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지럽거나 도처에 실력자들이 나타나 각축을 벌이면 식자들은 흔히 춘추전국시대를 비유해 말하곤 한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춘추시대와 전국시대가 조금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춘추시대에는 제후들 간의 각축이 치열했다 해도 그 근저에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봉건적 가치 질서가 깔려 있었다. 즉 왕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대의명분 아래 패권을 잡은 제후들은 상대를 멸망시키기보다는 공존하면서 나라를 운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이런 대의명분보다는 오직 먹고 먹히는 생존의 싸움만이 남게 되었다. 전국시대 이전에는 상대방이 항복하고 패자로서 인정을 하면 그것으로 전투가 끝났다. 상대의 나라를 멸망에 이르도록 해 제사를 단절시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전국시대가 열리면서 이런 명분은 사라지게 되었다.

명(明) 말의 학자인 고염무는 자신의 저서 『일지록(日知錄)』에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차이를 이렇게 논하고 있다.

이 차이는, 전국시대에 접어들어 나라 사이의 관계가 오직 힘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춘추시대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일종의 원칙이나 예의, 배려, 신의가 오직 힘에 의해 자웅을 겨루는 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사라졌음을 고염무는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작금의 조계종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 춘추시대와 전국시대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마치 조계종을 휩싸고 있는 봉건적 구조가, 또 금력을 바탕으로 활개하는 토호들의 정치 세력화가 공공연하게 펼쳐지고 있는 현상이 저 옛날 중국의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있는 듯한 암울함으로 다가오고 있다면 과민일까.

법(法)을 생명보다 더 고귀한 가치로 여겨야 하고, 법통(法統)을 다른 어떤 것보다 잘 보전해야 하며, 각 문중의 가풍을 소중하게 가꿔나가야 하고, 또 서로 존중하고 신뢰해야 한다는 절집의 아름다운 관행은, 어렵다면 형식적으로라도 내보여야 할 가치들이다. 그런데도 어찌 종단의 형국이 이렇게 전국시대의 상황을 닮아가고 있는지, 서글픈 일이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조계종 내부의 갈등은 어느 정도 예상된 것이기는 하다. 법, 법통, 가풍이 아닌 세력과 금력, 각자의 이해관계에 의해 결집된 세력들이 종단권력을 획득하고 난 다음에 일어난 예정된 현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원장은 없고 부장만 보인다’는 우려의 수준에서 시작된 갈등은 직영사찰 지정이라는 종무행정 조치로 인해 자칫 종단분규를 초래할지도 모를 위기를 향해 치닫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계종 중앙종회를 중심으로 짜인 각 계파(일종의 정당)의 연횡에 의해 선출되고 구성된 현 총무원 집행부에서 총무원장의 목소리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상된 바였지만, 그로 인한 혼란이 예상보다는 빨리 다가오는 것 같다.

“봉은사 신도들과의 소통 없이 결정된 직영사찰 전환은 받아들일 수 없다. 다음 주까지(3월 20일) 총무원에서 납득할 만한 설명과 답변이 없을 시 전국사찰과 전 신도들을 대상으로 봉은사 직영사찰 전환 폐지 운동을 전개하겠다. 폭력적인 방법으로 봉은사를 점령하고자 한다면 목숨을 바치겠다. 총무원장이 겁에 질려 봉은사 직영사찰 전환을 포기하도록 만들자.”

지난 3월 11일 제183회 조계종 중앙종회를 통과한 ‘봉은사 직영사찰 전환 지정 승인의 건’에 대한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의 공개적인 반발이 사흘 후인 14일 봉은사 일요법회에서 나왔다. 그토록 소통을 강조했으면서도 소통 없이 직영사찰 지정이란 무리수를 둔 총무원집행부에 일단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력과 힘을 믿고, 또 총무원집행부의 행정력을 믿고 밀어붙이다보니 이런 반발을 자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명진 스님의 강력한 대응 공표에 따라 조계종은 98년 분규사태 이후 안정된 종단분위기가 깨질 수도 있는 최대 고비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종단이 현직 총무원장의 의지와 다르게 운영되는 기형적 시스템임을 암시하는 부분이 이번 직영사찰 지정과정에서 세간에 드러남으로써 총무원장의 위상도 심각하게 추락될 위기에 놓였다.

총무원의 입장에서는 직영사찰 지정을 강행하자니 봉은사의 반발이 적잖이 부담스러울 것이고, 후퇴하자니 집행부의 영이 무너지게 돼 곤혹스러울 것이다. 이도저도 다 부담스러울 것이니 진퇴유곡의 형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필 이런 파열음이 법정 스님이 열반에 들면서 ‘무소유’의 가치가 한창 선양되고 있는 시기에 나왔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더욱 크다. 성철 종정의 열반이 부른 국민적 감동의 물결을 94년 종단분규사태로 급랭시켰던 전철을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총무원장은 이번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정치력을 보여야 할 것이다. 완승을 거두려하지 말 것이며, 종단운영에 종단 앞팎을 불문하고 외부 세력의 입김을 배제하고 총무원장 자신의 책임과 권한을 더욱 강화해야 것이다. 총무원장의 자리에 있는 한, 어떤 결정도 결국 총무원장의 책임이라는 점을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