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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관세음보살상 속에는<br>드라마 추노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탁효정 | bellaide@naver.com | 2010-02-17 (수) 19:14

최근에 만난 어느 스님이 “상좌가 요즘은 이 세 가지를 보지 않으면 사람들과 대화가 안되니까 꼭 보라”고 한 것이 있단다. 영화 아바타, 개그콘서트의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 드라마 추노가 그것이다.

개인적으로 사극을 싫어하는 탓에, 추노라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사극은 왠지 촌스럽고, 역사를 제멋대로 날조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 내 평소의 지론이다.

스님의 이야기를 들은 그날 저녁 처음으로 추노를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이 드라마의 시대 묘사가 심상치가 않다.

우선 어렸을 때부터 줄곧 보아왔던 장녹수, 장희빈, 황진이, 미실이가 아닌, 드라마 사상 최초로 도망노비를 소재로 삼은 점, 그리고 소현세자와 후손들을 다루고 있는 점이 무척 흥미롭다. 또한 <다모>에서 이미 시도된 바 있지만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천민들을 전면으로 내세웠다는 점도 나름 신선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이 드라마의 역사적인 배경은 지난해 11월 송광사에서 발견된 관세음보살상 복장물이 조성된 배경과 거의 맞아떨어지고 있다.

내친 김에 <추노>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조선시대 관련 서적들을 뒤적거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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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능한 아버지, 너무 유능한 아들

추노의 역사적인 배경은 병자호란 후 약 10년이 흐른 1645년경이다. 광해군의 실리중심 외교를 부정하고 명 사대주의를 내세운 사림들의 반정에 의해 왕위에 오른 인조는 사실 얼굴마담에 가까운 왕이었다. 그를 왕으로 만든 것은 왕실 적통이라는 핏줄도, 스스로의 정치적 능력도 아닌,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신들이었다. 인조는 이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처지가 못되었고, 자신 또한 언제 왕위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며 평생을 지냈다.

게다가 이들이 내세운 유교 원리주의는 청을 오랑캐로 간주하고 명에 대한 사대정책을 택하는 노선으로 이어졌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중단되었고, 인조를 세운 공신세력들은 명나라에 대한 대의명분을 내세워 청나라와 외교적 단절을 선언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조선왕조는 병자호란이라는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스스로 오랑캐 무리라 손가락질 하던 청나라 군대에 인조는 이마를 땅에 세 번 처박으며 사죄를 했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삼전도의 치욕이다. 그리고 왕자 두 명을 볼모로 청나라에 보냈는데, 소현세자와 후일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이다.

추노의 드라마 배경은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시작된다. 소현세자는 8년만에 청에서 돌아온 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드라마에서는 소현세자가 독살을 당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사실 소현세자의 독살은 이미 당대에서도 제기된 문제였다. 『인조실록』에조차 “온몸이 검은 빛이 됐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선혈이 흘렀다”는 내용이 등장해 소현세자는 독살이 아닐 가능성이 오히려 희박하다.

소현세자는 어수선한 조선의 정국에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똑똑한 왕 후보생이었다. 심양에 머물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창구 역할을 맡아 조선인 포로의 속환문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 ·군량 ·선박 요구, 각종 물화의 무역 요구 등 정치 ·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하였다. 또 청나라 인사들이 벌인 대부분의 행사에 참여하고 청나라 황제의 사냥 등에도 동행하였다. 베이징에서 독일인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폰 벨을 만나 서양 역법과 천문학 등 여러 가지 과학에 관련된 지식을 전수받고 천주교에 관해 소개받았다.

베이징에서 명나라 멸망의 현실을 직접 목도한 소현세자는 청과 조선의 관계를 원활히 하려고 애썼고, 청나라의 경제적 요구를 들어주면서 환심을 얻었는데, 청나라 조정에서는 그를 ‘소군(少君)’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게다가 소현세자빈 강씨 또한 장사수완이 뛰어나 청나라에서 조선의 인삼과 약재 등을 파는 무역을 주도해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소현세자 부부의 활약상을 전해들은 인조는 잘난 아들의 활약이 오히려 불안함으로 다가왔다. 인조는 수시로 심양관에 내관을 보내 이들을 감시하였고, 청나라가 언제 자신을 폐위시키고 세자를 왕위에 올릴지 모르는 불안함에 떨었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1645년 소현세자는 일가족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천신만고 끝에 조국으로 돌아온 그에게는 부왕 인조의 냉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조는 심지어 귀국한 세자에 대한 문무백관의 하례도 막을 정도로 세자를 냉대했다. 또한 적장자가 죽었을 때는 3년상을 치러함에도 소현세자의 장례를 1년 단상으로 끝내버렸다.

게다가 이듬해 세자빈 강씨는 궁중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사사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미의 죄를 뒤집어쓴 소현세자의 어린 자식들은 제주도로 유배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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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안군과 송광사

현재 드라마 추노에서는 송태하 장군과 그의 부하들이 제주도를 찾아가 원손 경안군을 구하고, 경안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한 거병을 준비 중이다.

송태하라는 장수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조선후기에 소현세자의 후손을 왕위에 올리겠다는 명분을 내건 반란은 실제로 발발했다. 영조 4년(1728)에 발생했던 이인좌의 난이 그것이다.

유교적 정통론의 관점에서, 조선왕조의 적통은 사실상 소현세자의 후손들이다. 후일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이 적통이 되려면 적어도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없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소현세자는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소현세자의 자식들은 아비가 죽고 어미마저 역모에 연루됐다는 누명을 쓴 채 사사 당한 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드라마에서는 경안군 한 명만 등장하지만 실제로 3남 1녀가 제주도로 유배를 갔고 이어 강화도와 교동도를 거치면서 10년의 유배생활을 보냈다. 제주도로 갈 당시 경안군의 나이는 겨우 네 살에 불과했다.

이후 그들은 모두 방면되어 한양으로 돌아오는데, 유배생활이 얼마나 고되었던지 모두 요절하고 말았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후손을 남긴 이가 경안군이었다.

경안군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 결혼을 했고 두 아들을 두었다. 경안군은 1665년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후 그의 아들과 손자들의 삶 또한 파란만장하기 그지없었다.

경안군의 아들들은 강화도에서 누군가가 “소현세자의 손자 임천군은 경안군의 아들로, 이분이 진짜 성인이며 나라의 종통(宗統)이다”라는 격문을 붙인 사건으로 인해 또다시 제주로 유배를 당했고, 경안군의 손자 밀풍군은 영조 때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됐다가 난이 평정된 뒤 자결했다.

지난해 11월 불복장이 공개된 송광사 관세음보살상은 경안군 부인 허씨가 남편의 건강을 발원하며 조성한 불상이다. 관세음보살상 속에는 남자 저고리 하나와 여자 배자가 하나씩 들어있었으니, 발원주인 경안군과 허씨의 옷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송광사 관세음보살이 조성된 것은 1662년으로, 경안군이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이다. 병든 남편에 대한 걱정, 가족들에게 밀어닥칠 불행에 대한 두려움을 허씨는 불상 조성으로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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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추노꾼의 역사적 실재 여부

그렇다면 추노꾼이라는 이들이 실제 조선 사회에 존재했을까.

추노의 원래 명칭은 ‘노비 추쇄’이다. 조선시대 고문서나 양반들의 기록에서도 부분적으로 노비 추쇄의 과정을 언급한 내용들이 등장하지만, 전문 추노꾼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노비 추쇄는 원래 개인이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 정부는 노비추쇄도감이라는 관청을 세워 도망노비를 되찾게 했고, 개인의 노비라 할지라도 관청에 보고를 하여 관에서 노비 추쇄를 하도록 법률적으로 명시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노비 추쇄에 관한 기사를 살펴보면 조선전기에는 각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의 추쇄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논의되는 반면, 조선후기에는 양반이나 관리가 노비를 추쇄하던 중 살인을 저지른 데 대한 처벌 기사가 주를 이룬다. 또한 영조는 “흉년에는 노비 추쇄를 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기도 한다.

노비가 도망가고 신분질서가 혼란스러워지는 데도 국가에서는 왜 노비추쇄를 금지시키는 조치를 내리는 것일까.

이는 조정의 국가수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노비의 수가 크게 증가한 반면 양인의 수가 줄어들었다. 양란 이전에 400만이던 양인의 수가 양란 이후 150만으로 줄어든 것이다. 양인 수의 축소는 곧 국가 수입의 축소를 의미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양인의 수를 증가시키는 정책을 펴게 되는데, 수시로 납속을 통한 노비 면천이 이루어졌다.

이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계속 양인의 수가 줄어들자, 조선왕조는 노비추쇄도감을 폐쇄하고 1801년에는 모든 국가기관이나 관청에 소속된 노비들을 면천하는 조치를 취했다.

숙종실록 10년에 정제선이라는 서장관이 추노 과정에서 노비와 양민 6명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대해 숙종이 꾸짖자 조정의 대신들은 우물쭈물하는 장면을 사신이 비판하는 기사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이 기사는 왕이 노비추쇄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데 반해 양반관료들은 노비추쇄에 대해 적극적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왕은 노비의 수가 늘어나는 것에 반대하는 반면 양반들에게는 노비가 사유재산 축적의 주요 수단이었으므로 노비추쇄에 대해서도 상당히 관대했던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전문 추노꾼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노비들을 잡아들이고, 관에서 이를 회수하는 형식으로 비춰진다. 이는 문헌상으로는 등장하지 않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사사로이 노비추쇄를 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양반들은 관청에 신고하지 않고 몰래 노비추쇄를 누군가에 시켰을 것이고, 이는 아마 저자거리의 왈패들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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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저항의 상징, 운주사

지난 주 추노에서는 경안군을 원손으로 내세우는 무리들이 중간 결집지로 운주사를 택하는 장면이 나왔다. “뜻을 펴지 못한 미륵이 누워있다”는 밀지를 보고 장군과 대길은 그들이 운주사에서 모이기로 했음을 알아차린다.

이들은 왜 하필 운주사를 택한 것일까. 운주사는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갈망하는 이들이 세운 절이라는 전설이 깃든 절이다. 미륵이 언젠가는 우리를 구원해주러 올 것이라 믿은 이들이 1000기의 미륵과 1000개의 탑을 세웠고, 또한 와불을 새겨 저 누운 미륵이 일어나는 날 새 세상이 열리고 1,000년 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고 믿은 것이다.

운주사에 있는 부처와 탑의 모습은 여느 절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 전문 조각가가 아닌 일반 민중들이 온 마음을 다해 다듬고, 새기고, 얹은 부처의 모습들이 그곳에 남아있다. 그곳에 지배자의 얼굴이 아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그토록 투박한 불상과 탑을 새긴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드라마 속 그 모습이 상당히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운주사가 민중의 저항의 상징인데 반해 그곳에 모인 송태하 일파는 왕실 적통의 계승을 주장하는 명분론자들에 가까운 모습이니. 이 대목에서 문득 이런 유행어가 생각난다. “개그는 개그일 뿐,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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