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유기농을 좋아한다. 조금 모난 구석이 있어도, 더러는 흙이 묻고 벌레가 먹어 구멍이 숭숭 나도, 청정한 성장을 거쳤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유기농 같은 시인이 있다. 지리산 악양골 동매마을 꼭대기에 살고 있어도 나비가 꽃을 찾듯 사람들은 그를 찾아든다.

이번에는 멀리 서울의 미붓아카데미(대표 이학종)가 그를 찾았다. 찾아, 서울 신사동 한복판의 강단에 세웠다. 1월 21일, 미붓아카데미의 인문학특강 ‘버들치 시인 박남준의 나의 시, 나의 삶, 나의 불교’에서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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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붓(미디어붓다) 아카데미는 1월 21일 박남준 시인을 초청, 인문학 특강을 열었다.

시인의 음색은 고요했다. 시를 낭독할 때는 굳센 심지 같이 단단한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스무 명 남짓,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러 먼 길을 걸음한 수강생들의 귀가 쫑긋쫑긋했다. 지리산 악양골에 정 붙인지 11년, 시인이 먹고 살고 지내는 그의 고즈넉한 집 ‘심원재’의 면면이 프로젝터를 수놓았다.

촌의 삶은 단출하고 정갈하다. 봄이 오면 싹 틔우고 꽃 피고 열매 맺고 시들어 눈 맞듯, 시인의 삶도 그러하다. 자연의 순리 속에서 시인은 점점 더 시인의 면모를 찾아가고 참된 사람의 삶을 다듬어 간다.

“한 송이 꽃이 내 앞에 있기까지 그 꽃이 계절을 지나쳐오는 것을 보는 것이 시인의 눈이 아닌가요. 그것은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예요. 누군가를 안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인 게, 꽃이 피는 것처럼, 꽃이 건너온 시간을 보는 것처럼, 누군가를 아는 일도 오래 두고 들여다봐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꼭 시를 쓰지 않아도 관계 속에서 삶을 바라보는 눈을 변화시키면 더 풍요로워지고 품 안이 넓어지는 따뜻한 눈이 되지 않을까요.”

혼자 사는 시인의 예술적 감성은 밥상머리에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마당 텃밭에서 난 호박이며 가지, 무, 부추 같은 재료들은 송송 썰리고 곱게 익혀져 소박한 밥상에 오른다. 매실이 나면 매실효소액을, 무가 넘치면 무말랭이를, 구절초 꽃 필 때면 꽃차를 만들어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건넨단다. 마음을 보탠 선물에서도 시인의 따뜻한 마음씀씀이를 엿볼 수 있다.

마음은 비단 사람만이 아닌 자연과 환경, 지구에게도 연결된다. 그는 실로 유기농 사람이다. 재래식 화장실에서 나오는 인분은 몇 해 지나 토실한 작물을 생산하는 거름으로 쓰이고, 화장지 한 장, 종이 한 쪽도 장작에 불붙이는 쏘시개 감으로 쓰인다. 참으로 자연친화적인 삶에도 불구하고, 올해부터는 지리산 악양골까지 중국발 미세먼지가 들이닥친다 한다. 시인은 거기에서 세계가 하나로 연결돼 있음을 절감하며, 남 탓 말고 스스로 바뀌어야지,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시인은 이날 특강에서 특별한 ‘스승’ 하나를 소개했다. 보라색과 은빛이 섞인 신비로운 색을 가진 가시연꽃이다. “잎이 큰 가시연꽃은 잎이 다 담길 수 있는 큰 연못에 키워야 하는 줄 알았어요. 어느 집에 갔더니 손바닥만 한 접시에서 자라고 있더군요. 몇 개를 가져와 키워보니 작은 수조에 제 몸을 맞춰 자라더라고요. 가시연꽃은 자기가 처한 조건에 최선을 다해서 맞춰 자랍니다”.

30평, 60평, 100평… 몸 누일 공간은 한 평도 안 되면서 물질적 크기에 대해 생기는 욕심을, 그는 가시연꽃을 보면서 깨달았다 한다. “눈을 들어보면 이 지구상에 나와 함께 사는 생명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내 삶을 일깨우는 선구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상엔 얼마나 참다운 스승이 많습니까. 내가 눈만 돌려보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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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계절을 지나쳐온 꽃을 보듯 사람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말했다.

시인은 한 때, 이생의 삶을 마치고 떠난다면, 하는 생각을 했다. 2012년의 마지막 날, 함께 있던 스님들이 시인에게 물었다. 박 시인의 새해 소망은 뭡니까. 시인은 대답했다. 다음 생엔 아무 것도 없이 소멸됐으면 좋겠습니다. 스님이 노발대발했다. 네가 뭘 했는데!, 라는 것이 스님의 타박이었다. 시인은 해탈을 소망하고 있다.

불교. 시인이 가장 편하게 느끼고, 가끔 투정도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스님들이었다. 힘들 때 언덕이 돼주고 기꺼이 등을 내준 사람도 스승과 같은 스님들이었다. 좋은 사람들과, 자연과 교감하며 박남준 시인은 늘 깨어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깨달음은 큰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이 흔들리지 않고 부화뇌동하지 않을 때 시시각각으로 깨달음이 옵니다. 깨달은 자와 안 깨달은 자가 다른 것은 깨달음이 왔을 때 시시각각 지켜내려고 하는지 여부입니다. 깨달음이 와도 흘려보내는 자는 범인이지요. 깨달음은 자애로운 스승처럼 이야기해주고 때로는 죽비로 내리칩니다. 그때마다 삶이 변화돼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냅니다. 삶 속에서 실천하고 그 걸음을 걸어가는 게 깨달음 아닐까요.”

도심 한복판에서 특강을 하면서도 시골집에 내렸을 눈을 그리워하며, 시인은 강물을 말했다. 겨울이 되면 강물이 어는 이유. 누군가를 위해서 저 강도 얼겠지, 저 강에도 따뜻한 마음이 있겠지, ‘따뜻한 얼음’일 것이라는 고운 짐작. 깊어지는 겨울 밤, 시인이 당부한다. 이 겨울의 추위를 덜기 위해, 어딘가에는 묵묵히 이웃을 감싸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자고. 감사하고, 사랑하자고.

옷을 껴입듯 한 겹 또 한 겹 /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의 두께가 깊어지는 것은 / 버들치며 송사리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 따뜻하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 철 모르는 돌팔매로부터 / 겁 많은 물고기들을 두 눈 동그란 것들을 /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 그리하여 얼음이 맑고 반짝이는 것은 / 그 아래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 빛을 잃지 않고 / 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ㅡ박남준, <따뜻한 얼음>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