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남산용장사지마애불좌상. 통일신라 8세기. 높이 1.1미터

보물 제913호,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경주 남산의 제1, 2위 봉우리인 고위봉과 금오봉 사이의 남쪽 계곡이 용장골이다. 이곳 용장사지 마애불을 보기 위해서는 삼릉계를 거쳐 금오봉에서 내려가는 방법과 용장동 마을에서 계류를 따라 오르는 길이 있다.

달빛이 하얗게 길을 만들어주는 보름날 밤, 용장사지에서 암벽을 타고 삼층석탑이 우뚝 선 꼭대기까지 오르다 보면, 옛 시인과 고승의 행적이 절로 그려진다. 특히 달빛이 온 산과 들녘에 내리깔린 풍경은 새 정권(世祖)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떠돌다가 한때 이곳에 은거했던 매월당 김시습을 떠올리게 한다.

용장사 아래에는 김시습이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읊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은 터가 폐허로 남아 있다. 그는 조선시대의 천재 문필가로 꼽히면서, 설잠(雪岑)이라는 법명을 지닌 승려이기도 했다. 또한 신라 경덕왕 때 “태현스님이 미륵장육상 주위를 돌며 예배를 올리면 그 불상의 얼굴도 함께 돌았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지금도 이 미륵상은 원형의 삼륜대좌 위에 앉아 있는데, 두상을 잃은 채로 높이 모셔져 있다. 어느 곳 하나 그냥 치나칠 수 없을 만큼 보고 들어야 할 것이 많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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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마애불은 우뚝하게 앉은 미륵상을 돌아본 뒤에 동쪽으로 조금 더 가야 만날 수 있다. 사람 키 높이 정도에 남향으로 앉아 용장골 너머의 들녘을 관망하고 있다. 1미터가 조금 넘는 크기의 마애불은 div은 저부조이면서도 볼륨을 잘 살린 8세기 조각미를 보여준다. 양 어깨에서 가지런하게 흘러내린 법의는 일정한 간격으로 촘촘히 주름져 자연스러움보다는 단정함이 돋보이는 모습이다. 여기에 나발이 정연하게 돋아 있고, 얼굴 표정 또한 변화를 드러내지 않은 차분함이 돋보여 마치 무색계(無色界)의 정적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시공이 정지된 느낌을 전해준다.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이고, 대좌의 연화문이나 이중면의 원형광배가 깔끔하다.

항마촉지인의 성도상으로는 남산 칠불암이나 석굴암의 본존상을 꼽을 수 있는데, 작은 크기의 이 마애불도 그에 못지않다. 한 인간의 깨달음은 이처럼 고요하고 청정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애불의 왼쪽에는 3행으로 된 10자 내외의 명문이 있으나 판독이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