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03 (금) 15:53
문; 불구부정은 부증불감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더러움과 깨끗함이 당장 우리 눈앞에 보이는데, 불구부정이라니,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
답; 불구부정(不垢不淨)이나 부증불감은 모두 반야심경(般若心經)의 한 구절입니다. 즉 반야심경에서는 일체 존재의 공(空)한 모습은 불생불멸이며, 불구부정하고 또한 부증불감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지요.
불구부정을 직역하면,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더럽고 깨끗한 것이 있기 마련인데 왜 그렇지 않다고 하느냐고 궁금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더럽다, 깨끗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비교에서 오는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 어느 쪽이든지 한 가지 개념이었다면 그러한 분별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단 하루라도 밥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그 밥이 옷에 붙어 있다면 당장 지저분하고 더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김치와 된장찌개에 밥알이 들어 있으면 또 어떤가요? 그것도 역시 더럽다고 화를 내게 됩니다. 그런데도 바로 그 사람이 비빔밥은 태연하게 먹습니다. 도대체 이것은 무슨 도리일까요?
결국 밥 그 자체에 어떠한 구별(더럽고 깨끗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의 분별에 차별이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비근한 예를 들어볼까요. 꿀단지와 요강단지는 외견상으로 상당히 비슷하다. 하나의 항아리에다 꿀을 담으면 꿀단지가 되고, 거기에다 소변을 보면 요강단지가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만약 단지를 하나 사 와서 처음에는 요강단지로 사용을 하다가 이것을 깨끗이 씻고서 다시 더운 물로 소독한 후에, 꿀을 담아 놓고 먹으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그 꿀을 먹을 수 있을까요? 항아리가 사기그릇이니 내부로 소변이 스며들 리도 없고 또한 소독을 했으니 위생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그릇이 요강단지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도저히 그 꿀을 꿀맛으로 제대로 느끼기 힘든 것이지요. 그러나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주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결국 더러움과 깨끗함, 그 어느 쪽도 오로지 우리의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여실히 입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항아리 그 자체는 공의 입장으로 구(垢, 더러움)와 정(淨, 깨끗함)을 초월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마음이 그것을 구분하고 차별하며 구애받고 있을 뿐인 것이지요. 즉 스스로가 구별하고 분별함으로써 오히려 구속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