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효정
bellaide@naver.com 2009-12-30 (수) 19:11‘정토가 존재한다면,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하는 곳이 아닌, 흙이 있고 나무가 있고 인간과 동물들이 어우러진 그런 곳에 <정토>가 있다면, 바로 저곳이 아닐까.’
영화는 시종일간 황홀했다. 행성 판도라의 눈부신 풍경들, 동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식물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인간은 지배자도 피조물도 아닌 일부분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익룡 이크란을 타고 하늘을 날고, 땅 위에서는 말 이고르를 타고 움직인다. 그 동물들은 반드시 자신과 영적으로 교유를 한 존재들에게만 그들의 어깨를 빌려준다. 그들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동반자임을 알아차린 후에야 인간에게 자신과 함께 질주할 것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도 동물들을 잡아 양식으로 삼는다. 하지만 동물들을 사냥한 후에는 반드시 그들의 영혼에게 말을 걸어 진심어린 사과를 전한다. 죽은 이들의 영혼은 그곳을 떠나지 않고 행성 곳곳에 머무르며 일부가 되고, 행성의 균형을 관장하는 존재가 된다. 그들의 후손들 또한 그 사실에 깊은 공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영화가 마치 서정적인 역사물처럼 전해졌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엄연한 공상과학물(SF)이다. SF영화라는 점이 이 같은 풍경들을 더욱 미치게 만든다.
마치 2시간 40분 동안, 내 영혼이 아바타의 몸속에 들어간 것처럼, 매우 중독성이 깊은 마약에 빠진 것처럼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영화 <아바타>.
제임스 카메론은 <타이타닉> 이후 10여년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던 우리를 역시, 실망시키지 않았다. <아바타>에 등장하는 3D 입체와 디지털 액터, CG 기술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배우의 모습이 그림인지, 인형인지, 사람인지 혼동스러울 정도로 <아바타>에 등장하는 기술의 진화는 가히 경이롭다고 할 만하다. 놀라운 점은 그 장면들이 ‘100% CG이면서 동시에 100% 배우의 연기’라는 것이다.
카메론 감독은 배우의 얼굴에 고무를 뒤집어씌우는 기존의 분장술로는 아바타 캐릭터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영화 속 나비족은 키가 3m인데다 신체비율도 인간과 완전히 다르다. 나비족의 눈은 인간의 눈보다 지름이 두 배나 크고, 눈동자 또한 동공이 훨씬 크다. 몸도 인간보다 훨씬 늘씬하고 목이 길며 손가락도 세 개뿐이다.
분장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이 모든 것을 카메론 감독은 CG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배우들의 얼굴과 몸에 센서를 부착해 연기를 시키고, 센서는 이들의 연기를 컴퓨터로 전달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배우들의 머리에 초소형 카메라가 달린 장비를 씌워 배우들의 얼굴 근육과 눈동자 움직임, 심지어 땀구멍과 속눈썹 떨림까지 세밀하게 기록했다. 이를 배우들의 ‘감정(emotion)까지 표현한다’고 해서 ‘이모션 캡처’라고 부른다. 네이티리가 ‘크하~’ 하고 으르렁대는 분노, 아버지의 죽음 앞에 늑대소녀처럼 울부짖는 슬픔, 제이크와 교환하는 애틋한 눈빛의 표현이 모두 이모션 캡처를 통해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그 같은 기술력의 진보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곳에 등장하는 인간과 나비족의 대조적인 삶의 방식이다.
영화는 지구에서 자원이 바닥나자 새로운 행성에서 대체에너지를 찾는 데서 시작한다. 판도라로 불리는 행성에 엄청난 자원이 매장돼 있지만, 인간이 숨쉴 수 없는 독한 공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원주민 형상에 인간의 의식을 주입한 새로운 생명체 ‘아바타’를 만들어낸다. 인간이 수면캡슐에 들어가 아바타의 의식과 접목을 하면, 그는 아바타의 몸으로 활보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DNA를 이식한 아바타를 개발하는 데는 엄청난 돈과 시간이 든다. 그런데 판도라로 떠나기 한 달 전 아바타의 주인이 갑자기 죽어버렸다. 수억 달러의 돈이 공중으로 사라질 찰라, 본부에서는 아바타 프로그램 참가자의 쌍둥이 남동생을 찾아낸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판도라에 가게 된 전직 해병 제이크가 영화의 주인공이다. 전쟁에서 다리를 잃은 그는 아바타의 몸속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다는 사실에 환호하고, 아바타로서의 삶에 깊이 빠져 들어간다.
우연히 원주민들의 공동체로 가게 된 제이크는, 그곳에서 원주민 여전사 네이티리를 만난다. 본부로부터 나비족의 공동체에 침투해 그들을 이주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제이크는 임무 완수의 대가로 건강한 다리를 약속받는다. 지구의 인간들에게 있어서 나비족의 삶의 터전은 지하자원이 묻힌 거대한 광산이고, 나비족은 바퀴벌레와 같은 귀찮은 존재들이다.
그런데 그만 제이크가 네이티리와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리고 네이티리를 통해 하나의 온전한 우주로 존재하는 아름다운 판도라의 진면목을 발견한다.
보통 SF영화라는 부류들은 화면은 매우 화려하지만, 줄거리는 단순하기 짝이 없다. 적이 쳐들어오고, 우리는 싸운다. 혹은 나쁜 우주인들이 선량한 우주인들을 공격하는데, 지구의 ‘영웅’이 거기로 가서 착한 우주인을 도와준다는 식이다.
이 뻔한 공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만, 영화 <아바타>가 다른 SF영화와 구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그곳에 인간의 이상향, 인류의 오래된 미래를 담았다는 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행성 판도라의 풍경들은 마치 <무량수경>을 그대로 베껴놓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토’의 모습과 흡사하다. <무량수경>에는 정토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무량수불이 계시는 도량의 나무는 높이가 400만리이고, 그 가지와 잎은 사방으로 20만리나 퍼져 있으며, 온갖 보배로 장엄되어 있다. 그리고 작은 가지 사이로는 보배로 된 영락이 드리워져 있는데 그 색깔은 백천만 가지로 다르게 변하여 한량없는 광명이 끝없이 빛나고 있다. 미풍이 서서히 불면 모든 가지와 잎을 움직여서 무량한 묘음의 음성을 연출하는데, 그 소리가 흘러 모든 불국토에 울러 퍼진다.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불도에 이를 때까지 귀가 청정하고 투철하여 괴로움과 병환을 만나지 않으며,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 귀로 그 소리를 들으며, 몸으로 그 빛의 촉감을 느끼고, 마음으로 그 인연을 생각한다.”
이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는가.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으면 <아바타>를 보라. 그 눈앞에 화려한 3G영상으로 각색된 정토의 풍경 <판도라>가 펼쳐질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정토는 사실상, 지구 저 멀리 떨어진 별세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과 저것이 있기에 나 또한 존재한다는 연기론적 세계관으로 바라보는 세계,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관념조차 없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세계 그 자체가 정토이다. 따라서 판도라 행성이 정토라기보다는 나비족이 받아들이는 세계가 정토인 셈이다.
아바타 본부에서는 제이크에게 원주민을 이주시키는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 다리를 수술할 수 있는 비용을 약속했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그에게 전사로서의 명예와 깊은 신뢰, 사랑을 약속했다. 하지만 원래의 몸과 접목된 나비족 제이크는 ‘아바타’일 뿐이다.
행성 판도라에서 피안과 차안을 넘나들던 제이크, 그는 이제 진정한 정토의 의미를 깨닫고 선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섰다.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