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붉은 승려 <15>

폭탄이 되고 비수가 되라

1924년 가을.

김성숙은 신채호(申采浩)가 쓴 ‘조선혁명선언’을 읽었다. 사실은 작년 1월에 신채호가 조선의열단 의백(義伯) 김원봉(金元鳳)에게 써준 글이었지만 1년 몇 개월이 지난 뒤에야 보고 있는 셈이었다. 누군가가 <혁명> 사무실로 은밀하게 우송했던 것이다. 1919년 11월에 만주 길림성 파호문외(巴虎門外)에서 결성한 조선의열단은 단원의 신분을 철저하게 감추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본부가 현재는 북경이란 것만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김성숙은 사무실 문을 걸어 잠갔다. 일제 밀정이 들이닥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김성숙은 발신인이 표시되지 않은 봉투 속의 ‘조선혁명선언’을 다시 천천히 읽어내려 갔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애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에 필요한 조건을 다 박탈하였다.

경제의 생명인 산림, 천택, 철도, 광산, 어장들에서부터 소공업 원료까지 다 빼앗아 일체의 생산 기능을 칼로 베며 도끼로 끊고, 토지세, 가옥세, 인구세, 가축세, 백일세, 지방세, 주초세, 비료세, 종자세, 영업세, 청결세, 소득세, 기타 각종 잡세가 날로 증가하여 혈액은 있는 대로 다 빨아 가고, 어지간한 사업가들은 일본의 제조품을 조선인에게 파는 중간인이 되어 차차 자본집중의 원칙 하에서 멸망할 뿐이요, 대다수 인민, 곧 일반 농민들은 피땀을 흘려 토지를 갈아, 일 년 내 소득으로 자기 자신과 처자의 호구거리도 남기지 못하고,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일본 강도에게 갖다 바쳐 그 살을 찌워 주는 영원한 우마(牛馬)가 될 뿐이요, 끝내는 우마의 생활도 못하게 일본 이민의 수입이 해마다 높은 비율로 증가하여 ‘딸각발이’ 등쌀에 우리 민족은 발 디딜 땅이 없어 산으로, 물로, 서간도로, 북간도로, 시베리아의 황야로 몰려가 배고픈 귀신이 아니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귀신이 될 뿐이며,

강도 일본이 헌병정치, 경찰정치를 힘써 행하여 민족이 한 발자국의 행동도 마음대로 못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일체 자유가 없어 고통과 울분과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의 가슴이나 만질 뿐이요,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는 눈 뜬 소경이 되고, 자녀가 나면 “일본어를 국어라, 일본글을 국문이라” 하는 노예 양성소─학교로 보내고, 조선 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 된다 하면 단군을 속여 “소잔오존(素盞嗚尊; 일본의 개국신)의 형제”라 하며, “삼한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의 땅”이라고 일본 놈들이 적은 대로 읽게 되며,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하면 강도정치를 찬미하는 반일본화 한 노예적 문자뿐이며,

똑똑한 자제가 난다 하면 환경의 압박에서 세상을 비관하고 절망하는 타락자가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음모사건’이라는 이름으로 감옥에 갇혀 주리 틀기, 목에 칼을 씌우고 발에 쇠사슬 채우기, 단근질, 채찍질, 전기질, 바늘로 손톱 밑과 발톱 밑을 쑤시는, 手足을 달아매는, 콧구멍에 물 붓는, 생식기에 심지를 박는 모든 악형, 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사전에도 없는 갖은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 옥문에서 나온대야 평생 불구자가 될 뿐이라.

그렇지 않을지라도 발명 창작의 본능은 생활의 곤란 때문에 단절되며, 진취 활발의 기상은 환경의 압박 때문에 소멸되어 ‘찍도 짹도’ 못하게 각 방면의 속박, 채찍질, 구박, 압제를 받아 바다로 둘러싸인 삼천리가 한 개의 큰 감옥이 되어, 우리 민족은 아주 인류로서의 자각을 잃을 뿐 아니라, 곧 자동적인 본능까지 잃어 노예로부터 기계가 되어 강도 손아귀 안의 사용품이 되고 말 뿐이며,

강도 일본이 우리의 생명을 초개같이 보아, 을사 이후 13도에 의병이 일어나던 각 지방에서 일본 군대가 행한 폭행은 이루 다 적을 수 없거니와, 최근에는 3ㆍ1운동 이후 수원·선천 등의 국내 각지부터 북간도, 서간도, 노령, 연해주 각 처까지 도처에서 주민을 죽인다, 촌락을 불 지른다, 재산을 약탈한다, 부녀자를 욕보인다, 목을 끊는다, 산 채로 묻는다, 불에 사른다, 혹 몸을 두 동가리 세 동가리로 내어 죽인다, 어린아이를 악형한다, 부녀자의 생식기를 파괴한다 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참혹한 수단을 써서 공포와 전율로 우리 민족을 압박하여 인간의 ‘산송장’을 만들려 하는도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하여 우리는 일본 강도정치, 곧 이민족 정치가 우리 조선 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우리는 혁명 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없애는 일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김성숙은 ‘의열단선언’이라고도 불리는 글을 읽어내려 가는 동안 새삼 의분이 치솟았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는지 안경알이 흐려졌다. 일본은 조선의 국호와 정권과 생존을 강탈해간 강도이므로 일본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혁명이야말로 정당한 수단이었다. 김성숙은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안경알을 닦았다.

선언문은 다섯 개 항목으로 총 6400여 자로 되어 있었다. 김성숙의 어깻죽지를 세차게 내리치는 죽비 같은 항목들이었다. 김성숙은 첫째 항목만 보았는데도 머리에 불벼락을 맞은 듯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동안 <혁명>을 편집하면서 항일투쟁을 관념으로 해왔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유학한 자신을 합리화하는 허세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때마침 장지락이 사무실에 들어왔으므로 그에게 신채호의 거주지가 어딘지 알아보라고 시켰다.

다음날.

장지락은 <혁명>의 기자답게 신채호의 이력을 자세히 메모하여 김성숙에게 건넸다. 1880년 충남 대덕에서 태어난 신채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충북 청원에서 자랐다. 8세 때부터 서당 훈장이던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898년에는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그해 10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이상재, 김규식 등과 활동하다가 12월에 체포되었다. 석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계몽운동을 시작했는데 1904년 황무지 개간권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성균관으로 올라와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1905년에는 장지연의 권유로 <황성신문>에 입사했으나 신문이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되자 <대한매일신보>로 옮겼다. 이후 신채호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중국으로 건너와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가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을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추대하자 바로 사임하고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노선을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북경으로 와 무장혁명을 준비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장지락은 신채호가 김창숙의 도움을 받아 1921년에 발행한 한문 잡지 <천고(天鼓)>창간호까지 빌려와 김성숙에게 내밀었다. 김성숙은 감개무량하여 상기된 얼굴로 <천고>에 실린 창간사를 읽었다.

〈천고여, 천고여,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더러움과 비린내를 씻어다오. 혼이 되고 귀신이 되어 적의 운명이 다하도록 저주해다오.

천고여, 칼이 되고 총이 되어 왜적의 기운을 쓸어버려다오. 폭탄이 되고 비수가 되어 적을 동요시키고 뒤흔들어다오. 국내에선 민족의 기운이 고양돼 암살과 폭동의 장거가 끊이지 않고 있다. 밖으로는 세계추세가 달라져 약소국가들의 자결운동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천고여, 천고여, 너의 북을 두드려라. 나는 춤을 추리라. 우리 동포들의 사기를 끌어 올려보자꾸나. 우리 산하를 돌려다오.

천고여, 분투하라. 노력하라. 너의 직분을 잊지 말지어다.〉

김성숙은 당장이라도 신채호에게 달려가 의지하고 싶은 존경심이 솟구쳤다. 신채호의 활화산 같은 열망이 자신에게 전이되는 듯했다.

“선생이 거처하고 계신 곳은 알아봤는가?”

“생활고 때문에 임신한 부인과 어린 아들을 재작년에 국내로 보내고 선생은 지금 관음사 보타암에 계신다고 합니다.”

“출가하셨다는 말이군.”

“승려가 됐다는 말도 있고 당장 계실 만한 거처가 마땅찮으니 암자에 기숙하고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관음사는 어디에 있는가?”

“북신교(北新橋) 부근이라고 하니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성숙은 곧장 장지락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행인들에게 묻고 물어서 북신교까지는 걸어갔다. 그러나 손금처럼 이리 저리 뻗은 미로 같은 골목길 입구에서는 숨이 턱 막혔다. 사람들이 알려주는 대로 좁은 길을 오르다 보면 막다른 골목만 나왔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산자락 마을 입구 도로로 다시 내려와 인력거꾼를 불렀다. 인력거를 타기 위해서가 아니라 길잡이로 흥정했다. 인력거꾼은 김성숙과 장지락의 신분을 묻더니 사례를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도 조선에서 왔다 아입니꺼.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걸 보니 조선 유학생이 확실한 것 같십니더. 안내해 주겠십니더.”

김성숙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인력거꾼 뒤를 따랐다. 인력거꾼은 피부가 중국의 막노동꾼과 달리 깨끗했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미남이었다. 김성숙은 신채호 선생의 나이와 신분을 헤아려보았다. 자신보다 18살이 많은 어른이었다. 물론 지금의 신채호 선생은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한 의열단의 정신적인 지주나 다름없지만 일찍이 성균관에서 공부했다고 하니 학자도 되고, 신문사에서 일했다고 하니 언론인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인력거꾼을 따라 가다 보니 관음사는 의외로 지척에 있었다. 크고 작은 옛 가옥들에 둘러싸여 절인지 민가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뿐이었다. 장지락이 알아본 소문은 정확했다. 승복을 입은 신채호는 관음사 뒤쪽 산자락에 자리한 보타암에 기거하고 있었다. 방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굴속 같은 곳에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책상 대용으로 사용하는 듯 판자 위에는 불경과 고서들이 수십 권 쌓여 있었다.

신채호가 어둑한 방에서 김성숙과 장지락을 맞았다. 그의 눈매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는 그믐달처럼 선명했다.

“여기는 찾기가 힘든 곳이오. 갈 때도 좀 전의 그 사람이 안내해 줄 것이오.”

“선생님, 저희를 안내한 그 인력거꾼 말입니까?”

“인력거꾼이 아니라 나를 따르는 동지라오. 하하하.”

크게보기

신채호와 김원봉

신채호의 깡마른 얼굴은 무엇에도 굴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결기 가득한 얼굴에 비해 큰 귀와 사람 인(人)자 모양의 수염은 대인의 넉넉한 풍모를 느끼게 했다.

“선생님, ‘조선혁명선언’을 보는 순간 피가 끓는 듯했습니다.”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은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오. 이완용이는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으려 했소. 그래서 나는 임시정부와 결별했소. 강도짓을 한 일제에 대해서는 폭력과 폭동 모든 수단을 동원한 투쟁이라도 정당한 것이오. 나는 ‘조선혁명선언’에서 그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오.”

신채호는 이승만을 욕하면서 더불어 안창호도 비판했다. 안창호가 의열단원들에게 개인적으로 모험행동을 하는 것과 폭탄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고 임시정부 군사당국에 훈련을 받은 뒤 때가 되면 크게 거사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신채호는 의열단 행동을 모험행동이라고 하는 것에 반발했다. 다만, 김구만이 신채호의 비난을 면했다. 김구는 의열단의 무장투쟁을 높이 평가하는 임시정부 요인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장지락은 어린 시절부터 존경했던 이동휘 선생을 꺼냈다.

“이동휘 선생님도 아나키스트들의 테러를 혁명투쟁의 힘을 약화시키는 모험주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난 임시정부에서 일했던 어떤 동지보다도 이동휘 동지를 존경하고 사랑하오. 나는 나의 노선이 옳다 그르다 말하지 않겠소. 허나 ‘조선혁명선언’을 보고 나서 의열단원이 되겠다고 지원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소. 오늘은 이 사실만 얘기하겠소.”

신채호의 주장은 사실이었다. 일제 고관과 매국노를 암살하고 침략의 앞잡이 기관을 파괴함을 최고 이념으로 삼아 김원봉, 윤세주(尹世冑) 등 13명으로 시작했던 조선의열단은 처음에는 원래의 목표대로 큰 성과를 내다가, 1922년 국내로 잠입한 몇 명이 일경에 검거됨으로 해서 힘이 약화되는 듯했지만,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된 이후 1924년에는 무장투쟁을 갈망하는 단원이 70여 명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신채호가 갑자기 손뼉을 세 번 치자 좀 전에 길안내를 했던 젊은이가 들어왔다.

“서로들 인사를 나누시오.”

그제야 인력거꾼으로 위장하고 있던 젊은이가 먼저 말했다.

“밀양에서 온 김원봉입니더.”

“금강산에서 온 김성숙입니다.”

“김성숙 형 일을 돕고 있는 장지락입니다.”

해질 무렵에 또 한 명이 신채호 방으로 들어왔다. 신채호와 자주 어울리는 동지 중 한 사람으로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수학한 충북 음성 출신의 유자명(柳子明)이었다. 유자명의 첫인상은 차분하고 조용한 학자풍이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용암처럼 뜨거운 사람이었다. 의열단의 모든 암살과 파괴는 그가 기획했다. 말투는 답답할 만큼 느렸지만 배포는 담대했다.

그날, 신채호와 유자명은 김성숙에게 의열단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김성숙과 장지락이 의열단에 가입하기로 결심한 때는 또 다시 김원봉을 만나고 난 뒤였다. <혁명> 사무실에 온 김원봉은 자신이 하고 있는 무장투쟁에 자부심이 컸다. 그런 까닭인지 얘기를 정열적으로 했다. 테러리즘이나 무정부주의에 대한 어떤 이론이 정립되어 있지는 않지만 정열 하나만으로 사람을 감화시키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김성숙은 며칠 뒤 또 다시 만난 김원봉을 통해 단원이 될 것을 서약했는데, 동갑지기이자 의백인 김원봉이 김성숙에게 맡긴 임무는 의열단이 쟁취한 성과를 비밀스럽게 퍼뜨리는 선전부장이었다. <계속>


*본 원고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게재권은 미디어붓다에 있으므로, 본 원고를 허락없이 임의로 퍼나르거나 옮겨서 게재하는 것은 저작권 위반으로, 불법행위이므로 각별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크게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