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佛家)에서는 연꽃에 처염상정(處染常淨)이란 의미를 부여한다. 오염된 곳에 자리하고 있으나 그 꽃과 잎은 언제나 맑다는 뜻이다. 희노애락(喜怒哀樂)과 고통(苦痛)으로 점철된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이고득락(離苦得樂)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뭇 중생의 본능, 간절한 희원(希願)을 상징하는 것으로 연꽃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연꽃이 ‘불교꽃’으로 정해진 이유다. 불교의 상징(象徵)으로 정해졌다는 이유로 문민정부 시절 수난을 당한 적도 있지만.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점은 연꽃이 아무리 오염된 못에서 자라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못에 설사 실낱같은 양이라도 맑은 물이 공급될 때 비로소 그 특성을 발현해낸다는 사실이다. 연(蓮)은 연못에 한 가닥 물줄기라도 흘러들지 않는다면 꽃을 피우지 않는다. 연꽃의 이 속성이 암시하는 ‘교훈’을 우리는 곰곰이 되새겨야만 한다. 국가든, 단체든, 가정이든, 또 사상이든, 철학이든, 종교든 어느 곳도 이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수(수구)세력이 발호하여 진보(개혁)세력이 멸절(滅絶)된다면, 또 반대의 경우가 발생한다면, 그런 국가나 집단은 쇠멸할 수밖에 없다. 리영희 교수의 ‘새는 좌우(左右)의 두 날개로 난다’는 가르침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요, 진리다.

최근 한나라당 일색으로 구성된 서울시 의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낯부끄러운 작태를 보자.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런 작태를 제어하거나 견제할 곳이 없다는 점이다. 실수로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제대로 선거를 하지 못한 탓이니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다. 예서 한술 더 떠 한나라당이 압도적 다수의 힘을 바탕으로 이른바 ‘의회독재(議會獨裁)’까지 추진 중이라는 보도다. 선거 단 한 번 잘못한 과보가 소름 돋게 두려운 독재의 암운(暗雲)이 되어 온 나라에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촛불이 켜졌는데 이 정도면, 촛불이 켜지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 의미에서 촛불은 2008년의 암울(暗鬱)한 우리나라에 한 줄기 희망이다. 고이고 썩어 곧 죽어갈 연못에 공급되는 한 가닥 물줄기 같은 존재다. 그 작지만 순수한 희망의 물줄기마저 부당하게 사용되는 공권력에 의해 가로막힌다면, 마치 물 공급이 막혀 썩어가는 못 속의 연(蓮)이 죽어가는 것처럼 나라는 쇠멸의 길로 달려갈 것이다.

솔직히 나는 꽤 오랫동안 한국불교도 물줄기 공급이 막혀 죽어가는 연못과 같다는 생각을 해왔다. ‘동반침몰의 순환고리’를 끊어낼 이렇다 할 방도를 찾지 못했기에 더욱 암담하게 불교의 현실이 다가왔다. 그런 심경을 이 칼럼란을 통해 공개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촛불정국에서 나타난 불교계의 역동적인 모습, 복잡한 정국에서 민심의 흐름을 읽어내는 혜안을 바라보며, 조금씩 생각이 바뀌고 있음을 느낀다. 잘 던지다가도 우루루 연타를 맞고 무너지곤 하는 박찬호 선수처럼 불안감이 아주 가신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 보지 못했던 정의로운 모습들은 한국불교 현실에 아직 희망의 물줄기가 남아 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조계종이 촛불시위의 원인제공자가 정부임을 당당히 지적하고, 절 안에 피신해 있는 수배자들을 범법자가 아닌 가정과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로 불러주고, 신성한 경내에서의 법집행을 단호히 반대하고, 원인제공자가 먼저 선처를 베풀라며 결자해지를 강조한 것은 다시 생각해보아도 믿기지 않을 만큼 지혜롭고 당당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눈처럼 냉정하지만 불처럼 뜨거울 줄도 알고, 사슴처럼 두려워할 줄도 알지만 사자처럼 용맹하기도 한 지혜를 갖춘 2008년 7월의 한국불교의 모습. 이런 경우는 아마도 처음 대하는 모습이 아닌가 한다. 부당한 권력보다는 정의로운 민초와 함께하는 불교, 부정한 방법으로 많은 것을 가진 자보다는 정의롭게 살다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자의 의지처이자 버팀목이 되는 불교, 모처럼 만나는 이 신선한 물줄기를 잘 살려내 고여 썩어가던 불교라는 이름의 못에, 또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못에 한 가득 연꽃을 피워내는 불교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