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유학

민국대학(民國大學)은 북경의 선무문(宣武門) 안에 위치한 옛 극근군 왕부(克勤郡 王府) 자리에 있었다. 극근군 왕부 자리에 민국학원이 개교된 해는 1917년이었고, 6년이 지난 뒤 1923년에 민국대학으로 개명되었던 것이다. 김성숙은 북경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학생을 모집하는 민국대학 정치경제학과 1기생으로 손쉽게 입학했다.

왕부의 건물을 그대로 물려받은 민국대학은 권위적인 관청 냄새를 강하게 풍겼다. 5칸 맞배지붕 형식의 붉은 교문 앞에는 커다란 돌사자 두 마리가 버티고 있었다. 건물을 빙 둘러싸고 있는 높은 담장은 흰색 회칠을 하여 초라한 민가들과 경계를 분명히 짓고 있었다. 교문을 들어서면 회나무와 측백나무들이 듬성듬성 직립한 정원 너머로 ㄷ자 형태로 배치된 이층 건물들이 드러났다.

금강산에서 함께 온 5명의 승려들은 각자 형편에 따라 대학을 입학했다. 김봉환은 문화대학, 윤종묵은 평민대학, 김규하 차응준 김정완은 북경대학의 신입생이 되었다. 물론 이들 외에도 북경에는 승려 출신의 유학생이 더 있었다. 금강산에서 온 승려들은 늦가을 무렵에 어느 정도 대학생활에 적응이 되자, 그들을 중심으로 북경불교유학생회를 조직했다. 상호친목과 학술연구, 자유평등, 신사회를 추구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모임 안에 체육부, 문예부, 경리부를 설치했다.

그들이 신사회를 추구한다는 것은 조선독립을 뜻했고, 궁극적으로는 조선에 불국토를 실현하는 일이었다. 회원들 중 서너 명은 여전히 승복을 입고 다녔고, 또 몇 명은 김성숙과 같이 양복으로 바꿔 입은 사람도 있었다. 김성숙은 민국대학 입학 전에 승복을 벗었는데 그 날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붉은 가사와 잿빛 장삼을 반듯하게 접어서 월초와 은사 풍곡에게 반납하는 마음으로 동쪽을 향해 절을 세 번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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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 위치한 민국대학. 운암은 여기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물론 태허라는 법명도 그때부터 내려놓았다. 앞으로는 승려신분이 아닌 김성숙으로만 처신하고 행동할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불문(佛門)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이고, 월초와 풍곡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월초의 당부대로 비구계 계첩만은 호주머니에 반드시 넣고 다녔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부처의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유학 온 다른 승려들도 그런 태도만은 엇비슷했다. 어느 날 회합한 자리에서 임진왜란 때 승병대장으로 활약한 서산대사의 격문을 돌려보기도 했는데, 그 순간만은 모두가 곧 독립운동에 뛰어들 것 같은 결연한 태도를 지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나 한일합방이나 또 다시 되풀이된 역사의 치욕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서산대사의 절절한 호소는 그들의 마음을 크게 격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아, 하늘의 길이 막히도다. 조국의 운명이 위태롭도다. 극악무도한 적도(賊徒)가 하늘의 이치를 거슬러 함선 수천 척으로 바다를 건너오니 그 독기가 조선 천지에 가득한지라. 삼경(三京)이 함락되고 우리 선조들이 누천년 이룬 바가 산산이 무너지도다. 저 바다의 악귀들이 우리 조국을 무참히 짓밟고 무고한 백성들을 학살하는 광란을 벌이나니 이 어찌 사람이 할 짓이랴? 살기가 서린 저 악귀들은 독사 금수와 다를 바 없도다.

조선의 승병들이여.

깃발을 치켜들고 일어서시오. 그대들 어느 누가 이 땅에서 삶을 얻어 받지 아니하였소? 그대들 어느 누가 선조들의 피를 이어받지 아니하였소? 의(義)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바, 또 모든 중생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는 바가 곧 보살이 할 바요 나아갈 길이라. 일찍이 원광법사께서 임전무퇴라 이르시니. 무릇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구함은 불법을 따른 우리 조상들이 대대손손 받들어 온 전통이오.

조선의 승병들이여.

우리 백성이 살아남을지 아니할지, 우리 조국이 남아있을지 아니할지, 그 모두가 이 싸움에 달려 있소. 목숨을 걸고 우리 조국과 백성을 지키는 일은 단군의 피가 혈관에 흐르는 한 누구나 마땅히 해야 할 바라. 이 땅의 나무와 풀마저 구하는 제세(濟世)가 바로 불법이 아니리까? 백성들이 적도의 창칼에 죽임을 당하고 그 피가 조국을 붉게 적시오. 조국이 사라지고 백성이 괴로워할진대 그대들이 살아남는 바가 곧 조국과 백성에 대한 배신이 아니리까?

조선의 승병들이여.

나이가 들고 쇠약한 승려는 사찰을 지키며 구국제민(救國濟民)을 기원하게 하시오. 몸이 성한 그대들은 무기를 들어 적도를 물리치고 조국을 구하시오. 모든 보살의 가피력으로 무장하시오. 적도를 쓰러뜨릴 보검을 손아귀에 움켜쥐시오. 팔부신장의 번뜩이는 천둥번개로 후려치며 나아가시오. 참변에 울부짖는 백성들이 분하고 원통하오. 지체 없이 일어나 불구대천의 원수를 토벌 격멸하시오.

조선의 승병들이여.

조정대신들은 당쟁 속을 헤매고 군 지휘관들은 전선에서 도주하니 이 아니 슬프오? 또한 외국세력을 불러들여 살아날 길을 꾀한다 하니, 우리 민족의 치욕이 아니리까? 이제 우리 승병만이 조국을 구하고 백성을 살릴 수 있소. 그대들이 밤낮없이 수행 정진하는 바가 생사를 초월하자 함이오. 또한 그대들에겐 거둬야 할 식솔이 없으니 돌아볼 바가 무엇이오? 모든 불보살이 그대들의 나아갈 길을 보살피고 거들지니, 분연히 일어서시오. 용맹의연하게 전장으로 나아가 적도를 궤멸하시오. 적도의 창검 포화가 두려울 바 무엇이오? 전투가 없이는 승리도 없소. 죽음이 없이는 삶이 없소.

조선팔도의 승병들이여! 일어서시오. 순안의 법흥사로 집결하시오. 나 휴정은 거기서 그대들을 기다릴 터이오. 우리 일치단결하여 결전의 싸움터로 용약 진군합시다.〉

서산대사의 격문을 돌려보는 동안 차응준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대금을 꺼내 불었다. 그가 가장 잘 부는 서산대사의 회심곡이었다. 차응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흘렀다. 대금소리는 개성이 강하고 자유 분망한 승려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다. 강원도 신계사 출신의 젊은 승려 윤종묵은 기어이 꺼이꺼이 울음을 토해냈다.

그런데 김성숙은 북경불교유학생회에 차츰 흥미를 잃었다. 회원들의 노선이 각각 달랐고 그 수준도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이었다. 대학공부에 뒤처지면서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가 중노릇 하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김성숙이 인민의 해방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얘기할 때면 잠꼬대 같은 소리라고 투덜거리는 사람도 생겨났던 것이다.

김성숙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동지를 찾아 나섰다. 북경의 동사미시대가(東四米市大街)에 있는 YMCA회관에 들른 것도 그런 마음에서였다. 북경에는 조선인 학생이 800명쯤 되었는데, 때마침 조선인학생회와 한인학생동맹회 학생들 간에 토론이 있다고 전해 들었던 것이다. 조선인학생회는 현 중국의 체제 안에서 개혁을 하자는 우파인 호적과 양계초의 주장을, 한인동맹회는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를 통해 개혁하자는 중국의 좌파인 이대소와 진독수의 주장을 따랐는데 조선의 독립도 마찬가지라는 논리로 두 모임 간에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빈틈없는 논리를 내세운 논쟁이라기보다는 입씨름에 가까웠다.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 김성숙은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방청석에 앉아 있던 김성숙이 일어나 발언권을 얻었다. 김성숙은 연단으로 올라가 논객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저는 금강산에서 붉은 가사를 걸치고 중노릇을 조금 했던 김규광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민국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물론 김규광은 자신의 신분을 일경에 노출하지 않기 위한 가명이었다. 김성숙이 잠시 침묵하고 있자 방청석에서 웅성거리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어떤 사람이 소리쳤다.

“금강산 붉은 승려 양반! 얘기를 계속하시오.”

“좋습니다.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성숙은 청중이 지루해하지 않게끔 10분 정도 얘기했다. 조선독립의 해법을 좌파와 우파의 논리를 넘어 불교의 중도(中道)에서 찾자는 것이 김성숙의 주장이었고, 그 역시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방편으로 받아들인 사회주의 인민해방이었다. 그러니까 김성숙의 주장은 양극단으로 치우지지 않는다는 불교의 중도를 취한 입장이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난 사회주의자 김사국의 영향이 컸으며, 자신이 실제로 조선노동공제회와 조선무산자동맹에서 활동했던 경험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김성숙이 조선독립은 어떤 주의와 사상보다 우선이라는 요지로 단호하게 얘기하자 연단의 논객들은 입을 다물었다. 침묵을 깬 사람은 연단이 아니라 방청석에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얹혀 있는 것 같은 청년이었다.

“좌파면 좌파고 우파면 우파지 중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회색이 아닙니까?”

“불교의 중도란 유교의 중용과 다르지요. 회색이 아닙니다. 흰색과 검정색을 초월한 색이면서도 흰색과 검정색을 포용하고 있는 색이 중도지요. 이제 이해하시겠습니까?”

김성숙의 대답에 청년은 더 묻지 않았다. 장신의 청년이 바로 장지락이었다. 방청석으로 내려온 김성숙에게 19세의 장지락이 먼저 다가왔다. 장지락이 김성숙의 얼굴 밑까지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협화의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의학도 장지락입니다.”

김성숙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데다 키까지 큰 장지락의 인사를 받고는 기분이 좋아졌다. 장지락의 첫 인상은 낙락장송 한 그루가 박토에 뿌리박고 있는 것처럼 믿음직해 보였다. 김성숙은 당장 그를 데리고 술집으로 갔다. 외부활동 중에 사용하는 그의 가명은 김산이었다. 술을 몇 잔 주고받으며 장지락의 얘기를 들어보니 출신지가 평안북도로 같았다. 장지락이 태어난 곳은 용천이었고, 김성숙은 철산이었던 것이다. 다만 종교는 서로 달랐다. 장지락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따라서 교회를 나갔고, 기독교 계통의 학교인 평양숭실중학교를 다녔던 기독교 신자였다. 그러나 종교 때문에 논쟁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김성숙은 승복을 이미 벗어버렸고, 장지락도 인민이 해방될 때까지는 하느님을 찾지 않기로 한 상태였다. 장지락은 더 이상 기도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고난을 극복하기로 작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성숙은 인민해방을 위해 사회주의 사상과 논리를 펴는 잡지 <혁명>을 꾸려갈 동지 하나를 발견한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자신과 뜻이 맞는 사회주의 유학파 장건상, 양명, 김용찬, 이낙구 등 8명과 창일당(創一黨)을 조직하였는데 그 기관지인 <혁명>을 발간하려고 며칠 전부터 기자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장지락 역시 김성숙의 제의를 받고는 감동했다. 기자가 되면 사회주의 이론에 해박할 뿐더러 형님 같은 김성숙을 날마다 만날 수 있고, 자신이 흠모해왔던 북경대학 이대소 교수나 진독수, 모택동 등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성숙은 잡지 <혁명>의 주필을, 장지락은 부주필을 맡았다. 중국 공산당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이대소는 잡지 <혁명>의 고문 역할과 고정필자가 되어 주었다. 창간호부터 중국의 석학인 고급필자를 확보한 셈이었다. 김성숙의 예감은 적중했다. 비록 32페이지의 얇은 잡지였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주로 사회주의 동조자, 좌파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정기구독을 신청했다. 800부를 발행한 창간호는 금세 재고가 사라졌다. 6개월 이내에 3천부 돌파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조선은 물론 만주, 시베리아, 호놀룰루, 캘리포니아, 유럽까지 잡지의 고정 독자들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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