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종기자
urubella@naver.com 2013-10-01 (화) 12:51<논어>에서 공자가 가장 힘주어 강조하는 덕목은 ‘인(仁)’이다. 공자의 철학을 ‘인의 철학’이라고 하기도 한다. “군자가 인을 버리면 어찌 명성을 이룩하겠는가”, “지사와 인인(仁人)은 살기 위하여 인을 해치는 일은 없으며, 자신을 죽여 인을 이룩하기도 한다”는 등의 표현들은 공자가 얼마나 인을 지중하게 여겼는지 알게 한다.
인에 관한 정의는 한 마디로 정의되어 있지는 않다. 공자도 각각 경우에 따라 다르게 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어>에는 인 이외에도 여러 가지 덕목이 얘기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두드러지는 것이 공자가 실천, 또는 행동의 준칙으로 늘 내세운 ‘의(義)’라고 할 수 있다. 후세에 유가의 덕목으로 흔히 ‘인의(仁義)’를 붙여 말하는 습관까지 생긴 것은 ‘의’의 중요성을 반증해준다. 사람이란 우선 ‘인’해야 하지만, ‘인’을 세상에서 실천하는 준칙으로 ‘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공자는 악인이나 선인, 잘 모르는 사람이나 친한 사람의 구분도 없이, ‘인’하다 해서 아무나 위하고 도와주어서는 곤란하며, 올바로 판단하고 올바로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렇기에 공자는 ‘군자는 의를 가장 으뜸으로 삼는다(君子義以爲上-陽貨)’고 했다. ‘의’는 <중용>에서 ‘마땅함(宜)’으로 푼 것처럼 ‘합당한 인간 행동의 기준’에 해당된다. <순자(荀子)>는 ‘강국(强國)’편에서 “의라는 것은 사람들이 악한 짓과 간사한 짓을 하는 것을 금제(禁制)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밖에도 <논어>에는 ‘의로움을 보고도 행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라거나 ‘군자가 용기는 있고 의로움이 없으면 난동을 하게 되고, 소인이 용기는 있고 의로움이 없으면 도적질을 하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조계종 직할교구 선거인단 선출장면. 조계종 선거인단 320명의 선택에 한국불교의 명운이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거인단이 소소한 반연에 끄달리지 말고 한국불교의 희망을 선택해줄 것을 사부대중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
우리 불가(佛家)의 가르침도 유가(儒家)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생활에 적용하는 데 있어서 피부에 와 닿는 정도가 유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으나, 부처님의 방대한 가르침 가운데는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의 실천덕목들이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불교의 최고 덕목인 자비(慈悲)의 실천 덕목으로 육바라밀행이 거론된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여섯 가지 바라밀은 세상 어느 가르침과도 견줄 수 없는 무등등(無等等)의 실천 덕목들이다.
유가에서 군자가 반드시 갖춰야 할 ‘인’의 대표적 실천 덕목으로 ‘의’를 제시하고 있다면, 우리 불가(대승)에서는 참 불자가 반드시 갖춰야 할 자비의 실천덕목으로 ‘육바라밀행’을 제시하고 있다.
유가에서는 ‘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은 물론 가족과 친지의 목숨까지 내거는 ‘용기’를 보여준 지사들이 적지 않다. 3족을 멸하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감수하면서도 임금 앞에 나서 당당하게 간언을 하거나 직언을 하는 신료들과 사대부들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심심치 않게 보아왔다. 대의명분을 위해 그야 말로 모든 것을 거는 선비들의 용기가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한국불교사에서는 이런 장면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한국불교사에서 순교의 역사를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차돈 성사의 불교공인을 위한 순교, 그리고 최근 4대강 반대를 외치며 소신공양을 한 문수스님 외에 ‘자비’의 구현을 위해 위대한 바라밀행을 감행한 선지식이 또 있는지, 과문한 탓이겠지만 기자는 잘 모르겠다.
물론 그런 사례가 많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아갔던 다수의 대중들의 의식이 성성하게 살아 있었다면, 올바른 현실 의식과 준엄한 역사인식을 갖추고 당시의 상황에 맞는 자비의 실천덕목에 천착했었다면 개인적인 희생은 요구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반야에 바탕한, 살아 있는 현실인식과 역사인식을 갖춘 불제자가 얼마나 많은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다 알다시피, 2013년 10월 초, 한국불교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다. 가물거리는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다시금 회생시켜 이어 갈 수 있느냐의 가름대에 서 있는 것이다. 10월 10일,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하는가에 따라 한국불교는 쇠망과 희망이 엇갈리게 될 것이다.
이 같은 현실 인식에 동의하는 불자들이 상당수에 이르고 있는 것을 확인할 때면 솔직히 안도가 되기도 한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처럼 선거의 결과는 민심을 반영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불교의 명운을 가를 이 중대한 선택권이 불과 320명 선거인단의 손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 선거인단 스님들에게 간곡하게 당부 드리고자 한다. 10월 10일, 스님의 선택이 한국불교사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인지를 숙고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차돈 성사나 문수스님과 같은 위법망구의 결단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의명분의 관철을 위해 임금 앞에 나서 삼족이 멸하는 것을 무릅쓰고 간언을 하는 용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합당한 인간행동의 기준’에서는 벗어나지는 말아달라는 것이다.
문중 또는 계파로 얽힌 이해관계나, 부당한 거래가 설사 있었더라도 그런 관계에 끄달리거나 얽매이지 말고, 한국불교가 현재 처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의거한 선택을 과감하게 해달라는 간청을 드리고자 한다.
크게보기‘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한 때 유행했던 광고 카피가 떠오른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불교는 ‘10년을 좌우하는 선택’을 논할 만큼 한가하지 못하다. 인구와 경제·문화적 역량이 집중된 수도권에서 제3의 종교로 밀려난 지 이미 오래고, 불교의 텃밭이라는 대구와 부산 등 영남지방에서도 그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솔직히 부인하기 어렵다. 수행의 빛은 바랬고, 전법의 의지는 실종됐지만, 이를 개선할 길은 요원하다.
이런 누란의 시기에 한국불교의 대표성을 상징하는 조계종의 수장에 갖가지 범계행위로 국민적 조롱을 받고 있거나 출가수행자로서의 최소한의 품격조차 갖추지 못한 후보가 선출된다면, 육바라밀의 여섯 가지 덕목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삶을 살아온 분이 뽑힌다면, 재가자들이 불자임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럽게 만드는 후보가 선택된다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난망(難望)하고 암담하다.
320명의 선거인단 스님들께 거듭 호소 드린다. 소소한 반연에 연연하지 마시고, 부모형제를 떠나 천인사(天人師)의 길로 나섰던 초심을 되살려 불조와 사부대중과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대장부(大丈夫)의 길을 선택하시라. 부디!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