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08 (월) 17:23
번뇌를 떨치고 천상계로
속물 냄새를 지니고는 천상계에 오를 수 없다. 세 번째 문을 통과해 3층으로 올라가면 눈앞에 가파른 계단이 나오고 우뚝 솟은 탑이 보인다. 멀리서 보았을 때 멋지다고 입을 벌렸던 그 탑이다. 그 탑의 심장이 지성소(至聖所)다. 예까지 와서 어찌 오르지 않으랴.
그러나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곳에 오를 수 없다. 경사 70도, 길이 30여 미터, 돌계단의 넓이 20센티미터 정도. 이건 계단이 아니다. 발을 바로 디딜 수도 없는 것이 어찌 계단이란 말인가. 거미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빳빳이 서서 올라갈 수 있으랴.
중앙사원의 천상계는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라 신을 위한 공간이었다. 왕과 승려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 미물이나 인간은 범접할 수 없는 곳이라는 의미로 이렇게 가파른 계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세월이 좋아져서 신도 왕도 아닌 것들이 암벽등반 하듯이 기어오른다. 잠시 전 권유했던 음주 행위를 취소해야겠다. 오르다가 굴러 떨어지면 그대로 열반에 드시리니. 이 나라에는 아직 119구조대가 없다. 동행한 딸애는 다람쥐처럼 잘도 올라간다. 다람쥐와 거미와 아이들에겐 아상과 번뇌가 없는가보다.
비밀 아닌 비밀을 하나 말해야겠다. 사방을 빙 돌아보면, 친절한 프랑스 사람들이 시멘트로 계단을 보강하고 손잡이 쇠막대기를 설치해놓은 곳이 있다. 남쪽 중앙계단이다. 그것을 부여잡고 오르면 위험이 덜하다. 미관을 해치는 것과 안전을 도모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할지 고민은 했으리라.
정상 혹은 천상계에 오르다
다섯 개의 연꽃 모양 탑이 세월을 잊고 서 있다.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 중앙신전이다. 지상에서 60미터, 엄숙한 분위기가 감돈다. 경망스런 방문객들도 걸음걸이가 조심스럽다. 사원의 중심이자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수미산)을 상징한다. 절대자가 거주하는 곳에 무례한 나그네가 섰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우주를 이해하는 종족의 후예들이 그토록 잔혹한 살육을 저지르다니. 크메르인들이 미워진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미워진다. 하기야 왜곡된 이데올로기가 인간들끼리 지지고 볶고 죽이는 최대의 명분이자 무기가 아닌가.
신전의 내부 바닥에는 수직으로 된 함정이 있었다. 15세기 중반 마지막 왕조(포니아 얏)가 피난을 가면서 함정 속에 보물을 모두 넣고 견고하게 메웠다. 500년이 지난 후 프랑스 건축가들이 막혀있던 바닥의 함정을 발견하고 27미터를 파내자 바닥에서 금붙이들이 와르르 나왔다고 한다.
지금은 물 빠진 수영장처럼 푸른 이끼만 자욱하다. 지성소에는 동서남북 네 군데 방이 있다. 방안에는 석불, 철불 등이 낯선 방문객처럼 어색하게 안치되어 있다. 어깨에 두른 노란 천의 가사마저 어색하게 느껴진다. 앙코르 왓은 본래 힌두교 사원이었지만 15세기 이후 불교화의 바람이 불어 불교 사원이 되었다. 불상들은 애초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 후대에 여기저기에서 무계획적으로 옮겨온 것이다. 불상 앞에는 향불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다.
천상계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숨바꼭질
그때 놀라운 정경이 보인다. 스님이 꾀죄죄한 꼬마 두 녀석을 두들겨 패고 있다. 콧물 눈물이 얼굴에 번지르르한 꼬마들이 살려달라고 울부짖는다. 머리통을 쥐어박으며 내려가라고 호통을 친다. 스님의 손에서 벗어난 꼬마들이 잽싸게 달아나 건너편 기둥 뒤에 숨는다. 애원하는 눈빛이 금방 생글거림으로 바뀐다. 아무래도 내려갈 기미가 아니다. 천상계가 좋은가보다. 불전함의 돈을 훔치는 놈들이다. 천상계에 상주하며 매일 스님과 숨바꼭질하는 놈들인 것 같다. 스님은 씩씩거리며 뒤편으로 사라진다.
오를 곳이 없으니 내려다보는 수밖에. 돌 창문에 기대어 앙코르 왓을 조망한다. 구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천재가 만든 크메르 건축예술의 극치라고 하는 경관이 펼쳐져 있다. 천재는 누구인가. 인간과 우주를 종이 한 장에 압축한 만다라다.
‘친구여, 앙코르로 가라’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그 이름, 앙코르 왓!
외巍외巍 석釋가迦불佛 무無량量무無변邊 공功득德을 겁劫겁劫에 어느 다 사뢰리
(높고 큰 석가모니 부처님의 그지없는 공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월인천강지곡 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