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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3국 불교 꽃피운 국제적 도량<br>佛法 배우려는 韓日구법승 흔적 곳곳에

절강성=이학종 | urubella@naver.com | 2010-07-21 (수) 11:55

국청사 맨 위 전각 앞에서 바라다본 국청사 전경. 멀리 수탑이 보인다. 크게보기

천태종 국청사는 중국 천태종의 총본산이다. 천태지자 사후 4년 만에 제2조 장안관정(章安灌頂 561∼632)이 창건했다. 그러나 국청사는 단순히 중국 천태종의 총본산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스님들이 찾아와 공부하고 불법을 배워간 국제사찰이기도 했다.

일본 조동종의 개창조 도겐(道元) 스님이 1224년 1월 말에서 3월 말 사이에 국청사를 다녀갔고, 일본 임제종의 태두 에이사이 (榮西, 1141∼1215)스님도 국청사에서 임제종 황룡파의 허암회창(虛庵懷敞) 스님을 만났다. 에이사이는 1168년에 첫 입송했고 반년만에 귀국해 천태밀교 관계저술에 집중했던 스님이다. 1187년 두 번째에 입송해 이때 허암회창 밑에서 선을 닦았다. 귀국후 『흥선호국론(興禪護國論)』을 집필했다. 임제종의 선을 일본에 처음으로 전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밀교와의 겸수선이라는 지적도 있다. 교토 시내에 있는 겐닌지(建仁寺), 가마쿠라의 쥬후쿠지(壽福寺), 큐슈의 쇼후쿠지(聖福寺)를 창건한 인물이다. 송나라에서 귀국할 때 차를 들여와서, 묘에(明惠)로 하여금 재배케 했고, 앞서 천동사 편에서 언급한대로 『끽다양생기』를 저술했다. 도겐 스님은 겐닌지에서 잠깐 에이사이 스님을 뵙고, 그의 사후 에이사이의 제자 묘젠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묘젠은 도겐과 함께 입송한 인물로 도겐의 『정법안장수문기』에는 일본스님들 중 에이사이와 묘젠 두 스님만이 긍정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아무튼 에이사이 스님은 사재를 털어서 국청사의 삼문(三門)과 서무(西廡, 서쪽 회랑)을 수리했다.

특히 일본 천태종의 개조 사이쵸(最澄) 스님이 연력 23년(804) 단기 유학생으로 입당해 천태종을 공부했다. 『내증불법상승혈맥보(內證佛法相承血脈譜)』에 따르면 사이쵸는 천태산 국청사 등 천태현 인근에서 사종상승(四宗相承)을 했다. 첫째는 천태종 7조 도수, 그리고 행만(行滿)으로부터 태주 용흥사에서 원교(圓敎)를 이었고, 둘째는 도수로부터 보살계를 받아 계율(戒律)을 이었고, 셋째는 교효(行表, 일본의 승려)와 소연(翛然, 천태산의 우두종 승려)로부터 선(禪)을, 넷째는 순효, 대소, 강비, 영광 유상 등으로부터 소흥 용흥사에서 밀교(密敎)를 전해받았다는 것이다.

한국의 승려로는 고구려의 파약(波若) 스님이 국청사를 참배했고, 고려의 승려로는 이응(理應), 순영(純英), 도육(道育), 의통(義通), 지종(智宗), 체관(諦觀), 의천(義天), 수개(壽介), 도송(道頌), 벽선(壁宣), 덕선(德善), 오공(悟空), 학일(學一), 혜철(慧徹) 등이 있다.

국청사 입구에는 멋진 계곡이 흐른다. 이 계곡을 건너는 다리의 이름이 풍간교다. 크게보기

천태산 국청사,는 이렇듯 과거 옛 스님들이 참배하고 싶었던 절이었다. 누구나 참배하고 수행을 하며 천태지자의 높은 법을 배우고자 했던 도량, 국청사. 오늘은 조금 시간을 갖고 아침 일찍부터 거대한 도량을 찬찬히 돌아볼 참이다.

막 오전 7시를 넘겼을 뿐인데도 더운 기운이 후끈 목젖을 자극한다. 오늘도 꽤나 더울 모양이다. 어찌나 더운지 가만히 있어도 주룩주룩 땀이 흐른다. 반바지에 반팔 차림을 했지만 흐르는 땀을 제어하지는 못한다. 이내 옷은 땀으로 범벅을 하고 있다.

“옛날 기록으로 선원청규를 볼 때에는 여름이면 하루에 한 번 목욕을 하게 되어 있어서 수행자로서 너무 잦지 않나 생각했죠. 그런데 막상 여기에 와서 여름 날씨를 직접 경험해보니, 하루에 한 번 이상 목욕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게 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역시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그 진실을 제대로 알 수는 없는 겁니다. 직접 순례가 왜 중요한가를 알게 해주는 것이죠.”

민족사 윤창화 사장의 말이다. 글로 읽을 땐 실감이 나지 않던 청규의 각 규정들이 현장에 와서 보니 피부로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수대고찰(隨代古刹)’. 국청사의 조벽에는 이 절이 수나라 대에 세워진 절임을 밝히고 있다. 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찰이란 뜻이겠다. 그런데 국청사 입구에는 또 하나의 4자 문구가 적혀 있다. 교관총지(敎觀總持)다. 천태종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인데, 천태종의 총본산이니 당당하게 교관총지라고 적어 놓은 것이다.

국청사에 대한 기행문은 무수히 많다. 그만큼 중요한 사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사찰의 전각이 갖는 특징이나 설명보다는 주로 이곳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국청사를 소개하기로 한다.

저 옛날, 우리나라와 일본의 스님들에게 있어 국청사는 가슴에 사무치고, 절 이름만 들어도 눈에 눈물이 맺혔던 곳이다. 그들은 수백 리 바닷길을 건너, 또 수백 리 땅길을 지나 오직 구법의 원력을 간직한 채 이곳에 왔다. 그런 절을 오늘날 우리는 비행기와 버스를 대절해 찾아가니, 그 감동이나 사무침은 예전의 구법승들과 견줄 수 없다.

대각국사 의천스님도 국청사에 와서 천태지자선사의 육신보탑에 예배 올리고 고려에 돌아가면 천태종을 개창하갰다고 맹세했고, 국청사 앞에는 신라스님들이 거주한 신라원(新羅院)이 따로 있었을 정도로 구법승들의 숫자는 많았다.

사실 천태산은 축담유(竺曇猷) 선사로부터 시작된다. 축담유 스님은 법유(法猷)라고도 부르는데, 원래는 천축의 사람으로 돈황(燉煌)에 상인으로 왔다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후에 강남을 떠돌다가 시풍(始豊)의 적성산(赤城山) 석실로 자리를 옮겨 앉아, 음식을 구걸하고 좌선을 하였다. 전하는 말은 이렇다.

사나운 호랑이 수십 마리가 담유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담유가 경을 외는 소리는 전과 같았다. 한 호랑이가 졸자, 담유는 짐짓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리며 물었다.

“왜 경을 듣지 않느냐?”

이윽고 호랑이 무리가 모두 떠났다. 그러자 얼마 후에는 굵은 뱀들이 다투어 나왔다. 길이가 10여 아름이나 되는 것들이 빙빙 돌면서 오갔다. 머리를 치켜들고 담유를 향하다가, 반나절이 지나자 다시 떠났다.

천태산에는 외로운 바위가 구름에 닿을 만큼 빼어나게 홀로 서 있었다. 담유는 돌을 치고 사다리를 만들어 그 바위에 올라가 좌선하였다. 그러면서 대나무를 이어 물을 옮겨, 일상생활에 공급하였다. 선을 배우려고 찾아온 사람이 10여 명이 있었다. 왕희지(王羲之)가 소문을 듣고 짐짓 찾아가, 봉우리를 우러르며 높이 인사하여 경의를 다하고 돌아갔다.

적성암(赤城巖)은 천태산의 폭포와 영계(靈溪) 사명산(四明山)과 나란히 서로 연속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천태산은 까마득한 절벽과 드높은 산마루가 하늘을 끊는다.

축담유는 태원 연간(376∼396) 말기에 산의 석실에서 세상을 마쳤다. 시신은 그대로 편안하게 앉아 있었으나, 몸이 온통 녹색이었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 말기에 은둔한 선비 신세표(神世標)가 이 산에 들어가 바위에 올라갔다. 짐짓 담유의 시신을 보았는데 썩지 않았다. 그 후 그곳에 가서 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구름과 안개에 헷갈려서 엿볼 수가 없었다.

이후 천태지의(天台智顗) 선사가 38세 때 천태산으로 들어가서 11년 동안 수행 정진하였다. 선사는 천태산에서 실참공부가 더욱 원숙해졌고 완성도를 높였다. 천태지의는 48세 때에 천태는 진나라황실의 요청으로 인해 다시 금릉으로 내려왔다. 천태는 그 동안 공부한 힘을 발휘해서 ‘천태의 삼대부’라고 불리는 ‘법화문구’, ‘법화현의’, ‘마하지관’을 강의하였다. 52세 때 진나라가 수나라에 의해서 망하자 천태는 여산에 은둔하였다.

천태지의 선사는 전쟁을 피해 여산에 칩거하지만 수나라 진왕 광의 간곡한 초청으로 591년 양주로 가 진왕 광에게 보살계를 주고 ‘지자대사’란 칭호를 받았다. 이후 고향인 형주로 돌아가 옥천사를 건립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사상을 펼쳤다. 옥천사는 대통신수가 거주하며 자신의 선법을 펼치던 사찰이며, 그의 사리탑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천태지의는 595년 진왕 광의 초청으로 다시 양주를 방문하게 되며, 이곳에서 진왕을 위해 〈정명현의〉를 저술하여 증정했다. 이후 천태산으로 은퇴하며, 597년 60세를 일기로 적멸의 상을 보였다.

천태지의(天台智顗) 선사는 천태산 도처에 수행의 유적을 남겨 놓았다. 고명사(高明寺), 만년사(萬年寺) 선흥사(善興寺) 등이며, 국청사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천태지의(天台智顗) 선사는 중국에서 최초로 천태종의 종파불교를 제창하였고, 그 후에 화엄종 법상종 삼론종 율종 밀종 등이 나타났다.

대웅전 앞 향로. 서태후와 관련이 있는 향로로 그 조각솜씨가 일품이다. 크게보기

이곳 국청사는 천태대사가 설계를 완성하고 그 둘째 상자인 장안관정이 수양제에게 불사를 부탁하였으나 양제가 거절하였다. 얼마 후 대사가 열반에 들자 그때야 양제는 큰 스승의 떠남을 후회하고 대사에게 보은사를 지어 올렸다

이 절의 이름이 국청사가 된 유래는 천태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천태대사가 산에 들어와 선정을 닦을 때 정광(定光) 선사가 꿈에 나타나 “사찰이 완성되면 나라가 곧 맑아지니 국청사라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연기에는 천태대사가 절을 지으려고 이곳을 유람할 때 항상 석교(石橋)에서 지냈는데 검은 두건을 쓰고 붉은 옷을 입은 세 사람 중 한 노승과 나눴다는 이야기에서 연원한다.

노승은 “선사가 절을 짓고자 한다면, 황태자의 절터가 있으니 우러러 희사할 것”이라고 했고 천태대사는 “띠집으로 짓는 것도 어려운데 어느 때에나 절을 이룰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노승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삼국이 통일되면 한 세력가가 이 절을 일으킬 겁니다. 절이 이루어지면 나라가 맑아질 것이니 이름을 국청사라 하십시오”라 했다는 것이다.

과연 국청사는 천태대사가 입적한 바로 이듬해인 개황 18년(598) 진왕 광(廣, 훗날 수양제가 됨)의 시주로 불사를 시작하여 인수원년(601) 건립됐다. 처음에는 ‘天台寺(천태사)'로 이름했으나, 지조(智璪)가 나서서 천태대사의 영이로운 꿈이야기를 주청하여 605년 정광선사가 알려 준 대로 국청사라 했다고 한다.

국청사는 그동안 몇 차례의 훼손과 중수를 거쳤다. 회창의 법난(841~846) 땐 모두 불타고, 대중 5년(851) 중건된 뒤 송대 경덕 2년(1005) 경덕국청사(景德國淸寺)라고 절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그 후 전란으로 전각이 훼손됐다가 건담(建炎) 2년(1128) 다시 중건했다. 2년 후인 1130년부터는 선(禪) 사찰로 바꿔 강남 10찰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원대에는 선과 함께 천태종의 활약이 두드러지면서, 원나라 정원 원년(1295) 고승 성징(性澄)의 노력으로 마침내 국청사는 천태종 사찰로 회복됐다. 그리고 명나라 융경 4년(1570) 재차 중건되고, 현재의 모습은 청나라 옹정 연간(1723~1735)에 지은 것이다.

우화전 전경. 이 전각에는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크게보기

풍간교를 건너 국청강사 산문의 대문을 열면 사천왕을 모신 우화전(雨花殿)이 나온다.《국청사지》에 따르면 국청사의 전체 구도가 이른바 오조(五條)의 종축(縱軸)으로 전(展)ㆍ당(堂)ㆍ누(樓)ㆍ실(室) 등 중심 건물이 배치돼 있다. 산문을 들어서면 미륵전ㆍ우화전ㆍ대웅전의 삼대전(三大殿)과 관음전이 국청사의 중심축이 되고, 좌우 동서에 두 축씩 모두 5조로 총 30여 채가 자리한다.

또 횡축(橫軸)으로도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보면 동쪽 1축에 영탑루(迎塔樓), 2축에 수죽헌(修竹軒), 서쪽 1축에 묘법당(妙法堂), 2축에 옥불각(玉佛閣)이 자리한다. 우화전 횡축으로는 동쪽으로 종루(鐘樓) 서쪽으로 고루(鼓樓)가 정연하게 좌우로 자리잡고 있다.

이런 배열은 산문을 열고 절에 들어온 사람들이 5조의 축을 중심으로 참배하도록 돼 있고, 점차 고도가 상승하게 돼 가장 높은 위치에서 조망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또 전각들의 배열이 질서 있고 조화롭게 구성돼, 자연지형을 살리면서 불사활동(佛事活動)과 생활공간이 원활이 이루어지도록 설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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