직접 연사로 나서서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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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역의 개찰구 모습.


7월로 들어서자, 장지락은 아예 나청의 집에 묵으면서 연안행을 기다렸다. 나청이 오갈 데 없는 장지락을 딱하게 여겨 자신이 세든 어부 집으로 불러들였는데, 장지락은 어부 집의 현관 한쪽에 낡은 대나무침상을 놓고 살았다. 밤이 되면 도마뱀들이 우글거리는 현관이었다. 장지락을 따르던 정율성은 나청의 집으로 가끔 갔다. 남경의 시내도 세 사람이 함께 다녔다. 현무호의 누각은 물론이거니와 양나라 무제가 행궁 삼아 일정 기간씩 머물렀던 계명사(鷄鳴寺), 손문의 묘 등등을 돌아다녔던 것이다. 장지락이 김성숙을 믿었던 것처럼 정율성도 장지락을 피를 나눈 형제처럼 의지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세 사람 모두가 지루하게 기다린 날의 끝이 보였다. 장지락이 나청의 집에서 한 달을 보내고 난 뒤였다. 공산당 지도부에서 연안으로 가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장지락은 상해로 달려가 김성숙 부부와 석별한 뒤 바로 남경으로 돌아왔다.

1936년 8월 1일.

장지락이 연안으로 떠나는 날이었다. 나청은 현무호를 벗어나자마자 식당에 들러 장지락과 정율성에게 간단한 식사를 대접했다. 남경의 전통음식인 오리선지 국수였다. 오리선지는 부드러웠고 국수는 단숨에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세 사람이 국수를 먹는 동안에 식당주인은 마차를 불렀다. 기차를 타려면 남경 시가지 서북쪽에 있는 포구역으로 가야 했다.

“장 선배님, 저도 연안으로 갈 겁니다. 그곳에서 동지들에게 제 음악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때로는 노래도 무기가 되니까요.”

“먼저 가 기다리겠네.”

“그곳 소식을 편지로 주셔야 합니다.”

“알았네.”

마차가 시장의 옷가게 앞을 지나치자 나청이 젊은 중국인 마부에게 소리쳤다.

“멈추시게.”

장지락이 입고 있는 양복은 누더기와 흡사했다. 저고리 소매 끝이 나달나달 닳아 있었고, 엉덩이를 기운 바지는 검정색이 탈색하여 알록달록했다. 나청이 장지락을 데리고 옷가게로 들어가더니 새 양복을 사서 선물했다. 장지락이 새 양복으로 갈아입자 좀 전의 인물과 달리 보였다. 중국인 여점원이 하던 일을 멈추고 넋이 나간 듯 장지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청이 웃으면서 한 마디 했다.

“중국에 온 조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미남들이오. 항일전사가 되려면 먼저 얼굴 심사라도 받는 것이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중국 처녀들이 조선 청년들만 보면 넋을 잃고 쳐다보니까 하는 소리라오. 하하하.”

장지락은 연안행을 자신에게 내려진 축복으로 생각했다. 나청이 농담하며 웃길 때 자신도 따라서 기쁘게 웃을 수 있었다. 정율성도 그동안 정들었던 장지락과 헤어짐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다. 자신도 곧 뒤따르리라고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연안으로 가는 장지락이 부럽기까지 했다.

“장 선배님, 잘 부탁합니다.”

“정율성 동지가 나를 뒤따른다니 대환영이네.”

마차가 먼지 자욱한 포구역 광장에 멈추었다. 포구역은 손문이 신해혁명 후 중국의 경제발전을 염원하며 장강 옆에 건설한 역이었다. 나청이 마부를 보내고 나서 역사로 들어서며 장지락에게 돈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여비요. 나도 궁한 형편이라서 200원밖에 넣지 못했지만 내 마음이라 생각하고 받아주오.”

정차해 있던 기차가 갑자기 기적소리를 내질렀다. 승객들에게 미적거리지 말라는 듯 연달아 기적소리를 냈다. 정율성은 기차가 떠나자마자 바로 등을 돌렸지만 나청은 기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발걸음을 뗄 줄 몰랐다.

“나 선배님, 장 동지는 축복의 땅으로 떠났습니다.”

“장 동지의 연안행은 우여곡절이 너무 많았소. 장 동지가 떠나긴 했지만 왠지 아직도 무언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주었는데도 왜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지 모르겠소.”

“행운이란 빛과 그림자처럼 불행과 친하기 때문이겠지요.”

장지락을 물심양면으로 다 도와주었는데도 왜 허전한지 모르겠다는 나청의 고백이었다. 나청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지 담배연기를 연신 내뿜었다. 그러나 낙관적인 성격의 정율성은 장지락의 운명을 예감하는 나청의 태도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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