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으로 구성된 200명의 혁명군 임시부대는 사하진 전투에서 와해되고 말았다. 150명이 전사하고 50명만 남았는데 분대 규모로 시가전에 돌입하거나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대부분의 전사들은 후퇴하는 혁명군을 따라서 공산당원의 활동이 자유로운 해륙풍이나 향항으로 떠났다.

사하진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김성숙은 곧장 해륙풍이나 향항으로 가지 않고 광주 시가지로 들어가려고 했다. 중산대학 조선인 기숙사에서 헤어진 두군혜의 안부가 무엇보다 궁금했다. 어젯밤 치열한 전투 중에도 사랑하는 두군혜를 다시 만나야 한다는 일념이 자신을 강한 혁명전사로 살아남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젯밤부터 진지에서 한 조가 되어 방어전투를 치렀던 승려 중에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경북 의성 출신의 승려 김규하와 은해사에서 온 차응준이었다. 사하진 후방진지에서 네 사람이 한 조가 되어 그 지점으로 다가오려는 장발규의 부대 병사들과 밤새 백병전을 벌이다시피 했는데 새벽에 보니 김규하와 차응준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해륙풍이나 향항으로 후퇴하는 혁명군 주력부대를 따라 갔거나 아니면 전사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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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광주에서 만나 서로 사랑하며 항일투쟁을 벌인 두군혜와 김성숙


금강산 신계사에서 온 승려 윤종묵은 어깨에 총을 맞아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여태까지 김성숙 옆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치료를 받으려면 의료장비와 구급약이 비치된 공안국으로 가야 했다. 때마침 동이 틀 무렵에 장지락이 중국인 미모의 간호사를 데리고 찾아와 윤종묵을 응급조치했다. 간호사의 남편은 노동자 적위대 중급지휘관이었는데 어젯밤 전투 초기에 전사했다고 장지락이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태도에는 슬픔 같은 것이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 의식이 희미해져 가고 있는 윤종묵을 응급조치하는 데만 골똘했다.

“성숙 형, 아직 날이 밝지 않아서 다행이오.”

“내가 공안국까지 앞장서서 가며 적의 동태를 살피겠네.”

중국인 간호사가 말했다.

“공안국으로 가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스님 동지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위급하니 서둘러야 합니다.”

그녀는 장지락에게 얘기를 들었는지 윤종묵이 승려임을 알고 있었다. 윤종묵은 간호사를 보고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들었는지 통증 때문에 미간을 찌푸렸다가도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날이 밝기 전에 공안국에 도착하려면 잰걸음으로 움직여야 했다. 체구가 큰 장지락이 걸음을 멈추고서 자신의 등에 업힌 윤종묵의 생사를 확인하곤 했다.

“스님, 스님.”

윤종묵은 장지락의 소리를 듣고는 짧은 신음소리로 응답했다. 고통을 참아 삼키는 비명이었다. 그때마다 간호사는 윤종묵의 맥을 짚어보곤 했다.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면 장지락은 안도하면서 앞서가는 김성숙의 위치를 확인했다. 다행히 장발규의 병사들을 단 한 명도 만나지 않았는데 운이 좋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장발규 부대원들은 목에 붉은 댕기를 두른 봉기군과 조선인처럼 생겼으면 무조건 명령 없이 사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날이 밝자 거리 곳곳에 널린 수천 구의 시신들이 처참하게 보였다. 시신들 주변에는 붉은 피가 선명하게 얼룩져 있었다. 두려움을 치솟게 하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장지락은 공안국이 보이는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등에 업힌 윤종묵의 몸이 갑자기 늘어지고 있었다. 간호사도 윤종묵의 맥을 짚어보더니 도리질을 했다. 스무 걸음 정도 앞장서서 적의 동태를 살피던 김성숙이 되돌아왔다.

“스님은 어떤가?”

“어렵겠어요.”

장지락이 먼동이 튼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김성숙은 장지락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김성숙이 간호사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무슨 방법이 없겠소?”

“맥박이 희미합니다. 기적이 일어나길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김성숙이 무릎을 꿇고 윤종묵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윤종묵이 눈을 떴다. 김성숙은 자신도 놀랄 만큼 큰소리로 말했다.

“장 동지! 스님이 눈을 떴네.”

윤종묵이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간호사가 윤종묵의 손을 끌어당기며 안도했다. 간호사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잠시 후에는 윤종묵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대금소리...”

“대금소리를 듣고 싶다는 것이오?”

장지락이 소리치자 윤종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응준 스님이...”

윤종묵은 차응준이 부는 대금소리를 듣고 싶다는 듯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다시 눈을 뜨고 말했다.

“아리랑.”

김성숙과 장지락은 ‘아리랑’이라는 말에 눈물이 났다. 김성숙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말했다.

“차응준 스님의 대금소리를 듣고 싶다면 꼭 살아야 해요.”

“아니오, 난 틀렸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김성숙이 나무라듯 소리치자 윤종묵이 감았던 눈을 또 다시 힘겹게 뜨며 말했다.

“내 나이 스물여덟이오. 아무 공도 세우지 못했소.”

간호사가 통통한 두 손으로 윤종묵의 얼굴을 바르게 세워주자 고맙다는 듯 맥없이 웃었다. 그러더니 김성숙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죽는 것은 원통하지 않소.”

“하고 싶은 것이 있소?”

“여자와 키스 한 번 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아쉽소.”

윤종묵의 동공은 금세 거짓말처럼 풀어졌다. 이제는 말할 기운도 아주 사라진 것 같았다. 김성숙은 죽어가는 윤종묵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 간호사에게 부탁했다.

“동지, 스님에게 키스 한 번 해줄 수 없소?”

간호사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고갯짓으로 허락했다. 김성숙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윤종묵의 얼굴은 간호사의 입이 닿기도 전에 옆으로 처져버렸다. 숨을 거두었다. 김성숙과 장지락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앉은 채 <아리랑>을 불렀다. 처음에는 목울대를 넘지 못하던 웅얼거리던 소리였으나 차츰 소울음 같은 큰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제야 미모의 간호사가 말했다.

“동지들, 스님은 저한테 맡기고 어서 피신하셔야 합니다. 저는 이 부근에 친지가 있습니다. 스님은 제가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어느새 해가 백운산 위에 멀겋게 떠 있었다. 장발규의 병사들이 그들을 발견할지도 몰랐다. 이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 헤어져야만 했다. 김성숙과 장지락은 총을 간호사에게 건넸다. 장지락이 말했다.

“성숙 형, 저는 해륙풍으로 가겠습니다.”

“나는 중산대학으로 가서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후배들을 만나봐야겠네.”

김성숙은 당장 광주를 벗어나 피신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중산대학 조선인 기숙사에 남아 있을 후배들을 도와야 했고, 무엇보다 두군혜와 상의한 뒤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려고 했다. 김성숙의 판단은 정확했다. 중산대학 조선인 기숙사에는 조선학생 다섯 명이 어디로 피신해야 좋을지를 판단하지 못하고 낙심한 채 있었다.

“동지들, 밖으로 나가면 안 되오. 양복 차림의 조선인은 다 죽이고 있소. 내가 중국인 옷을 준비해 오겠으니 기다리시오.”

기숙사의 조선학생들은 돈도, 먹을 것도 없는 빈털터리 상태였다. 기숙사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김성숙은 조선인 기숙사에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두군혜 집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장발규의 부대원들이 모든 거리를 경계하고 있지는 않았다. 김성숙은 중국인 복장 차림이었기 때문에 장발규의 부대원을 태운 차량과 서너 번 마주쳤지만 무사히 두군혜 집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두군혜는 김성숙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집밖으로 뛰어나왔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끌어안고 있기만 했다. 김성숙의 얼굴은 먼지투성이이었다. 진지에서 뒹굴었던 옷에서는 악취가 났고, 어제저녁부터 네 끼를 굶었기 때문에 두 눈은 광대뼈 안으로 쑥 들어가 있었다.

김성숙이 두군혜에게 중산대학 조선인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을 얘기했다.

“피신시켜야 하는데 무슨 방법이 없겠소?”

“엄마에게 상의해 볼게요.”

김성숙이 몸을 씻으러 간 사이에 두군혜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기숙사에 있는 조선 청년들을 구해야 해요. 도와주세요, 엄마.”

“아버지와 오빠 옷을 찾아봐야겠구나. 중국옷을 입어야 안전하지 않겠니? 평소에 양복을 좋아하는 조선 사람들은 중국옷을 입어야 의심받지 않고 무사히 광주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두군혜 어머니는 중국남자 옷이 부족했으므로 밤새워 중국옷을 한 벌 짓기까지 했다. 그녀의 도움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숙사의 조선 학생들이 피신할 경비를 마련했다. 그런데 막상 중국옷과 돈을 보낼 방법이 마땅찮았다. 그렇다고 두군혜는 김성숙을 중산대학 조선인 기숙사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중국옷과 돈은 누구 편에 보내죠?”

“내가 갔다 오마.”

“그건 위험해요. 엄마. 차라리 제가 다녀오겠어요.”

“넌 무거운 짐을 들 수 없을 거야. 조선 친구는 어떠니?”

“우리 집 오기 전에 네 끼를 굶었대요. 지쳐 있어요. 지금은 좀 쉬어야 해요.”

“옳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아종(阿鍾) 학생이 다녀오면 되겠구나.”

아종은 두군혜 집에서 하숙을 하는 학생이었다. 솔직하고 믿을 만한 청년이었다. 그가 공안국을 찾아가 고발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힘이 센 아종 학생에게 부탁하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믿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아종은 짐을 등에 메고 거리를 나섰다가 곧 돌아오고 말았다. 거리에 쌓인 시신들을 보고는 기겁을 해서 돌아와 버렸던 것이다. 할 수 없이 김성숙은 중국인 행상 차림으로 짐을 메고 나섰다. 그러자 두군혜도 김성숙을 뒤따랐다. 두 사람은 서관의 주민구를 벗어나 서과원 쪽으로 갔다. 거리에 듬성듬성 방치된 시신 무더기는 어제보다 더 많았다. 봉기에 실패한 혁명군에 가담한 노동자와 농민들을 마구잡이로 살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점심때가 되어서야 김성숙과 두군혜는 중산대학 조선인 기숙사에 도착했다. 다섯 명의 조선학생들은 그때까지도 행선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김성숙은 그들에게 중국옷을 한 벌씩 나누어 주었다.

“자, 중국옷으로 바꿔 입으시오. 이 돈은 각자 분배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책임을 지고 나누어 지니는 것이 좋겠소. 이 옷과 돈은 두군혜 동지 어머니가 마련한 것이오.”

김성숙과 두군혜는 그들과 기숙사에서 헤어지고 나서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집에서 이틀을 더 지낸 뒤, 중국인 부부로 가장하여 향항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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