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이 글로 뭘 꼭 어떻게 해야 한다고 재촉하자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을 부추기려는 것도 아니고, 어떤 방향을 유도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또 설사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솔직히 칼럼 한 편이 불교계의 흐름을 바꾼다거나 안 하려고 하는 것을 하게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 줄 알면서도 이 글을 써야만 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갑갑하다.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유래 없이 정부권력에 온 불교계가 항변을 했던 그 간절한 원력이 결실도 얻지 못한 채 시들고 있는 듯한 조짐이 감지되는 데서 오는 답답함이다.

각설하고. 조선 초기로 올라가 보자. 당시의 상황은 어땠는가. 역사학자가 아닌 탓에 과문함을 비껴갈 수 없지만, 당시 주자학의 기세에 밀려 불교가 당했던 처참한 탄압과 치욕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고려시기 민중과 더불어 사는 삶을 외면하고, 왕실 또는 권력과 결탁한 채 민중의 의지처이기를 스스로 포기했던 불교이기에 나라가 바뀌면서 어느 정도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는 것이야 충분히 예상된 과보였지만, 너무도 맥없이 당했던 당시 불교계의 나약함은 참으로 한심한 것이었다. 당시 고작 나왔던 가장 눈에 띄는 주장이 아마 유불불이(儒佛不二)였던가.

조선초기 불교계가 보여준 나약함으로 인해 이후 500년간 당한 모욕과 수난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승려의 신분은 천민으로 추락했고, 도성출입도 못하는 더없이 딱한 신세가 됐다. 온갖 공역에 동원되어 산성이나 쌓는, 어쩌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도 별 죄도 되지 않는 말 그대로 노비의 삶을 살았다. 간혹 유생들이 절로 몰려오기라도 하면 온갖 수발을 들며 그네들의 음풍농월에 한 숨 짓던 시절이 이어졌다. 오죽하면 일본승려의 힘에 의해 도성출입이 허용되자 너나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겠는가.

조선조까지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 1981년 10·27법난 당시를 회고해 보자. 전국 사찰이 군홧발로 짓밟히고 수백 명의 스님들이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학대를 당해도 당시 대불련 정도를 빼놓고는 어느 불교조직 하나 성명조차 내지 못하는 치욕을 당했다. 스님들은 그렇다치더라도 이는 분명히 재가의 외호조직을 키우지 않았던 과보였다. 오히려 당시의 모습에는 불교 문외한들도 혀를 찼을 정도로 일부 정치승려들의 투서질 경쟁과 같은 분열상만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가.

당시 ‘우리 불교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며 어지간한 절마다 어린이법회를 조직하고 이른바 어린이부터 불자인재를 양성하려는 바람이 불었다. 무엇인가 한국불교가 달라지는 느낌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불교는 10·27의 치욕을 이내 망각해버리고 말았다. 채 5년도 버티지 못하고 각 사찰의 어린이 법회는 쓰나미처럼 해체되어 갔다. 뭐, 거기에는 당장 돈도 안 되고, 귀찮기만 하고, 게다가 시끄럽고, 이런 저런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법난의 교훈을 흐지부지 잊어버렸던 한국 불교는 법난 후 채 30년이 못되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주변으로 밀려나고, 급기야는 공무원들에 의해서까지 멸시를 당하는 과보를 톡톡히 받고 있다. 솔직히 일반 사회에서 자신의 종교가 불교임을 당당히 밝힐 수 있는 분야가 얼마나 있을까.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종교편향이 잇따르자, 한국불교계가 종교편향을 바로잡겠다며 칼을 빼 들었다. 사실 이를 지켜보면서도 늘 불안했다. 저 기세가 얼마나 갈까. 저리 가다가 어느 순간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푹 꺼져 버리면 아니한 만도 못할 텐데. 더구나 한 번도 권력에 당당히 맞서본 경험이 없는 한국불교가 아닌가. 이런 류의 걱정들이 몇몇 불자들 사이에 오가곤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뭉쳐진 불교계를 보면서, 그런 걱정들이 기우였지 싶었다. 총무원장 스님이 위법망구를 이야기하고, 사과하러 찾아온 경찰청장을 강경한 태도로 돌려보내고,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국불교 수뇌부가 예전과는 크게 달라졌구나’라는 생각을 조금씩 갖게 되었다. 공연한 기우를 한 것이 내심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래, 한국불교는 1700년 장구한 역사를 지닌 사실상의 민족종교가 아니던가 라는 자부심도 새록새록 솟았다.

그런데…, 오늘(18일) 아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범불교도대회를 중심에서 이끌었던 한 재가불자의 다급한 목소리에 왠지 불길한 느낌이 밀려왔다. “큰일 났다. 총무원 집행부 스님 중 일부가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민에게 밝힌 대구 범불교도대회가 이대로 가다가는 아무래도 어렵지 않겠나 싶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26일 열릴 교구본사주지회의에서 모든 것이 유야무야 될 가능성도 있다. 이대로 흐지부지 끝나면 불교는 정말로 어렵다.” 이런 내용이 그와 통화한 내용의 뼈대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아마도 추석연휴에 전방위적으로 펼쳐진 관계기관의 유력 스님들을 상대로 했다는 '각개전투'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둬들인 모양이다.

전화를 받고 나서 고민을 했다. 여기 저기 전화를 걸어 일부 총무원 부장급 인사와 영남지역 교구본사 주지 중 일부를 중심으로 미묘한 변화가 일고 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의 불교도대회를 이끌어가는 조직의 핵심구성원 가운데 대구에서의 범불교도대회를 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있음을 확인했으니, 이제 앞으로가 더 큰 일이 아닌가. 이제 종교편향이 더 마음놓고 이뤄질 것이 뻔한데 이를 어쩔 것인가. 만일 이런 의견이 몇몇 소수의 돌출된 견해가 아니라 의외로 다수의 속내라고 한다면, 정말 그런 것이었다면 어청수 경찰청장이 동화사로 찾아왔을 때 사과를 받아들였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끝내는 것이 좀 궁색해 보였더라도, 차라리 국민 앞에 공언했던 대회를 열지 않는 것보다야 시쳇말로 ‘덜 쪽 팔린’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총무원 관계자에게 확인한 결과는 아직 대구지역 범불교도대회가 취소됐거나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수준은 아니다. '아직까지 어떤 경로로도 대회 취소를 말한 바 없다', '대구대회는 예정대로 치러지게 될 것'이라는 공식적인 멘트가 있었지만 '모든 것은 9월 26일 '교구본사주지회의'에서 정해질 것 같다'는 첨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솔직히 감추기 어렵다.

현재 원리주의적 기독교관을 가진 이들이 주도하는 한국 개신교의 세력은 조선초의 주자학파들이 가졌던 힘보다 훨씬 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또 법난을 일으켰던 80년대 신군부의 총칼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정관계에 관심이 있는 이는 물론이고, 사업을 하거나 심지어 연예인들도 요즘 회자되는 대형교회 주변으로 몰려든다는 소식이고 보면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두렵고 암담할 뿐이다.

20만 불자들이 서울 한 복판에 모여 외쳤던 요구사항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종교편향에 대한 분명한 저지선을 확보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꼬리를 내리면 향후 이 땅에서의 불교의 처지는 조선초나 80년대초 보다도 더 혹독한 시련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혹시 벌어질 지도 모를 걱정스런 상황을 눈앞에 두고 있으려니, 향후 불교가 감내해야 할 지난한 여정이 끔찍하게 다가온다. 이 순간, 한 때 불국토였던 저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회교국가로 변하고, 그 땅에서의 불교는 오직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현장이 떠오르는 것은 지나친 오버인가.

조선초에 한국불교가 보였던, 또 법난 때 한국불교가 보였던 나약하고, 끈기 없고, 잠깐 고개를 들었는가 싶으면 이내 스러지는 처신의 재연으로는 한국불교의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다. ‘칼을 뽑았으면 모기라도 잡고 칼을 거둬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작금의 종교편향 사태에서 분기탱천했던 한국불교는 과연 모기를 잡았는가. 잡았다면 그 모기는 도대체 어떤 것인가. 잡은 그것이 과연 모기의 가치라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사부중의 합의를 있었는가.

이런 의문들이 바로 9월 26일 전국교구본사주지회의에서 어떤 결론이 내려질 지가 두렵게 다가오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