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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헛하고 우울한 오뉴월 삼제(三題)

윤남진 | stupa21@hanmail.net | 2011-03-17 (목) 01:01

1.
이 글을 쓸까 말까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을 드러내고 세상의 판결을 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몇 자 적습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조계종 본말사주지연수에 강의를 요청받았습니다. 강의 내용은 주지스님들께 시민사회단체(NGO)에 대한 이해, 지역사회에서의 시민사회활동을 통한 사찰의 역할 제고 방법론, 주지스님 개인의 브랜드(이미지 제고) 전략, 종교자유와 인권운동을 통한 불교의 보호방법 등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어느 종회의원(중앙종회 사무처장, 초선의원)께서 일부 강사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니 강의를 접어주었으면 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주최측의 시대적 감각이나 그분들의 선량한 뜻으로 강의의 기회를 얻었기에 공연히 마음고생 하실 것 같아 선선히 강의를 포기 했습니다. 그러나 착잡한 마음은 그대로 남습니다. 더군다나 그 문제제기한 분이 불교역사에서 크나큰 족적을 남긴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주요 활동가 출신이었다는 것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지난 해 강의에서 가장 많은 스님들이 이 주제를 신청해 들으셨고, 강의 평가도 호감으로 분류되지 않았던 것으로 아는데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였습니다. 문제의 강사는 박광서 교수(종교자유정책연구원 대표)와 저(교단자정센터 정책위원장)였습니다. 이유를 간추리면 승가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강의하는 것은 스님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진작부터 일부 스님들이 ‘박광서 교수는 불교를 망하게 하려고 천주교에서 침투시킨 사람’이라는 소문을 낸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 유일한 증거는 ‘천주교 배경의 종교사학인 서강대학교에 있는 교수가 어떻게 저렇게 기독교를 깎아내리는 활동에 열심이고도 잘리지 않느냐? 봐라, 불교에 무슨 문제가 있을 때마다 박광서가 그 자리에 있지 않느냐?’하는 것이 그 요체입니다. 마치 ‘촛불집회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움직이는 배후세력’에 대해 논하는 것 같습니다.

잘 모르는 분들이 박광서 대표에 대해 그렇게 의심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대신 말씀드립니다. 박대표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 졸업까지 ‘룸비니’에서 불교활동을 하였고, 청담스님으로부터 수계와 법명을 받았으며, 입적하신 숭산스님께 출가할 결심을 말씀드렸다가 재가자로 할 일이 많다고 만류하시어 그분의 이른바 유발상좌가 되었고, 미국 유학 중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하다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즈음에는 교회나 성당은 있는데 사찰이 한 개도 없던 보스톤 지역에 스님을 모시고 법회를 시작하고 사찰건립을 위해 모금운동을 앞장섰던 분입니다. 서강대학교가 천주교 학교라는 것을 알기에 이력서도 내지 않았으나(오히려 동국대에는 이력서를 냈었다고 함), 다른 대학 교수들의 추천으로 서강대에서 먼저 연락이 와 교수직을 승낙하였고, 현재 서강대에서 매우 필요로 하는 물리학자이자 학생들에게 인기 ‘짱’인 교수 중 한 명으로 교내 TV방송에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최근 수 년 간은 우리 사회에서 불자로서 사는 게 얼마나 부당한 경우가 많은지 걱정하며 종교의 권력화를 막고 종교인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광고등학교 강의석 군의 학내종교자유 법정투쟁을 강력히 후견하고 있는 분입니다.

일부 스님들이나 종단에 쓴 소리를 하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고, 교단자정활동의 방식에 대한 견해가 다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독실한 불자의 양심까지 재단하는 것은 참으로 씁쓸한 일입니다.

저는 바랍니다. NGO에 대한 이해와 접근은 우리시대를 사는 지도자들에게는 꼭 필요한 교육입니다. 그러니 불교신자로 알려진 박원순 변호사(봉은사 미래위원회 위원장,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같은 분이라도 그런 주제의 강의에 대신해서 초청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비공식적인 종회의원 개인의 문제제기로 주지스님들에게 필요한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더불어 문제를 제기하신 스님께도 바랍니다. 강사진에 문제가 있다면 중앙종회의 교육분과위원회 같은 공식 시스템을 통해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합당할 것이며, 개인적으로 압박감을 주는 행위는 멀리 보면 종단에 해가 될 것입니다. 더불어 초선의원으로서 계파정치의 한축에 서지 않았더라면 그 비판의 순수성도 의심받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에 대해서도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서울고등법원장 출신인 재가연대 상임대표(이분은 탄허스님의 유발상좌라는 것도 밝혀둬야 겠네요)를 비롯한 여러 불교지도자들이 모이면 늘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사회지도층들의 모임에서 불자라고 밝히는 것을 주저해야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불교의 사회적 리더십이 어떻게 될까 하고 말입니다. 선가에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가, 내가 서있는 그곳의 소식이 어떤지 잘 살펴야 하겠습니다.

2.
지난주부터 왠지 마음이 우울해지기 시작하여 왜 그런지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심드렁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귀가 길에 흥에 취해 ‘아~ 으악새 슬피우니’로 시작하는 ‘짝사랑’이란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그 이유를 알아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제(29일)는 퇴근길에 용미리 집으로 향하는 703번 버스를 타지 않고, 지금은 3자 하나를 덤으로 받아 ‘333번’이 된 영장리 보광사행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연우지석(戀友之石)’_벗을 연모하는 비석이 보광사 들머리에 세워져 있어 그곳에 한번 들러 볼 심사가 났습니다. 94년 종단개혁을 이루고 첫 부처님오신날을 보내고서는 홀연히 세상을 뜬 종태스님을 기리는 비석입니다. 종태스님(전국불교운동연합 집행위원장, 개혁회의 사회복지분과 위원)이 생전에 그 황소같이 큰 눈을 꿈벅이며 유장하게 불렀다던 노래가 바로 ‘짝사랑’이랍니다.

이제 보광사가 생전 도반들이 지키던 근본도량도 아니어서, 비석 주변은 누가 살피기라도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헛헛한 마음을 달래고자 깜깜해진 밤길을 걸어 올랐습니다. 가는 길에는 구멍가게 하나가 없어서 마침 불이 켜져 있던 식당에 들어가 페트병에 담아 파는 동동주를 한 통 사고, 김치 쪼가리라도 담아 달라하여 들고는 털렁털렁 걸었습니다. 시비 주변은 부처님오신날이 지나고 이어져 내린 비에 풀이 잔뜩 올라 우거져있습니다. 사들고 간 막걸리를 비석 주변에 뿌리고 종이컵에 한잔 가득 잔을 쳐서 올려놓고는 저도 한잔 따라 마셨습니다. 비석에 앉아 캄캄한 밤에 술 한 잔 하고 있자니 처량한 마음이 일어 이내 눈물이 볼을 타고 내립니다.

동지는 간데없고 낡은 깃발만 맥없이 나부낍니다. 개혁이란 게, 알량한 자리라는 게, 권력이란 게, 또 명예나 자존심이란 게, 아니 무엇을 하겠다는 것 그 자체가 다 그런 것이겠지요. 결국은 녹음방초에 묻혀 잊어질 일입니다. 이번 주말에는 낫을 퍼렇게 갈아들고 다시 들러야 하겠습니다. 게을러진 몸으로는 풀을 뽑을 자신이 없으니 베는 도리밖에 더 있겠습니까! (엊그제 토요일 착한 후배와 함께 시원하게 베어냈습니다.)

3.
사실 저는 촛불집회에 시민사회활동가로서 한번 나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후배활동가들이 이야기 하면, ‘난, 한 번 더 걸리면 삼진아웃이야. 안 나갈 거야’하고 농담처럼 받아넘기곤 했습니다. 지난 민주화운동 시기에 이미 두 번 투옥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오히려 일반시민들보다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것이 사실이고, 자칫해서 예의 그 ‘치밀한 배후세력’의 증거로 지목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자격지심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닭장차로 끌려들어가 홀홀단신 수많은 특공요원들에 둘러싸여 집단폭행을 당하던 옛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대공분실로 잡혀가, 동시에 기획 체포된 후배들의 강압된 허위자술서를 앞에 두고 삶을 고민해야 했던 기억도 진저리쳐지는 일입니다.

아니, 이런 모든 개인적 악몽을 떠나 우리 역사가 뒷걸음질 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 후배들과 자녀들의 세상에 대해 떠올릴 때 불안과 아픔은 더해 갑니다. 설마 그런 시대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겠지요. 다만 하늘이 우리에게 역사의 뒷걸음질을 막는 대가로 제발 선량한 한국의 시민들에게 희생제의를 요구하지나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불교운동에서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통합과 상생의 실천적 방법론을 제시하고 미래지향적으로 이끌 리더십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꿈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다양성의 통일 _ 서로 다른 견해와 입장을 대화와 토론, 대중공사를 통해 통합하고 그 결과에 다소 불만족하더라도 함께 힘을 모으는 것,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 아닐지라도 가장 안전한 길이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 작업을 누군가 안목 있는 선지식들께서 연구하고 가다듬어 주신다면 좋겠다는 바램도 가져봅니다. 이제 과거를 팔아 현재를 살아서는 안 되겠지요? 현재_변화된 그 자리에서 희망을 일구고 미래를 개척해 가고자 하는 도전의식과 용기,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것에 대한 사명감에 더욱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제 지난 21년 전 격동의 시대를 현장에서 경험한 이들이 부모가 되었고, 그 자녀들은 10대이거나 20대일 겁니다. 자녀들의 평균 숫자는 1.5인 미만으로 귀한 자식일 것이고, 대부분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교육열도 당연히 높을 것이며, 거대 담론에서는 비정치적인 성향이 있지만 생활세계의 문제에는 매우 능동적인 의식을 가진 시민들일 것입니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향유하면서도, 시대의 빛과 그늘을 모두 경험하고 있는 이들 세대와 그 자녀들이 앞으로 우리 사회를 어떤 문화로 이끌어 갈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 단초가 속속 드러날 것입니다.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 낸다’고 합니다. (뒷 물결에 하는 수 없이 밀려갈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바다가 되는 길을 열어갈 수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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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행복경 2011-04-01 12: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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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평소 하도 딱딱하고 재미가 없어서 보다 말곤 했는디 아 글씨 어디선가 책을 소개하는 서평을 보았는디 말이여 책보다 더 어렵게 써놔서 당최 책을 사볼 맘이 안 나더라고요... 오늘 글은 좋소~ 기냥 읽기가 편하고 평소 무장을 내려놓은 듯 해서 호감도 가네요.
바다길 2011-04-07 17: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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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 몇년전 글인데도 좋네요~~ 호감 한표
개선문 2011-04-29 1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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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선우의 글을 접하니 옛일이 새록새록 내 몸을 감싸 오네요.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다고 아니겠지. 그냥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겠지. 지난 날 조계사 뒷골목의 막걸리 한사발의 통음이 헛되지 않게 조만 간에 해후 한번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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