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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종고의 간화선풍이 깃든 도량<br>禪堂의 세 禪僧은 무슨 생각할까?

절강성=이학종 | urubella@naver.com | 2010-07-07 (수) 15:35

영파는 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간화선을 정립한 대혜종고가 머물렀던 아육왕사와 묵조선 근본도량인 천동사가 시내에서 30분 거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순례자 참가자들은 각자의 순례 목적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책으로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번 순례를 견문각지(見聞覺知)의 기회로 삼겠다는 동국대 교수 혜원 스님. 개인적으로 번역작업을 하고 있는, 천동정각(天童正覺) 스님의 <종용록(從容錄)>이 집필된 천동사와 대혜종고의 아육왕사를 직접 보고 싶어서 참가하게 됐다는 석지현 스님, 일본 교토의 선종사찰들에서 확인한 7당가람 형식이 중국의 선종사찰에서도 지켜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순례의 목적이라는 민족사 윤창화 사장 등의 발언이 이어졌다.

아무려나, 간화와 묵조는 선수행의 양대 산맥으로 오늘날까지 긴장관계에 놓여 있는 수행법이다. 이 오랜 전통이 이미 이 시대에 지척거리에 있는 아육왕사와 천동사의 두 대가람에서 비롯된 것이니, 어찌 불교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깊다하지 않을 수 있으랴.

아육왕사의 거대한 탑크게보기

아육왕사 입구크게보기

영파에서 첫 밤을 보낸 후 아침 일찍 도착한 태백산 아육왕사(阿育王寺)는 중국의 여느 사찰들처럼 불사가 한창이다. 절앞 주차장에는 건축용 목재가 빼곡이 쌓여 있다. 아육왕사는 중국 서진시대에 유살하가 아소카왕의 8만4천탑 중의 하나인 보탑을 발견한데서 기인한다. 유송(劉宋)시대에는 여기에 사탑(寺塔)이 건립되었고, 이후 양나라 무제가 중수(重修)와 함께 아육왕사라는 절 이름은 하사했다. 달마대사와의 첫 대화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조불조탑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양무제가 중수한 절이니, 아육왕사가 선종 5산의 하나로 꼽히는 절이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곳은 특히 대혜종고 스님이 15년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67세부터 3년간 주지를 살며 선풍(禪風)을 진작시킨 도량이다. 조송(趙宋)시대에 소동파와 친교가 있던 대각회련(大覺懷璉)이 내주한 이후부터 천하의 명찰이 되었다.

아육왕사 천왕전크게보기

얼음이 긴 강물 잠가 그 흐름 끊겼는데

뉘 있어 이 얼음 위에 뱃머리를 띄우리

봄 우레 울자 복사꽃 어지러이 물결침이여

한 빛 섬광 속에 조각배는 십주를 지나갔네.

氷鎖長江凍不流 厭厭誰解攂船頭
春雷送起桃花浪 一閃孤帆過十洲

아육왕사를 중국 최고의 명찰 중의 하나로 세상에 널리 알린 주역 대각회련 선사의 선시(禪詩)다. ‘선문염송 제793칙공안송’으로 대각회련의 경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다. 석지현 스님은 이 선시에 대한 감상을 “가장 빠름은 가장 느림 속에 있다. 마른 나무처럼 침묵을 지킴은 그 침묵 속의 칼날(직관력)을 갈기 위함이다”라고 <선시감상사전>에서 적고 있다.

아육왕사는 281년에 혜달(慧達)이란 스님에 의해 세워졌다. 현몽을 통해 도인으로부터 상서로운 자리를 알게 된 그가 부처님의 사리탑을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이곳에 도착, 땅 속에서 울려오는 종소리를 듣고는 3일간 정성껏 기도하니 오층사각(五層四角)의 사리보탑이 지하에서 솟아, 그곳에 절을 짓고 수행했다는 창건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가 이곳에 절을 짓자 양나라 무제가 절 이름을 아육왕사라고 명명하고 대대적인 불사를 한 것으로 알려진다. 아육왕은 인도의 전륜성왕 아쇼카의 중국식 표현이다.

그렇다보니 아육왕사는 현재 중국 사람들에게는 ‘대혜종고의 인연처’보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골사리가 봉안된 절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아육왕사는 석가모니 정골사리를 소중히 여겨 사리탑을 모시는 전각을 크게 지어 모시고 있으나, 정작 진품은 사리전 뒤쪽 일반인들의 출입이 제한된 곳에 따로 모셔놓고 있다.

묘승지전(사리전)크게보기

불사리를 모신 4각5층탑크게보기

아육왕사는 도겐 스님이 1223년 7월 15일 하안거 해제 이후 참배를 했고, 고려출신으로 천태종 제16대 조사를 지낸 보운의통(寶雲義通) 존자가 머물며 강석을 열었던 곳이니, 한일 양국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절이다. 또한 일본에 건너가 임제종을 창시한 종조 에이사이(榮西)스님도 이곳에서 머물렀다. 그는 선 공부 외에도 차를 연구해 차나무를 일본에 전한 스님으로 유명하다. 일본에서는 ‘끽다양생기(茶養生記)’를 저술한 에이사이 스님을 다조(茶祖)로 모시고 있다. 이 절에는 본래 의통존자의 탑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보운의통 외에도 대각국사 의천과 나옹화상 등이 순례를 했으며, 일본에 계율을 전한 감진(鑑眞) 화상의 탑이 남아 있다고 전하는데, 확인을 하지 못했다.

아육왕사 선당크게보기

자, 지금부터는 아육왕사에 머물며 간화선풍을 떨친 대혜종고 스님의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대혜종고 스님은 북송 말 남송 초의 험난한 시대를 살았던 스님이다. 요나라와 금나라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국가는 위태로웠고, 백성들은 전란에 휩쓸려 삶의 터전을 잃고 유랑걸식으로 목숨만 연명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대혜종고 스님은 선풍을 진작해 꿈과 희망이 사라진 나라를 중흥시키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특히 국가의 지도층인 지식인들이 간화선을 바로 알아야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혜종고는 여러 지식인들과 선에 관한 서찰을 주고받으며 그들의 선지를 발현하는데 힘썼다. 이때 오고간 편지를 묶은 책이 그 유명한 ‘서장(書狀)’이다. 서장은 오늘날에도 선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손꼽힌다.

대혜종고의 선풍은 그가 아육왕사에 머물고 있을 당시 그 회상에 1만2000여 대중이 모여들었을 정도로 대단했다.

선방 내부 중앙에 위치한 승려상 모양의 문수보살상크게보기

선방 내부의 구조크게보기

간화선을 정립한 대혜종고 선사의 정신이 깃든 아육왕사를 돌아볼 요량으로 사원을 둘러본다. 절입구에서 보이는 거대한 동탑과 시멘트 건물이 절의 규모가 상당하다는 것을 일러주지만, 실제 속속들이 살펴보면 조불조탑의 솜씨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우리나라와 같은 짬진 불사와는 거리가 멀다.

절 입구를 지나 큰 연못이 나오고, 연못을 지나 본전보다도 웅장한 천왕전이 우뚝하다. 천왕전 내부에는 우람한 사천왕이 양편에 서 있고, 사천왕을 지나면 부처님 사리를 모신 묘승지전(사리전)이 순례객을 맞는다. 이 전각 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사리탑이 중앙에 모셔져 있고, 사리탑 뒤편으로는 부처님 열반상을 모셔놓았다. 대승불교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사원에서 초기불교 권에서나 볼 수 있는 열반상을 만나는 느낌도 새롭다. 부처님의 진신 정골사리를 모신 도량이니 그쯤은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진짜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전각은 묘승지전 뒤쪽에 있는 전각이다. 전각의 입구에 들어서면 ‘현사리광(現舍利光)’이라고 적은 현판이 걸린 방이 나오고, 거기에 있는 불단에 4각5층 불사리탑이 모셔져 있다.

공부하는 순례단이라는 소개에 이 절에서 강사소임을 보고 있다는 인산(印山) 스님이 직접 사리친견을 안내한다. “사리탑에 참배하면 죄가 소멸되고 지혜가 늘어나는 등 80여 가지의 좋은 일이 생겨나 참배행렬이 이어지고 있다”며, “보는 사람들의 신심이나 근기에 따라 사리의 색깔이 각각 다르게 보인다”고 설명한다. 이 절의 사리를 친견하는 공덕이 3천년 만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를 보는 것보다 더 크며, 자신이 순례단에게 최고의 배려를 하고 있다며 너스레를 푼다. 중국인 특유의 ‘오버’는 출·재가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사리친견을 마친 후 이 절에서 수행했을 여러 선사의 자취를 찾아 도량을 살핀다. 개산당(開山堂)에는 역대 주지들의 얼굴과 행장을 소개한 석판이 있고, 그 가운데 대혜종고의 석판도 포함되어 있다.

선방 입구에 걸린 조인중광 현액크게보기

아무래도 이곳 아육왕사의 핵심은 선당(禪堂)일 것이다. 선당으로 들어가는 건물 입구에 대문이 반쯤 열려 있는데, 양 기둥에 조고화두(照顧話頭 화두를 비추어 보라)와 염불시수(念佛是誰 염불하는 자 누구인가)라는 글귀가 주련처럼 걸려 있다. 간화선 도량에 ‘염불자수’라는 화두가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불교에서도 선과 염불이 공존했음을 알 수 있다.

여행자는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이 걸려 있지만, 남송대의 선방 모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을 것이라는 민족사 윤창화 사장님의 설명을 듣고는 들어가 보지 않을 수가 없어,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禪이라는 글씨가 크게 붙어 있는 선당 안은 대낮인데도 어둠 컴컴했다. 선방 출입문의 옆에 수행자의 일과를 적은 표가 붙어 있다. 출입문 위로는 조인중광(祖印重光)이라고 쓴 현액이 붙어 있는데, 역대 조사들의 법인이 거듭거듭 빛을 발하라는 뜻일 게다. 생사문제를 해결한 선지식이 거듭 태어나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라는 엄중한 의미다.

선방에서 정진 중인 중국 선납자.크게보기

조심스럽게 선방으로 들어섰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선방 한 가운데에 승상(스님 모양)의 문수상이 모셔져 있고, 방의 사방 둘레로 좌선을 하는 툇마루 모양의 좌선대가 설치되어 있다. 전형적인 남송시대의 선방 구조란다. 마침 3명의 납자들이 좌선 중이다. 출입은 물론 촬영이 허락되지 않았고, 더구나 플래시를 터트릴 수 없는 터라 마치 도둑고양처럼 몰래 셔터를 눌렀다.

대혜종고의 간화선법이 온전히 전해지고 있지는 않겠으나, 그래도 찌는 더위에 선방에 앉아 무엇인가를 참구하는 3명의 선사들이 있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좌선의 자세도 조금은 엉성하고, 우리나라 선승들처럼 꼿꼿하게 등을 펴고 선정인(禪定印)을 한 채 미동도 않는 엄격함은 보이지 않았으나, 이른바 대평천국의 난과 문화대혁명 등으로 인해 철저하게 파괴된 중국불교의 소프트웨어가 미약하나마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현장이란 생각에 애틋한 감동이 밀려온다.

<협찬; 터널공사 전문업체 <strong>표준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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