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연재 > 일본불교의 뿌리를 찾아

열도의 구법승들이 빈번히 오갔을<br>원력 깃든 영파에서 '도겐'을 보다

절강성=이학종 | urubella@naver.com | 2010-07-06 (화) 11:00

중국에서 불교를 전해 받은 한국이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은 삼국시대 초기의 일일 뿐이다. 당송(唐宋)대를 거치면서 일본불교는 중국불교와 직접 거래를 했다. 특히 송대(宋代)에는 일본승려가 한국을 거쳐 중국과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한국불교가 일본불교에 대해 갖는 막연한 우월감이 별 근거가 없는 자만에 가깝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국과 일본의 불교는 공히 어머니와 같은 중국불교와 직접 교류하면서 수행 및 교학적 자양분을 축적해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많은 부분에서 한국불교에 앞서나가고 있는 일본불교를 선입견 없이 대하고, 나아가 공부하는 진지하고 겸손한 자세가 절실하다. 언제까지 편견을 갖고 일본불교를 바라볼 것인가.

그런데 일본불교에 대해 한국불교계가 편견을 갖고 있다는 것조차 정확하다고 말할 수 없다. 편견이란 그래도 일정한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솔직히 한국불교계의 일본불교에 대한 이해는 전반적으로 무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동국대 김호성 교수가 이끌고 있는 제8차 일본불교사 강좌기행 ‘중국에 유학한 일본스님들의 발자취 순례’에 동참해 지난 7월 1일부터 4일까지 4일간 느낀 기자의 소감은 대개 이렇다. 이런 반성적 입장 아래에서 이 순례기를 읽을 때, 비로소 공감이 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기행이라 해도 좋고, 순례라고 해도 좋을, 항주를 중심으로 한 불교기행에 들어가기에 앞서 장황하게 서론을 늘어놓은 연유다.

중국에 유학하여 불교를 공부하고, 도를 이루어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법륜을 굴린 스님들의 수나 끼친 영향은 광범위하다. 따라서 4일간의 순례일정은 부득이하게 절강성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도겐(道元) 스님 등 몇몇 대표적인 고승들의 자취를 찾는 것으로 한정할 수밖에 없다. 태풍이 오는 시절이라 보타락가산은 부득이 제외하였고, 영파항과 천동산, 아육왕산, 그리고 천태산, 항주서호 옆의 정자사(淨慈寺)를 돌아보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이곳은 일본 천태종의 사이쵸(最澄), 임제종의 에이사이(榮西)와 묘젠(明全), 그리고 조동종의 도겐스님 등이 유학하여 공부하고 마침내 도를 이룬 곳이거나 직간접적으로 깊은 연관이 있는 곳들이다.

중국에서 일본의 고승들의 발자취를 찾는 기행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어쩌면 한국불교 정서상 조금은 낯설고, 일면 흔쾌하지 않은 시도일 수도 있겠다. 또한 그 시도는 매우 무리하기도 하고, 애매모호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 일본을 보려니, 먼저 한국도 봐야하고, 중국 그 자체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 첫술에 배부른 일이 있으랴. 순례단 일행 26명은 일본스님들의 흔적을 중심으로 기행을 시작했다. 한중일 삼국의 불교 가운데, 한국불교에서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것이 일본불교이기 때문이다.

한국불교계에서 일본불교에 대한 연구는 일천하다. 김호성 교수가 7년 전 일본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개인적 차원의 연구를 해오다가 2년 전 일본불교사연구소를 발족시키기 전까지는 일본불교에 대한 연구는 백지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중일 3국을 관통하는 동아시아 불교에서 어느 한 나라의 불교연구가 배제된 불교연구는 절름발이일 수밖에 없다. 중국과 한국, 일본의 불교와 고승들의 행적을 고루 살펴볼 때 동아시아 불교에 대한 공부는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순례가 당위를 갖는 이유다.

이번 기행에는 김호성 교수 이외에도 선시분야의 최고권위자 석지현 스님과 불교학술출판의 독보적인 존재인 윤창화 민족사 사장, 동국대 불교대학장을 역임한 혜원스님 등 일본불교와 중국선종에 대해 평소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교계의 내로라하는 분들이 함께 했다. 한국불교학에서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일본불교 연구의 디딤돌을 놓으려는 마중물과 같은 분들이겠다. 그분들과의 4일은 그래서 행복했다. 섭씨 40도에 가까운, 게다가 습도까지 높아 불쾌지수까지 높은, 탈진 직전까지 간 순례 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1일 아침 일찍, 인천공항을 떠난 상하이행 비행기가 상해 푸동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경. 전형적인 아열대 기후로 인해 습기를 잔뜩 머금은 상하이의 날씨는 섭씨 30도를 웃돌고 있었다. 또한 지난 5월부터 오는 10월까지 열리는 엑스포 행사로 중국 제2도시 상하이는 하루 종일 교통체증에 시달린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에 외국인 300만 명을 포함한 총 7000만 명이 상하이로 모여든다니, 약간의 체증쯤이야 불평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엑스포가 한창 진행되는 7,8월이면 상하이의 경제규모가 일본의 도쿄를 넘어선다는 자부심으로 상하이는 들떠 있는 듯했다.

평일인데도 엑스포의 여파로 고가도로까지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상하이에 왔으니, 시내의 옥불사(玉佛寺)를 들러보기로 했다. 한·일의 불교와 큰 연관은 없으나 중국 제2도시이며 경제 제일도시인 상하이에 위치한 대표적인 불교사원이니 들려보기로 한 것이다.

몇 해 전 한 번 참배를 했던 절이라, 대략의 윤곽은 알고 있었으나, 상하이 시민들의 불심이 얼마나 더 견고해졌을까를 가늠해볼 좋은 기회일 수도 있겠다.

1882년에 창건된 이 사찰은 상해 10대 명소 중의 하나로 본래 선종(禪宗)의 명찰이라고 하나,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고 관광 사찰로 변모했다. 이 절은 원래 상하이 강만진(江灣鎭)에 있었던 것인데,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 당시 이곳으로 옮겨졌다. 신해혁명은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으로 쑨원을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탄생시킨 혁명을 일컫는다. 제1혁명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함으로써 2000년간 계속된 전제정치(專制政治)가 끝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하여 새로운 정치체제인 공화정치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옥불사 사원 안은 향을 한 무더기씩 피워 사방을 향해 합장 인사하고 향로에 꽂아 배례하는 사람들과 탁한 향연(香煙)으로 가득 찼다. 중국에서 불교인구가 갈수록 늘어난다고 하더니, 과연 그런 모양이다.

미얀마에서 건너온 옥불상 2구가 이 절의 자랑거리다. 하나는 석가모니 좌불상이고, 또 하나는 와불상이다. 백색 통옥으로 만들어진 두 불상은 이 절의 상징이자 존재의 이유다. 그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장쩌민 등 중국 정부의 고위 인사들이 들렀던 기록사진들이 곳곳에 걸려 있다. 중국공산당 치하에 있는 절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본보기들이다. 두 불상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와불상은 그 모형을 확대한 이미테이션 불상을 모셔놓고, 진본은 절 깊숙한 곳에 따로 모셔두고 있다.

불상 앞에서 순례단이 반야심경 합송을 하니 공무원쯤으로 보이는 관리자들이 신기한 듯 쳐다본다. 그 틈에 사진 몇 장을 플래시 없이 찍었다. 혹시라도 걸리면 ‘미안타’고 하면 되는 것이니, 그런 정도는 기자 생활 20여 년에 이골이 난 일이기도 하다. 이 절에는 두 옥불 이외에도 화려하게 채색된 사천왕상, 금색의 삼존대불, 미륵보살, 명나라 때에 조성한 목조 관음상 등이 있다,

관광사찰로 변모한 중국 대도시의 사원, 그렇더라도 해마다 늘어나는 불교신자와 비록 도교와 습합된 기복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매우 뜨거운 것으로 보이는 신심 등이 눈길을 끈다.

서둘러 옥불사를 둘러보고 영파(寧波·닝보, 여기서는 영파로 기록한다)시(市)로 향한다. 일단 외국으로 나가면, 그것이 순례이든 관광이든 늘 시간에 쫓기게 마련이다. 영파는 옛날 당송시대에 일본이나 한국으로 오가는 배들의 선착장이다. 영파에서 출발한 배는 주산열도에 있는 보타도(보타락가산, 관음성지)에서 머물렀다가 바람을 기다려 한국으로 가거나 일본으로 갔다. 의상 등 한국의 많은 스님들도 당진을 출발 이곳을 통해 중국에 들어왔다고 한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개경과 흑산도 영파를 잇는 뱃길로 사신과 물류가 오갔고, 영파에는 고려도관이라는 고려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다.

불법을 배워 일본불교를 화려하게 꽃 피운 도겐 스님이나 묘젠(明全)스님 등 일본 스님들도 이곳 영파항을 통해 중국에 왔고, 또 이곳에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영파란, 글자 그대로 파도가 잔잔하다는 뜻이다. 보타락가산이 위치해 있는 주산 군도가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천연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 항구가 생겨났을 것이다. 이곳은 절강성의 수도인 항주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약 55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순례일행은 서둘러 도겐 스님이 도착했다는 영파항의 기념비를 찾아 떠난다. 영파시 가운데로 ‘영즈’라고 불리는 한강처럼 큰 강이 흐르고, 그 옆으로 조성된 강하(江夏)공원 한 켠에 도겐 스님의 중국도착을 기념하는 ‘도겐선사입송기념비(道元禪師入宋紀念碑)’가 세워져 있다. 지난 1998년 조동종 영평사 종정이 세운 이 도겐 스님 기념비에는 ‘남송 가정 16년(1223) 4월 일본승 도겐 선사가 영파에 도착하여 아육왕사의 전좌스님을 만났고, 태백산(天童山의 다른 이름) 경덕선사에서 수학하고 득도하여, 일본으로 돌아가 영평사를 창건하고 조동종의 선맥을 퍼뜨렸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기념비의 내용처럼 1223년(嘉定 16년) 4월, 도겐 스님과 묘젠 스님이 영파항에 도착했다. 이때, 묘젠 스님은 영파에 있는 경복율사(景福律寺)로 갔으나, 도겐 스님은 상륙하지 못하고 무려 3개월 동안 배안에서 머물렀다. (김호성 교수는 그 이유를 계율문제로 추정한다. 당시 도겐은 구족계가 아닌 보살계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뽕나무 오디’를 구하러 온 아육왕사(阿育王寺)의 전좌(典座, 대중들의 공양을 담당하는 소임자) 스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도겐은 수행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관을 깨뜨리는 큰 깨우침을 얻는다. 이때의 경험은 도겐의 저술 ‘전좌교훈’에 전하고 있다. 도겐 스님은 이해 10월 고려의 승려 지현(智玄)과 경운(景雲)을 만나기도 했다.
산기슭 조그만 밭뙈기 하나
높은 대로 낮은 대로 발걸음에 맡기네
모나고 둥글고 곧고 굽은 길 가리고자 하는가
동서남북 그대로가 푸른 보리 물결이네.
山前一片閑田地 上下高低任草料
欲算方圓料曲直 東西南北一靑苗
<도겐의 시, ‘높은 대로 낮은 대로(仰山高處高平)’ 석지현 역. 「선시감상사전」 인용>.
이 시는 도겐 스님이 전좌와 만나 깨달은 것을 읊은 것이 아닐까. 대중들의 공양을 담당하는 ‘하찮은’ 소임의 전좌스님에게서 수행의 높고 낮음, 귀천이 없음을 도겐은 깨달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 때의 느낌은 절강성의 날씨처럼 습기 가득한 뜨거운 여름날 얼음우박을 맞는 청량한 충격이었을 것이리라.

그렇다면 도겐 스님은 어떤 분인가. 도겐 스님은 조동선맥(曹洞禪脈)을 일본에 전한 스님으로 묵조선(黙照禪)을 궁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도겐 스님의 간화(看話)와 묵조에 대한 견해는 매우 명쾌하다. 도겐 스님은 ‘간화하는 순간 부처’라는 입장을 견지했던 분이라고 김호성 교수는 설명한다. 김 교수에 따르면 ‘간화와 깨침은 이분법으로 나누면 그 순간 잘못’이다. 이 같은 도겐의 입장은 그의 저명한 저술 <정법안장>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한다. <정법안장>은 일본사람들에게 ‘열도가 가라앉을 때, 책 한 권을 들고 가라면, 정법안장’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상당수에 이를 정도로 소중히 여겨지는 책이다.

김 교수는 대혜종고(大慧宗杲) 스님이 간화를 주창한 것은 간화와 묵조의 대립적 개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묵조와 간화가 특별히 구분되지 않았던 당시 선 수행 흐름에서 간화를 보다 더 강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며, 대혜종고의 입장을 묵조에 대한 일방적 부정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도겐 스님의 선에 대한 이런 입장은 조동묵조와 대혜간화 사이의 회통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기도 하다.

어둠이 조금씩 영파에 드리울 무렵, 광활한 황해로 귀향하듯 밀려들어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8백여 년 전 대륙의 조동선맥이 일본을 향해 번져나가는 장면을 연상해본다. 도겐으로 인해, 중국에서는 이내 자취마저 흐려지고 만 묵조선맥이 저 광활한 바다 건너 일본 땅에서 거듭나 번성한 도도한 선류(禪流)의 기점에 서 있는 느낌이 자못 비감하다. <계속>

<협찬; 터널공사 전문업체 <strong>표준EC>



기사에 만족하셨습니까?
자발적 유료 독자에 동참해 주십시오.


이전   다음
Comments
© 미디어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