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전우치전>은 25년전 시골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는 만화였다. 그 흔한 만화방도 찾아보기 힘든 시골마을에서는 농협에서 발간하는 <어린이 새농민>의 만화 연재가 최고의 오락물이었다.

하지만 그 책은 아무나 볼 수 있는 잡지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조합장이거나 조합에 근무하는 특수한 계층(!)의 아이들만 볼 수 있는 귀한 책이었다. 필자의 경우 농협 연쇄점에 근무하는 사촌언니라는 빽(?)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매달 어린이 새농민을 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매달 네다섯 편의 만화가 연재됐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전우치전은 조선시대 전우치라는 사람이 탐관오리를 쫓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다는 내용의 코믹만화였다.

그 전우치가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뒤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새해 벽두부터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 <전우치> 또한 만화 스토리와 마찬가지로 조선중기의 말직 벼슬을 살던 전우치가 도술을 부려 탐관오리를 혼내주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이야기였다.

만화 전우치를 열심히 탐독하던 그 꼬마는 초등학교 때부터 역사물(?)에 심취했던 탓인지 25년이 흐른 뒤 역사학도로 변신했고,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 전반에 깔려있는 역사적인 아이템들만 줄곧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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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전우치는 시종일간 웃고 있다 보면 2시간 20분이 훌쩍 지나가 버리는 영화다. ‘인생 그까이꺼 뭐있어’라는 코믹한 관점으로 다양한 역사적 소재들이 버무려져 15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이 영화는 전후 맥락을 살피면 유치해지지만 영화에 슬쩍 의식을 맡겨버리면 인생이 가벼워지는 유쾌한 역사물이다.

홍길동, 장길산 등과는 달리, 역사 속의 인물 전우치를 처음으로 각색했다는 면에서 새롭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영화 전우치는 조선중기의 고전소설 <전우치전>에다가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도술이나 신비스러운 소재들을 섞고, 십이지신을 양념으로 버무려서 만들어낸 영화이다.

영화 내용을 길게 이야기를 하자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으니까 대충 생략하고 영화에 등장하는 역사 아이템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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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영화 초반에 등장해서 십이지신의 모습을 띤 요괴들을 잠재우기 위해 피리를 부는 이는 표훈대덕이다. 일반인들에게 다소 생소해서 ‘표운 대독’이라는 해괴망칙한 이름으로 영화평에 오르내리는 이 분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 스님이다. 삼국유사 <충담사 표훈대덕>편에 경덕왕에게 아들을 점지해주기 위해 옥황상제에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스님이 등장하는데, 이 분이 바로 표훈 스님이다. 의상의 10대 제자 중 한 명인 표훈 대덕은 불국사 초대 주지를 지내고, 금강산 표훈사를 창건한 스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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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훈 스님이 불었다는 피리는 그 유명한 만파식적.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제31대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에 감은사를 지어 추모하였는데, 죽어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 동해 중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는지라 신문왕이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현장을 찾았다. 이 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 “비유하건대 한 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대나무도 역시 합한 후에야 소리가 나는 것이요… 또한 대왕은 이 성음(聲音)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사라졌다. 왕이 곧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나라의 모든 걱정 ·근심이 해결되었다 한다.

이 기록에서 연유를 했는지 어쨌는지, 영화 전우치에서도 만파식적이 둘로 갈라졌다가 신선들에 의해 붙었다 떨어졌다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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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표훈대덕이 만파식적을 불렀을까, 혹은 본 적이라도 있을까 하는 의심이 슬그머니 들었다. 표훈대덕은 8세기경 경덕왕 때 활동했던 스님이고, 만파식적은 7세기 신문왕 때 등장하는 신라의 국보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시기상으로 조금 차이가 난다.

하지만 표훈대덕이 만파식적을 접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한다. 표훈이 의상의 10대 제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표훈은 문무왕 때부터 경덕왕 때까지 생존한 인물로 볼 수 있고, 대덕이라는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으므로 충분히 만파식적을 접할 기회도 있었으리라는 것이 동국대 김상현 교수의 설명이다. 하지만 표훈이 만파식적을 불렀다는 기록은 <삼국유사>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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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피리에 영혼을 빼앗겨버린 화담은 황진이의 그 유명한 연인 서화담이다.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로, 고고한 선비 중의 선비로 꼽히던 서화담은 원래 고전소설 <전우치전>에서 전우치의 스승이자 친구로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정반대로 전우치와 대적해서 싸우는 악역으로 분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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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대가집의 어린 과부(임수정)를 보쌈하는 전우치의 모습 또한 실제 역사기록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 조선시대 민간에 전해져온 <무명씨집(無名氏集)>에 의하면, 전우치는 서울을 두루 돌면서 재상 부녀자들을 간음하다가 발각되어 도망쳤다. 그리고 성문에 크게 써 붙이기를, “백만 장안에 정녀(貞女)는 하다도 없다”라고 방을 붙였다고 한다. 대가집 마나님들과 놀지를 말든지, 놀았으면 입을 다물든지, 암튼 매너 하나는 드럽게 없었던 사내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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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신선들이 외우는 주문은 그 유명한 천수경 참회진언과 광명진언. 천수경의 참회진언인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하고 주문을 외우면 요괴들이 호리병 속으로 쏙 들어가고,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타야 훔~’하고 광명진언을 외우면 전우치와 초랭이를 그림 속으로 가둘 수 있다. 이때 천수경을 외우는 신선들 표정이 압권이다. 주문이 잘 안 먹혀들자 무당이 된 신선이 가톨릭 신부가 된 신선에게 왈. “너 성경책 가져왔냐”는 대사는 정말이지 대박이다.

그나저나 나중에 절에 예불을 드리러 갔다가 그 장면이 떠올라 웃음이라도 터질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