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어올 꽃들” “후배들아 돌아와줘” “포기하지마 기다릴게” “아이들이 안전한 세상을 만들자”

희고 노란 만장이 휘날렸다. 행렬은 조용했다. 매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신명과 신심의 향연이 펼쳐졌던 종로 일대가 무거운 표정과 엄숙한 석가모니불 정근으로 메워졌다. 불기2558년 연등회 연등행렬은 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무사생환을 바라는 염원의 장이 됐다.

4월 26일 오후 7시, 일부 단체의 불참으로 규모가 줄어든 연등행렬은 예정보다 30분 일찍 시작됐다. 인로왕번과 오방불번, 아기부처님을 모신 관불대를 선두로 연등행렬은 이어졌다. 취타대 연희단 풍물패 등 화려한 가무와 음악은 없었다. 거리에 설치된 이동식 무대인 산붕 위에서는 희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바라가 펼쳐졌다.

산붕 뒤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백색 대형 영가등이, 그 뒤를 실종자들이 속히 돌아오길 기원하는 붉은 대형등이 뒤쫓았다. 백등과 홍등 뒤로 봉행위원단 300여 명이 백색 영가등을 들었다. 봉행위원단에 이어 중앙승가대학교 학인들도 영가등을 들었다. 등을 든 행렬에 침묵이 흘렀고, 무거운 발걸음 뒤로 ‘석가모니불’ 정근 소리가 나지막이 깔렸다.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은 흰 만장에는 “유가족의 아픔을 함께 합니다” “얼마나 무서웠니” “너희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게”와 같은 문구가 굵게 적혔다. 노란 만장에는 “사람이 존중되는 사회” “너희들이 남긴 교훈 어른들은 잊지 않을게” “보고싶다 애들아 사랑해” 등 생존자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글씨가 휘날렸다. 연등행렬 참가자들은 가슴에 ‘무사귀환, 극락왕생’ 노란리본을 달았고, 저마다 등에는 아이들을 찬 바다 속에 놓아둔 어른들의 참회 문구가 적힌 노란 리본이 묶였다.

조막만 한 목탁을 든 동대사대부여중학교 학생은 석가모니불 정근을 했고, 조의를 표하는 검은 옷을 갖춰 입은 대불련 학생들의 손에는 ‘세월호 희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라는 손피켓이 들렸다.

대형 장엄등은 예년에 비해 크게 줄었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는 서울과기대학교의 만자 장엄등을, 동국대학교는 코끼리 장엄등을 밝혔다. 불광사는 장엄등 대신 백등을 들었다. 금강선원은 희생자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장엄등을 켰고, 봉은사는 대형 장엄 없이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범종등을 준비했다. 구룡사 학생회는 상의를 흰옷으로 통일하고 흰색 컵등을 들었다. 네팔불자모임은 보리수와 보드나트탑등을, 화계사는 윤장대 등 3개를 밝혔다. 진각종은 대형 공작, 황룡, 거북선등과 함께 행진 내내 서원문을 낭독했다.

영화사는 동자목어등을, 사자암은 신장등과 영가등을 켰고 관음사는 대형 코끼리등 뒤로 영가등을 들고 걸었다. 태고종은 애도의 등을 들고,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영산재 바라를 하며 이동했다. 관음종은 황룡사탑등을 준비했다. 천태종은 금강저, 법화경, 백제금동대향로, 석동등 등 다양한 장엄등을 선보였다.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는 마음은 행렬을 지켜보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매년 연등회에 참가했다는 한 불자는 “세월호 사고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며 “연등회는 예년보다 많이 간소해지고 그분들을 위해서 마음을 모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인도에서 온 여성 관람객은 “인도에도 불교가 있고 축제가 있지만 이렇게 큰 규모는 아니다. 한국에서 이런 축제를 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면서도 “세월호 사고에 대해서는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척 안타깝고 유감”이라고 전했다.

연등회에 두 번째 참가한다는 미국인 크리스타는 “활기넘쳤던 2012년 축제보다 이번 연등회는 절제됐고 슬프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조속히 돌아오기를 기도한다”며 기자에게 후리지아 한 송이를 건넸다. 후리지아의 꽃말은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라고 했다.

이날 연등행렬에서 봉행위원단은 ‘관람석’에 앉지 않았다. 예년에는 행렬의 선두를 이끌며 탑골공원에 도착해 연등행렬 참가자를 격려했던 봉행위원단은 이례적으로 탑골공원 앞 내빈 관람석을 지나쳐 조계사까지 걸었다. 연등행렬은 오후 9시께 마지막 그룹인 관음종과 승가사, 길상사 조계사가 서울 종로 3가 탑골공원을 지나 조계사로 향하면서 마무리됐다.

연등회는 오후 9시 종각사거리에서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하는 국민 기원의 장’으로 이어진다.

/공동취재단 모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