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종기자
urubella@naver.com 2012-08-27 (월) 12:21
독신을 생명처럼 여기는 종단에 소속된 한 승려가 어느 날 몰래 결혼을 했고 5년 쯤 살다가 이혼을 했다. 더구나 공공기관이 발급한 결혼증명서에 이 승려는 자신의 직업을 ‘승려’가 아닌 ‘페인터’라고 적었다. (페인터란 ‘도장공(塗裝工)’이나 ‘화가’를 의미)
그리고 꽤 긴 시간이 지난 후 이 사실이, 결혼을 한 승려를 잘 아는 또 다른 승려에 의해 이 종단의 사정기관에 제소됐다. 그러나 문제의 승려에 대한 징계가 1년이 넘도록 이뤄지지 않았다. 제소를 한 승려가 두 차례 기자회견을 통해 관련사실을 폭로하고 신속한 조사와 처벌을 촉구했지만, 또 문제의 승려가 미국 영주권 취득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결혼증명서를 만들었다고 결혼사실을 시인했지만 종단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제소를 했던 승려는 무슨 이유에선지 돌연 심경변화를 일으켜 소송을 철회했고, 종단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소를 철회하고 폐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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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독신 종단 소속의 한 중진승려가 미국에서 결혼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장면. 미디어붓다 자료사진
이 사건이 ‘독신을 생명으로 여기는’ 종단에서 발생했다면 매우 심각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건은 독신을 생명으로 여겨야 마땅할 종단에서 최근에 빚어진 일이다. 지난 1960년대 결혼했다는 이유로 절에서 대처승들을 내쫒고 법원에서 절의 소유권을 인정받은 이 종단의 근간이 무너진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정치적 거래에 의해 종단의 근간을 무너뜨린 이 사건은 앞으로 종단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게 될 것이 뻔하다.
이 사건에 대한 이 종단의 납득하기 어려운 처리로 인해, 이제부터는 ‘은처’의 단계를 넘어서, 승려들이 법적으로 결혼을 하고 혼인신고를 하더라도 그럴만한 충분한 핑계거리가 있는 한 징계를 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결혼 사실을 종단 사정기관에서 인지했다고 하더라도 사실혼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하면, 사실혼인지의 여부를 종단이 입증해야 하므로 징계가 어려워진 것이다. 사실상 독신종단의 명분이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한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은 또 승려분한신고도 무색하게 만들 개연성이 크다. 승려분한신고라는 것은 일정한 기간 동안에 소속 승려가 수행자로 결격사유 없이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제도인데, 승려가 아닌 ‘페인터’로 일했다는 기록이 있는데도, 또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한 기록이 있는데도 이를 문제 삼지 않은 것은 향후 심각한 부메랑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문제의 판결이 난 지 한 달이 넘어도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한 원로나 율사, 입법기관(종회의원), 종단 소속 스님(승려단체 포함)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 줄기차게 자성과 쇄신을 외치는 사람들도 이 문제는 애써 비켜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성과 쇄신에서 이 보다 더 큰 문제는 찾기 어려울 텐 데도 말이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승려 도박사건보다 훨씬 더 큰 폭발력을 내재한 사건이다.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종단의 행정부와 사법부가 승려도박 사건보다 더 심각한 사건에 대해 스스로 눈을 가리고 입을 막은 결론을 내렸다. 종단의 집행부는 물론 구성원 전체가 입을 닫고 있다. 승려도박 사건 이후 종단을 쇄신하겠다고 종단의 집행부가 천명했지만, 종단의 근간을 뒤흔든 이 사건을 외면하는 한 어떤 쇄신안도 허울 좋은 퍼포먼스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요즘 불교계의 분위기는 바른 소리를 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여기에는 언론도 예외가 아니다. 자칫 어설프게 종단 집행부를 비판하면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 또한 종단을 비판해봐야 개선되는 것이 없으니, 가능한 맑고 아름다운 기사를 올려야 한다는 압력 아닌 압력도 현실적으로 상존한다. 솔직히 기자도 이 글을 써도 종단이 각성을 하거나 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기대는 접은 지 이미 오래다.
그럼에도 기자는, 꽤 오랜 기간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끝내 이 칼럼을 쓰고 있다. 그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독신종단의 붕괴로 이어질 지도 모를, 이 기막힌 현실을 목도했으면서도 당시에 활동했던 언론인으로서 비겁하게 비판의 의무를 회피했다는, 그러니까 훗날 스스로의 자기비판에서 벗어날 알량한 명분을 만들겠다는 값싼 자존심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