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의 영어몰입교육 정책이 국민들의 강력한 반발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영어몰입교육 정책을 입안한 사람들의 계획은 아직 취소되지 않은 것 같다. 촛불문화제의 와중에서 사람들은 영어몰입교육의 어불성설을 다소 잊고 있지만, 언제 또 다시 초ㆍ중등학교의 영어몰입교육이 논의될 지 불안하기만 하다. 역사적으로 한자몰입교육과 일본어몰입교육을 수십, 혹은 수백 년 동안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영어몰입교육이 논의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언어는 단순한 대화의 수단이 아니다. 한글을 포함한 다양한 언어들은 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나라나 집단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경험의 지식체계다. 따라서 영어에는 영어의 지식체계가 존재하고, 불어에는 불어의 지식체계가 존재하며, 한글에는 한글의 지식체계가 존재한다. 그러한 언어의 지식체계가 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화를 가능하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언어공동체가 지니고 있었던 지식체계를 습득하도록 만들고 새로운 지식체계를 창조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조선시대의 한자몰입교육은 대체로 조선시대 이전의 고려시대나 그 이전에 존재했던 불교의 지식체계를 부정하고 유교의 지식체계를 이식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일제시대의 일본어몰입교육은 구한말이나 그 이전에 존재했던 한글의 지식체계나 실학의 지식체계를 말살시키고 일본의 제국주의적 지식체계를 이식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한자몰입교육이나 일본어몰입교육의 후유증은 단지 그 시대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가족주의나 식민지의식으로 우리의 삶에 파괴적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새로운 언어의 몰입교육을 파괴적으로 습득하는 가장 큰 피해자는 언어를 통한 지식의 교육을 막 습득하기 시작하는 어린 초ㆍ중등학생들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1976년 남아프리카 소웨토 흑인거주지역의 어린 학생들은 남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네덜란드계 백인들(아프리카너)의 아프리카안스어(네덜란드어의 변형어)와 영어몰입교육에 반대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어린 학생들은 아프리카안스어몰입교육이나 영어몰입교육이 그들을 식민지인들로 만들어 합법적으로 백인들의 가정부나 광산노동자로 만드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경험의 지식체계를 지니고 있는 한글을 토대로 한 한문이나 일어 등등의 외국어 지식은 한글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지식체계를 창조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조선시대에 한글을 토대로 한 한자지식의 습득은 율곡 이이나 퇴계 이황과 같은 중국의 유학자들보다 더 뛰어난 유학의 학자들을 만들었고, 일제시대에 한글을 토대로 한 일어지식의 습득은 한글로 소설이나 시를 쓴 홍명희나 만해 한용운과 같은 뛰어난 문인을 만들었다.

영어몰입교육의 폐해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지고 있다. 전국의 수많은 대학들의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대부분은 영어의 서적이 아니라 토플이나 토익 참고서들을 보고 있으며 그것이 지식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외국어 고등학교는 확산되고 있는데, 대학교의 독문과와 불문과 등등은 폐지되고 있다.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 등등에서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숫자는 늘어나는데 영문학 전공 대학원생들은 줄어들고 있다. 학문과 지식의 영어는 사라지고 시장의 식민지 영어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영어와 아프리카안스어를 공부해서 백인가정의 가정부나 광산 노동자가 되는 길이 1970년대의 남아프리카의 상황이었다면, 영어를 공부해서 다국적 기업이나 미국의 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이다. 백인의 노예에서 가정부나 노동자가 되는 것으로부터 다국적 기업이나 미국의 기업 직원으로 변화되었을 뿐이다. 소웨토 봉기를 일으켰던 아프리카의 어린 학생들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영어몰입교육이 논의되고 있는 것을 알면, 그들은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라고 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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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기 교수(동국대 영어영문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