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붉은 승려 <13>

분노

햇빛이 잘 들지 않는 <혁명>의 사무실은 어둡고 비좁았다. 서너 사람이 앉으면 꽉 찼다. 의자도 서너 개뿐이었다. 동지들이 찾아오면 한두 사람은 서 있어야 했다. 편집 일은 주로 강의가 없는 날에 했다. 그래도 청탁원고 마감 날이 다가오면 수업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날밤을 샜다. 간단한 취재와 교열은 장지락이 거들었다. 장지락은 이미 16세 때 만주에서 상해로 내려가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임시직원으로 취직하여 춘원 이광수 밑에서 교열과 교정을 봤던 경험이 있었다. 북경에는 한글을 인쇄하는 시설이 없었으므로 김성숙은 스스로 판을 떠서 석판인쇄를 하였다.

며칠 전에는 김성숙이 석판의 글씨가 흐릿하게 보인다고 장지락에게 호소했다. 장지락은 그제야 김성숙의 눈을 유심히 살피고는 놀랐다. 눈곱이 낀 두 눈가로 진물이 흘렀다. 실명의 위기가 올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장지락은 김성숙을 설득하여 자신이 다니고 있는 협화의학원으로 데리고 가 치료받게 했다. 주사를 맞고 안약을 복용하자 곧 눈동자가 맑아졌다. 초기에 치료한 덕분에 병세가 금세 호전되었다.

장지락이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온 김성숙에게 그의 아팠던 눈을 살피면서 말했다. 검은 안경테 속의 그의 눈은 정상으로 되돌아 와 있었다. 장지락은 김성숙을 형이라고 불렀다.

“하마터면 형 논문을 더 이상 보지 못할 뻔했소.”

“뭐, 잡지에 내 원고만 실리는가?”

“형 논문은 북경 조선인 학생 중에서 단연 최고지요. 전 형의 글을 보지 않았다면 무식한 혁명가가 될 수밖에 없었어요.”

장지락의 말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그는 직선적인 성격이었으므로 거짓말을 할 줄 몰랐다. 그는 사회주의 이론에 있어서 백지나 다름없었다. 김성숙의 글들은 사회주의자가 된 그의 백지 같은 머릿속을 가득 채워주었는데, 그는 무슨 이론이든 왕성하게 흡수하는 사춘기 청년이었던 것이다.

“고마워. 지락이 동생이 없었더라면 나는 실명했을지도 모르지.”

김성숙이 마시다 남은 고량주를 서랍에서 꺼냈다. 불을 붙이면 바로 불꽃을 보이는 배갈이었다. 안주는 편집 일을 하면서 심심풀이로 먹곤 하는 볶은 콩이었다.

“성숙 형, 이제는 제가 왜 의과대학에 입학했는지 알겠지요?”

“내 눈병 고쳐줄려고?”

“그렇소. 저는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다치면 아름다운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가 되기로 한 겁니다.”

“지락 동지를 처음 만났을 때도 비슷한 얘기를 했어.”

김성숙이 종지기 같은 작은 유리잔에 술을 붓자 장지락은 알약을 삼키듯 단숨에 털어 넣었다. 배갈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동안 장지락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왜놈들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목사나 작가가 되고자 했을 겁니다. 목사가 되려고 했다면 아마도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가 가장 기뻐하셨겠지요.”

김성숙은 자작으로 마셨다.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정치경제학과 신입생들과 홍등가와 술집을 다니기 시작한 김성숙은 자작으로 술을 마실 만큼 술맛에 익숙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인에 대한 장지락의 증오심은 뼛속 깊이 사무쳐 있었다. 김성숙보다 그 강도와 밀도가 더 했다. 장지락은 일본인을 반드시 ‘왜놈’이라고 불렀다.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은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가 일인 순사에게 폭행당했던 데서 연유하고 있었다. 그가 7살 때였다. 일인 순사 두 명이 집을 찾아와서 그의 어머니를 보자마자 인정사정없이 구타했다. 그의 어머니는 입술이 터졌고 피가 흘러 흰 무명저고리가 붉어졌다. 흰 저고리를 적신 붉은 피는 오래도록 그의 내상(內傷)이 되었다. 상처가 도질 때마다 그는 분노가 치밀었다.

7살의 장지락은 소리 지르며 일인 순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말썽을 일으키지 말라’며 어린 장지락의 손을 잡아당겼다. 어린 그가 어머니에게 들은 구타당한 이유란 교회 가는 날이었기 때문에 면사무소로 예방주사를 맞으러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린 그였지만 어른처럼 분노가 치밀었다. 어머니를 때린 일인 순사는 물론 일본군들을 바다에 쓸어 넣어버리고 싶었다.

장지락이 두 번째로 큰 증오심을 느낀 것은 기독교 계통의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한 뒤였다. 고향의 같은 마을 출신 선생이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는데, 그 선생은 장지락에게 “우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기독교야말로 우리 조선을 통일시킬 수 있고 우리 교육의 추진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인간해방을 위한 운동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선생의 가르침과 달리 기독교는 일인들의 횡포 앞에서 힘을 보여주지 못했다. 조선인들은 하느님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기도한 보답이 있다면 오직 참혹함과 슬픔을 느끼는 것뿐이었다. 중학생 장지락은 기독교를 믿기만 하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면 선생의 당부와 달리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장지락은 3.1운동이 좌초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순수한 비폭력운동의 슬픈 패배였다. 정말로 신이 있는지 깊은 회의가 들었다. 기독교 여신도들이 거리에 모여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을 때 일본 경찰들이 해산시키기 위해 발포를 했다. 그래도 여신도들이 흩어지지 않자 달려와 대검으로 찔렀다. 몇 명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중학생 장지락은 일본인들에게 증오심이 치밀었고 한편으로는 기도만 하면서 맞서는 기독교인들의 순교가 어리석게 보였다. 기도만 하는 것은 어이없게도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어느 날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있는 기독교인을 본 뒤로는 더욱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기독교 지도자가 성문 밖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고, 신도들은 그 앞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경찰들이 “기독교 신자니까 이렇게 하면 천당에 갈 수 있겠지” 하고 그를 십자가에 세워놓고 못을 박은 것이었다.

장지락은 배갈을 서너 잔 들이킨 뒤 김성숙이 묻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기독교를 버린 얘기를 했다. 무신론자라기보기보다는 자기 신앙의 자포자기였다.

“3.1운동 이전까지는 저도 주일마다 교회를 나갔지요. 비록 기도가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말이오. 그래도 교회가 조선에서 훌륭한 역할을 하리라는 소망까지 버리진 않았어요. 하지만 3.1운동 이후에는 믿음이 깨어져버렸지요.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내 투쟁에 별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저는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주먹이 근절거릴 뿐이었지요.”

그러나 김성숙은 장지락을 무신론자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일인들이 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살상하는데도 하늘이 벌을 내리지 않는 것에 대한 장지락 나름의 항변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자신이 승복을 벗었지만 불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장지락이 교회를 나가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신론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장지락과 같이 조선의 일부 젊은이들은 일인들의 야만적인 살상과 폭력을 경험하고 나서는 만주로 가 독립군이 되거나 무정부주의자나 테러리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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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숙과 함께 잡지 <혁명>을 발간했던 장지락(김산)

김성숙은 화제를 돌렸다. 자신도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던 기억이 떠올라 치가 떨렸던 것이다. 자신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상으로 폐인이 되거나, 뼈가 탈골하고 골절하여 병신이 되거나, 서대문형무소 시구문을 통해서 산자락에 던져진 시신도 수없이 많았던 것이다.

“장 동지, 목사가 되려면 인민이 해방되기 전까지는 불가능하겠군. 그렇다 하더라도 작가가의 꿈은 버리지 않겠지?”

“중학생 때부터 톨스토이를 좋아했어요.”

장지락은 호주머니에서 헌 책을 한 권 꺼냈다. 일어판 4권으로 나온 톨스토이의 <인생독본> 중 1권이었다. 표지가 곧 떨어져나갈 것처럼 나달나달 닳아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인생독본>을 보지 않았더라도 김성숙은 장지락이 톨스토이 신봉자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언젠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옛날 선생님을 좋아하듯이 저는 아직도 톨스토이를 좋아해요. 저는 지금도 톨스토이 책을 날마다 읽고 있지요. 톨스토이는 제게 이상주의와 무정부주의를 심어 주었어요. 일찍이 고통 받는 이웃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던 겁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잔혹한 일들을 지긋지긋하게 보아왔기 때문에 톨스토이의 인도주의가 얼마나 위대한지 그 가치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겁니다.”

김성숙은 장지락이 작가의 꿈을 아주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톨스토이가 보여주지 못한 혁명가의 초상을 소설로 써보고 싶어 했고, 실제로 26세 때 단편소설 <기이한 무기(奇怪的武器)>를 잡지 <신동방>에 발표했다. 의열단 단원인 테러리스트 오성륜과 이봉창의 의거를 사실적으로 서술한 내용이었다. 장지락은 톨스토이가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혁명가로 돌아섰을 것이라고 믿었다. 장지락은 톨스토이가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생전에 경험했다면 10월 혁명 전후를 10권 이상의 대하소설로 썼을 것이라고 상상할 때가 많았다. 인간의 온갖 선함과 추악함, 모순과 투쟁, 정의와 불의, 영웅의 유약함, 민중의 위대함, 이상과 환멸을 소설화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날 김성숙과 장지락은 술에 취해 사무실 마루에서 새우잠을 잤다. 사무실은 으슬으슬 추웠다. 작은 담요 한 장으로 함께 누웠는데 자다보니 김성숙이 혼자 덮고 있었다. 장지락이 양보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새벽녘에는 장지락이 혼자 덮고 있었다. 김성숙이 일어나 자신이 덮고 있는 담요를 장지락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작은 담요 한 장은 투쟁이나 쟁취의 대상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덮어야 할 담요 한 장은 부조리하게 작은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퀴퀴한 그것은 변증법적으로 그들의 우정을 깊고 따뜻하게 했다.

다음날. 김성숙은 아침 일찍부터 편집 일을 할 수 있었다. 장지락이 어느새 자신보다 먼저 일어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아침거리로 사다놓고 갔던 것이다. 만두 옆에는 메모지가 한 장 놓여 있다. 메모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오늘, 북경에 와 있는 모택동 동지를 취재하러 갑니다. 함께 가시려면 협회의학원 정문으로 오후 2시까지 오시오.’

김성숙은 강의가 없는 날이므로 모택동을 만나고 싶었다. 이대소 교수에게 그의 평판을 익히 들었고, 장지락이 인터뷰를 하여 <혁명> 초대석에 게재할 수만 있다면 특종이나 다름없었었다. 더구나 모택동은 공산주의자지만 육조 혜능대사를 흠모하여 일찍이 <육조단경>을 사숙했다는 얘기를 이대소 교수에게 들었던 것이다. 자신이 승려였다고 말하면 그와의 인연이 더욱 돈독해지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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