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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수행법이 위빠사나? “근거 없다”<br>장점 많지만 대중적 수행법이기엔 ‘한계’

이제열 | webmaster@mediabuddha.net | 2011-03-24 (목) 10:24

크게보기얼마 전 발행된 <불교평론> 봄(2011)에 실린 동국 대학교 황순일 교수의 ‘남방 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견해’에 적극적인 동조를 보낸다. 황 교수의 주장은 대략 두 가지이다. 첫째는 현재 행해지고 있는 남방 국가의 위빠사나 수행이 초기불교의 수행법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위빠사나 수행이 남방국가에서 중시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며, 위빠사나의 본고장처럼 여겨지는 미얀마에서 위빠사나가 활성화된 배경에는 대중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군사정권의 의도가 깊이 깔려 있다는 내용이다.

황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불교의 깨달음은 반드시 지혜 수행인 위빠사나만을 통해서 가능한 것만은 아니며 오히려 부처님은 위빠사나 보다는 사마타를 중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얀마 정권에서 위빠사나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이유는 위빠사나가 중생의 모든 내․외적 상황에 대해 오직 무상과 무아와 고만을 자각하려 하기 때문에 그들의 독재 정치에 무관심과 함께 저항 의지를 지니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나 역시 오래 전부터 일부 남방국가에서 수행을 하고 온 사람들의 무조건적 위빠사나 추종 행위에 적지 않은 우려를 표시해 왔다. 심지어 나는 남방국가에서 수행하고 돌아온 지나치게 위빠사나를 추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한국의 대승불교에 위기가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경고까지 한 바 있다.

엄밀히 말해, 황 교수의 주장을 빌릴 필요도 없이, 초기경전 자체만 가지고 보더라도 반드시 위빠사나만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더구나 부처님이 대각을 이루기 위해 오늘날 남방국가에서 유입된 위빠사나를 행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다. 부처님이 성도하시기 직전 내면에서 연기의 법을 순관․역관 했다는 기록은 분명하지만 연기를 깨닫기 위해 어떤 수행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였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그리고 초기경전을 조금만 주의해서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부처님 당시의 많은 수행자들이 수다원과를 비롯한 그 이상의 과를 성취한 것도 특별한 한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 했던 것은 아니다. 저 유명한 바보 수행자 쭐리 빤따까의 예만 보더라도 그 역시 현재의 위빠사나와는 무관한 방법으로 도과를 성취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권한 수많은 수행법들은 현재처럼 어떤 정형화된 방법들이 아니었다. 경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은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그때그때 즉흥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이 도과를 성취하도록 인도하셨던 것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수많은 수행법들이 있어 왔고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이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남방의 위빠사나 수행을 추종하는 분들은 위빠사나는 부처님이 직접 행하신 수행법이고 오직 위빠사나만이 진리를 성취할 수 있다고 큰소리친다. 이 분들의 주장을 들을 것 같으면 마치 남방에서 행하고 있는 위빠사나만이 정통이고 그 동안 대승권에서 행해온 여러 가지 수행법들은 모두 변질되고 왜곡된 수행인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또 한 가지, 황 교수가 미얀마 정권을 들어 설명한 남방 위빠사나 수행이 지니고 있는 법인(法印)에 관한 부분이다.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은 오로지 삼법인의 체득과 갈애의 소멸에 있다. 위빠사나 수행은 삼법인을 체득하여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타파하고 갈애를 소멸하여 해탈 열반에 이른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삼법인에 초점을 맞춘 위빠사나 수행에는 과연 문제가 없을까?

나는 이 수행에 대해 두 가지의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첫째는 남방의 위빠사나 수행은 사람들에게 세상에 대한 무관심과 무기력을 가져 올 수 있다는 점이다. 남방 위빠사나의 시각에서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바람직하지 않은 존재이고, 세상은 머물러야 할 가치가 별로 없는 장소이다. 삼법인에 지나치게 의존한 인생관은 삶의 의미에 무게를 두지 않는다. 삼법인의 인생관은 오직 삶이란 다음 생에 몸을 받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할 때만이 빛난다. 따라서 이같은 수행을 지속하게 되면 자연히 그 수행을 하는 사람은 세상을 향한 적극적이고 활발한 삶을 살아가기 어렵다. 특히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는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 세계에 대한 무관심을 촉발시켜 세상을 개조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시도 하려 하지 않는 경향을 갖게 된다. 자신의 주변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개성과 감정의 발현을 경계하고 불간섭․무대응의 자세를 취한다. 세상의 악과 불의에 대해 공격과 방어 자세를 적극적으로 취하려 하지 않고 순응과 방관 쪽으로 기운다.

다음 남방 위빠사나 수행의 또 한 가지 문제는 중생의 욕구에 대한 부분이다. 중생의 욕구는 중생 생존의 근저를 이룬다. 중생에게 욕구가 없다면 생존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욕구는 감각적 쾌락과 연결된다. 그런데 남방의 위빠사나 수행은 중생의 이러한 감각적 쾌락을 향한 욕구를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을 취한다. 모든 감각적 쾌락은 버려야 할 바며 떠나야 할 바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버리고 떠나야 할 중생의 감각적 쾌락을 향한 욕구는 그게 설혹 건전하고 건설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위빠사나의 입장에서는 크게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는다. 무상 무아 고를 중심으로 갈애의 소멸을 추구하는 위빠사나의 원칙에서는 중생이 꽃을 보고 향기에 취하는 것도 주의해야 할 일이며 남녀 간에 애틋한 사랑도 마음 놓고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극단적인 표현일지 몰라도 삼법인과 위빠사나가 중시된 삶은 출가 수행자나 출가의 가치에 기반을 둔 세속 사람들에게나 걸맞다고 할 수 있다. 이 수행의 인생관에 있어서는 세속적 가치에 대한 향유, 과거에 대한 반추, 미래에 대한 계획이 희석되고 오직 여기 오온의 흐름을 관찰하는 것만이 최상의 가치가 된다. 여기에는 세속적 가치들에 대한 성공을 위한 집념과 왕성한 활동은 갈애나 집착이라는 이름아래 기세가 꺾인다. 이렇게 무상․무아․고에 기초한 갈애의 소멸이 목적인 위빠싸나 수행이 중생들에게 청정과 지혜와 해탈은 약속 받을지 몰라도 중생의 현실에는 동화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국불교 발전에 남방의 위빠사나 수행이 큰 치료약이 되리라고는 보지만 만병통치약으로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한국의 대승불교를 남방의 불교가 들어와 잠식 되는 것을 매우 위험스럽게 생각하는 입장에 있다. 또한 위빠사나 수행이 불자들에게 보급 될 경우 위와 같은 인생관과 세계관이 형성되는 것을 경계한다. 남방불교 자체가 한국불교의 한 분야를 이루는 것은 적극 찬성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의 적자임을 내세워 대승불교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은 도저히 간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남방불교가 아닌 대승불교를 지키고 선양해야만 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기회를 빌려 말하고자한다. <<STRONG>적연 이제열 법사(유마선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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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퇴유 2011-03-26 05:4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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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예리하고 법에 부합하는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선지장주의에 이어 위빠사나 지상주의가 있는 것같아 염려됐었는데 법사님 가르침을 들으니 가슴이 후련합니다. 고맙습니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 2015-03-03 07:3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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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법인..........이란 말자체도 오류,에러입니다....
무슨 법의 도장을 찍습니까?...........윤회의 세계인 존재계에서.......

윤회의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공통적인 특징과 상태, 즉 3특상이라고 합니다...........무상/고/ 무아............

이래서 대승이 멀었다고 하는 겁니다....당연히 위조하고 거짓말로 지어낸 대승경전이 논사들의 작품이니,진품의 황금을 발견할수 없고,깨달음의 착각에 사로잡혀 미친 짓거리를 한  자를 아직도 추종하는 중들이란 자들이 숱하게 있어서,돈벌이, 천도제, 정치 장난, 사판승제도........이게 한국불교의 자화상 아닙니까?..

붓다의 수행법은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골방에 들어서, 화두드는 것은 전혀 붓다의 수행법과도 관계없습니다.
이런 거나  하고 있으니, 선불교가 티벳불교보다도 정교함과 수준이 떨어지는것입니다..... 말로만 간화선이 최고의 수행법이라 하지만, 세계 어디에서 간화법 수행 사원이 얼마나 있습니까?..티벳불교보다도 훨씬 같은 대승에서도 떨어지고, 계율도 안지키고, 별 희안한 중들의 작태가 언론지상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즉, 붓다의수행은, 37보리분법에 다 있습니다.......사념처......8정도......7각지..........결국 구체적인 수행법은 사마타와 위빠사나..지와관의 수행입니다....

붓다와 아라한이 무상/고/무아를 깨달았는데,세상을 버리고 세상에 대해서 염세적으로 골방,산속에서 은둔햇습니까?......

깨달음이란 의미자체도 이리 다르니, 착각선사들이 나오는 것이지요.

미얀마의 위빠사나 수행은 지보다는 관수행을 위주로한 수행일뿐입니다.
이것이 복잡한 현대인에게 어필된것은 대중이 쉽게,접근할수 있는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띠, 자신의 몸과 마음의 현상을 분리해서 지켜보는 수행으로 결국 삼특상의 무상/고/무아를 깨달아, 결국 번뇌의 멸절로 인한 고의 소멸로 지고의 행복을 느끼고, 윤회의 세계를 끊어버리는, 즉 불생불사의 닙바나라는 열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붓다의 수행법의 한 갈래일뿐입니다.......지나치게 미얀마식 위빠사나수행법의 우수성을 내세우기 위해서, 강한 주장을 한면이 다소 있지만....

위빠사나와 사마타.........지와 관수행..........이것이 붓다가 가르쳐준 수행법입니다.......

선정으로서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지혜로서, 무명이란 번뇌,갈애,집착을 제거하는.........
두마리 말이 마차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물론 대승에서도 티벳불교는 지와 관수행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선불교의 화두수행,간화선과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세계에서 인기를 얻고 있지요

붓다의 구체적인 수행법은 아나빠나 사띠 입니다..........호흡관찰명상입니다................이것으로 선정을 얻어, 색계  4선에서 발휘된 신통력으로, 삼명으로 ,숙명통,천안통, 누진통으로, 위빠사나의 지혜, 무상/고/무아를 깨닫고, 연기를 깨닫고 4성제의 고집멸도의 진리를 깨달아, 번뇌가 도달할수 없는......그래서 업이 더이상 생성되지 않는........윤회의 지배를 받지 않는, 닙바나, 열반.........이 방법이 붓다가 하신 전통적인 깨달음의 방법입니다........

호흡법으로 선정을 얻고, 선정의 출정상태인 근접삼매에서의 삼명이란 신통력으로 지혜수행을 한 것입니다............
즉 지와 관수행의 복합이고, 그 이전은 사띠 수행이고, 그 기초적 마음가짐은 의지로 하지 않는 수행, 욕망으로 하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닦으신 겁니다..........

의지가 없으면 현실속에서 염세적으로 약하게 될수 있다라는 법사님의 말씀은 불교의 수행의 가장 중요한 핵심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지를 놓아버리는것이 유신견을 철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욕망과 집착으로 하지 않는 놓아버리는,방하착하는 수행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 입니다........
제대로 된 경전을 읽지 않고, 쓸데없는 유사경전을 읽고, 착각도인의 말을 따르니,좌선,선정보다는 견성, 성품을 본다라고 하는 중국의 혜능의 돈오적 수행......그것을 이어온 간화선수행.....이것은 붓다의 가르침도 붓다의 수행법도 아니고, 붓다가 권장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긴시간 부처의 수행이라고 골방화두나 잡고 있던 자들은, 그동안 해온것이 있으니  버릴래니  매우 아깝겠지요.

붓다의 수행법은 지와 관..........선정과 지혜.를 함께 합니다..........
선정을 포기한 단순한 견성이 아니예요.........
돈오적인 수행차제가 아니고, 점진적인 방법입니다.
대승과 상좌부 불교에서는 위조된 경전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보살을 만들어놓은것을 제외하고도,  구체적인 수행법에서도, 또 깨달음의 경지에서도  수많은 것들이 각론에서  엇갈리고 다릅니다.

그저 잘하는 것은, 우기는 것이지요.
간화선이 최고의 수행이다.
선불교가 제일 수승하다
깨달음 이후에 온 자들은 막행막식해도 무애행이다..

배고프면 밥먹고, 배아프면 똥싸고......법문이나 tv에 공개적으로  하면서.........

붓다의 수행법은 중도 입니다.........이 중도는 바로 8정도입니다........중도가 허황된 이론이 아니예요......
중도는 8정도라는 실천법이지, 무지한 선사들이 말뜻으로 좌/우에도 치우치지 않는 이론적인 사항이 아니예요.,..
한 50년 선승한 자들도 이러는 이유는,기본적인 공부,붓다의 원음에 대한 공부를 하지 못햇기에, 남들한테는 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은 실제로 관념으로 머리로 불교식 해석을 공개방송에다 하는 것이지요...
정직하지 못한 수행자들의 표본들이 하나 둘이 아니지요.
죽을때 열반상보면  다 알아요.........
고요히 평화스럽게 행복하게 만족하면서 죽었나?
미친소리 하다가 소리질르고 죽었나?...

법사님의 의지를 길르는 수행은 엇나가면 자아,에고를 길르는 겁니다.
수행은 의지를 놓아버리면서, 법에 의해서 수행이 저절로 되어가는 것이
불교수행의 최고의 경지입니다.......
이것이 진짜의 의미의,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밥먹고 인데......이것이
아라한의 경지이고, 흔히 선사들이 말하는 응무소주 이생기심 ......이라는 겁니다......의지,의도가 없는 수동적인 의도,자연적인 의도를 법이 끌고간다는 집착없는 마음의 상태에서도  에고의 의지가, 자아의 의도가 아닌, 담마,법이 저절로 끌고 간다는 수동적인 의도..........이것이 무아의 한 모습이라 이겁니다.......

나름대로 정법당간을 세우려 노력하고 있지만, 대승이란 한계성에 부딪칠수 밖에 없겠지요.........
수행의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 뭔지...........
불법의 지향의 핵심이 뭔지.............
의지,의도,이런것을 내세우니, 아직도  법사라는 분이 불법의 핵심과 맥조차도 잘 모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불법의 수행은 한마디로 하면 무집착이 된 끊임없는 노력입니다........................

말로만 선사들이 방하착 하지..........
실제로는 써먹지도 못하는 립써비스용일뿐이지요...........
그런것들이 대승이란 울타리의 본래적이고,  태생적인  한계입니다.
간화선보다 더대중적인데. 2015-03-03 07:5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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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차리세요.....
위빠사나수행을 하면 염세적으로 된다는 사고가 어디서 누가 그러나요?...

그래서 미국놈들이 mbsr 이라고 해서 병원이나 심리학자 철학자 이 자들이 연구하고 그러는 줄 알아요?
위빠사나 2023-09-21 08: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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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안거라도 해보시고 위빠사나 수행법을 평해 보셔요.
신지 .짠지.  단지.  맛보시고
안해 보시고 남방불교ㅡ
말씀해  보셔요.
정말 해보셔요 ~법사님
수처작주 2024-02-11 06:5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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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옹호 신봉자들아 조사선의 견성은 정혜쌍수법이다 곧 한꺼번에 선정과 지혜를 균등하게 일상에서 쓰는법이다 응무소주이생기심은 선종에 좌우명이다 골방운운하
는 멍텅구리는 골방에서 우주를 주무르는 것을 모르는구나 구지선사가 손가락 하나 들어보인 도리가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도리이고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는 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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