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붉은 승려<25>

결혼

비바람이 거칠수록 나무들은 스스로 뿌리를 깊이 뻗어 살아남는 법이었다. 김성숙과 두군혜의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생사를 넘나드는 광주봉기 동안 그들의 사랑은 더욱더 깊어졌다. 향항으로 피신한 그들은 상해로 거처를 옮기면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리고 동거한 지 1년 만에 조촐한 결혼식을 준비했다. 광주를 떠날 때 두군혜가 가지고 온 돈은 진즉 바닥이 났고, 김성숙이 일어번역을 하여 연명하고 있는 처지였으므로 결혼식이라기보다는 혁명동지들 앞에서 결혼선언을 하는 것에 불과했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두군혜 몸속에서는 김성숙의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김성숙 집으로 일찍 온 장지락이 한 마디 했다.

“성숙 형, 살림까지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 되고 보니 어때요? 제가 일찍이 여자는 혁명운동하는 데 장애물이라고 했잖아요. 하하하.”

“장 동지, 결혼식 하는 날이니 그런 악담은 말게.”

“축하할 수밖에 없지만 성숙 형 입장이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지요.”

“뭐가 안타깝다는 것인가?”

“형은 1년 동안 우리 모임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그거야 내 혁명의지가 약화된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서 밀린 번역일 해치우느라고 그랬었네.”

김성숙은 호구지책으로 일어번역을 했다. 눅눅한 방에서 월세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어번역거리를 구해와 밤낮으로 일했다. <일본경제사론>, <통제경제론>, <산업합리화>, <중국학생운동>, <변증법전정(全程)> 등등 일본 책을 중국어로 번역하기도 했고, 자신의 정치사상을 주장하는 책도 발간했다.

두군혜가 오차를 들고 와 장지락을 향해서 눈을 흘겼다. 그러자 장지락이 웃으면서 김성숙을 두둔했다.

“하긴, 성숙 형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우리는 거지가 됐을 겁니다.”

“내가 뭘 도와주었다고 그러지? 분배정의를 실현한 거지. 하하하.”

두군혜가 한 마디 거들었다.

“장 동지, 그건 알아주어야 해요. 우리만 살자고 했다면 김 동지가 날마다 밤을 새우지 않았을 거예요.”

김성숙 집에 뒤늦게 도착한 오성륜과 박건웅이 맞장구를 쳤다.

“김 동지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는 인심이 각박한 상해를 떠났을지도 모르지요.”

“오 동지 말에 동감이오.”

두군혜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느라 바빴다. 조선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리를 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밀집해 사는 데 있는 가게까지 다녀왔다. 특별히 만두와 국수 대신 쌀밥을 했고, 기름에 튀기는 요리보다는 끓는 물에 데쳐 담백하게 맛을 내는 반찬을 만들었다. 주은래의 부인인 등영초도 일찍 와 두군혜를 거들어 주었다. 두군혜가 등영초와 가까워진 계기는 서로가 공산당에 가입한 여성당원이었고, 손문의 부인 송경령(宋慶齡) 여사가 만든 상해부녀계구국회(上海婦女界救國會)의 간부로서 자주 만났기 때문이었다.

“주 동지는 오늘 하루 종일 회의가 있어 참석하지 못한답니다. 그래서 저 혼자 왔어요.”

“등 동지가 온 것만도 영광이에요.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등영초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시골여인처럼 너무나 소박하여 미모를 내세울 만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친근한 말투로 진심을 실어 얘기할 때면 상대를 편안하게 했다. 그녀는 누구에게서나 신망을 얻었다. 잘생긴 주은래가 다른 여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등영초를 선택한 까닭은 바로 그런 그녀의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일찍이 학창시절부터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맨 나중에 참석한 사람은 손두환이었다. 그는 황포군관학교에서 교장 부관으로 복무하던 중에 반공쿠데타를 일으킨 장개석 교장과 결별하고 모스크바로 유학 갔다가 중도에 돌아왔는데, 어린 시절에 만났던 스승 김구의 천거로 다시 상해임시정부 요원이 되어 일하고 있었다.

더 이상 올 사람은 없었다. 두군혜는 김성숙의 앉은뱅이책상을 식탁삼아 상을 차렸다. 등영초는 조선요리를 맛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모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박건웅이 두군혜의 요리 솜씨를 보고 감탄했다.

“두군혜 동지는 전생에 조선에서 살았던 것 같소. 김치를 담글 줄 알다니 놀랍소.”

“전 김 동지가 하라는 대로 만들었을 뿐이에요.”

“조선 사람도 아무나 이렇게 맛깔스런 요리를 잘하지는 못할 겁니다.”

장지락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음식을 앞에 놓고 얘기를 길게 하는 것은 조선 사람의 예의가 아니오. 손두환 선배 동지도 계시고 하니 제가 짧게 한 마디 하겠소.”

모두가 박수로 동의하자 김성숙이 옆에 앉아 있는 두군혜를 쳐다보며 마저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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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의 옛 모습. 황포강을 오가는 배들의 모습이 정겹다.


“나 김성숙과 두군혜는 혁명동지로서 평생을 함께 살기로 했소. 우리는 목숨이 붙어 있는 날까지 서로 사랑하고 믿으면서 혁명의 과업을 완수하는데 신명을 다 바칠 것을 맹세했소. 이를 여러 동지들 앞에서 고하는 바요.”

또 다시 박수가 터졌다.

“축하하오.”

장지락도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두 동지를 믿습니다. 축하합니다.”

오성륜이 축가를 제의했다.

“지금 축가를 불러야 마땅하오.”

두군혜가 등영초에게 부탁하려 듯 눈치를 보냈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김성숙이 말했다.

“차응준 스님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대금으로 <아리랑>을 연주했을 것이오.”

그러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축가로 <아리랑>을 합창했다. <아리랑>을 한 번 더 부르면서는 모두가 어깨동무를 하고 불렀다. <아리랑>을 모르는 등영초만 빼고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김성숙은 금강산에서부터 함께 동고동락해 왔던 광주봉기 때 죽은 승려 윤종묵과 행방불명된 김규하와 차응준이 생각나 가슴이 아팠다.

건배사는 장개석의 부관이었다는 전력이 탄로나 모스크바에서 추방돼 상해로 돌아온 손두환이 했다.

“동지들이 대륙으로 건너와 풍찬노숙하면서 투쟁하는 목적은 단 하나, 오직 조국해방! 조국해방을 위하여!”

술이 돌자 모두가 큰소리로 떠들었다. 박건웅이 일어나 어깨춤을 추었다. 흥이 나면 끼를 발산하고 춤을 추는 것이 조선 사람의 특징이었다. 김성숙도 중국의 독주를 주는 대로 마셨다. 오랜 만에 크게 취했다. 두군혜와 동거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치르는 의식이었지만 혁명동지들에게 빚을 갚는 느낌이 들었다. 두군혜 역시 그랬다. 그녀는 엉성한 결혼식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다. 더구나 그녀는 배가 거북이등처럼 불러오고 있었다. 동거생활 중에 아기를 가졌던 것이다.

두 달 후.

산달이 가까워진 두군혜는 광주 친정으로 가고 싶어 했다. 광주로 오라는 어머니의 편지도 그녀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녀 아버지 역시 김성숙의 직장을 알아보고 있으니 빨리 오라고 재촉했다.

“엄마가 산후조리를 해주고 아기도 돌봐준대요. 아버지께서는 당신 직장을 찾아보고 있다고 해요.”

김성숙은 두군혜의 의사를 따르기로 했다. 무엇보다 산후조리를 잘할 자신이 없었고, 광주로 가서 출퇴근하는 직장이 생기면 생활고가 해결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두군혜는 광주 친정으로 가지 못하고 상해 월세 방에서 아들을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김성숙이 지었다.

“감(甘)이 어떻소?”

“무슨 뜻이죠?”

“우리에게 이미 달콤한 사랑을 준 아기지요. 또한 태어나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오.”

“좋아요. 하지만 때가 되어 당신이 나를 중국에 두고 조선으로 돌아간다면 감(甘)자에 김(金)을 붙인 감(鉗)이라고 바꾸겠어요. 당신 자식이니까.”

“그럼 성은?” “당연히 내 성인 두(杜)를 써야죠.”

“그런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오. 하지만 당신 마음대로 하구려.”

“당신과 내 성이 붙은 이름이니까 아이는 당신이 중국에 없더라도 잊지 못할 거예요.”

“당신은 참으로 마음이 넓구려. 마치 대지 같아요.”

“미래의 일은 아무도 몰라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강한 혁명가라도 운명을 뛰어넘지 못해요.”

“사랑도 그런가?”

“전지전능한 사랑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운명 앞에서는 사랑도 무기력할 뿐이죠.”

김성숙은 두군혜의 의지대로 광주로 갔다. 때마침 김성숙은 <민국일보>에 취업이 되어 기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성숙은 곧 기자생활에 흥미를 잃었다. 신문은 자기 주장을 논문 같은 글을 통해 지속적으로 펼칠 수 있는 잡지와 달랐던 것이다. 김성숙은 곧 직장을 바꾸었다. 모교인 중산대학으로 가 일본어 번역계에서 일하다가 일어연구소 일본어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나 예전의 중산대학은 아니었다. 조선인 학생들이 토요일 밤마다 토론하던 혁명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학교수나 중국인 학생들의 열정도 예전과 비교한다면 크게 식어 있었다. 노신 같은 인기 교수도 떠나고 없었다. 김성숙에게는 죽은 대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김성숙은 중산대학의 하루하루가 무의미했다. 처갓집에 얹혀사니까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고 안주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혁명의 열정이 뜨거운 사람들 속에서 사는 것이 더 체질에 맞았다. 결국 김성숙은 의열단 단원들이 그리워 상해로 돌아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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