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법사 | webmaster@mediabuddha.net | 2014-01-27 (월) 18:16
三.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공부를 지어가야 하나’하는 방법의 제시입니다.
이항(二項)에서 공부한 개괄적인 개아(個我)의 형성(形成)에 관한 법(法)을 설하시고, 이것을 어떻게 알아가고, 이해하고, 인식하며, 어떻게 각 단계마다의 스텝(step)을 넘어야 할 것인가의 ‘하우 투(how to, 方法, 方便)’의 방향을 잡아나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십니다.
8만4천이라는 방대한 법문과 무수한 방법과 비유와 차제의 말씀으로 밝히시며, 궁극에 이르는 길(Nibbana)을 가르쳐 주심이 붓다(Buddha)의 가르침 즉 불교(佛敎)입니다. 고따마 싯다르타의 구도의 원천은 중생들처럼 자기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생명에 대한 연민의 정이였습니다. ‘어떻게 괴로움을 여의고 윤회의 족쇄를 벗어나게 할 것인가?’가 그분의 일관된 고뇌였습니다.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결정된 왕위(王位)도 모든 안녕과 쾌락과 안락마저 버리시고 그 답을 얻기 위해 출가라는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출가 후 맨 먼저 당시에 선정수행(禪定修行)의 탁월성을 인정받은 ‘알라라 깔라마’를 이어 ‘웃다카 라마뿟다’라는 두 스승에게서 선정수행과 사무변처(4禪定, 4處天의 8等持)의 수행을 익힙니다. 두 스승도 깜짝 놀랄만한 빠른 시일에 그 수행을 완성하자 두 분 다 고따마에게 무리의 스승자리를 약속하며 잡아 두려하였지만 고따마는 ‘이 수행으로는 뭇 삶이 괴로움을 여의고 윤회를 벗어날 수 없음’을 간파하시고, 특히나 라마뿟다의 700여명의 제자들을 엮어 스승으로 모시려고 하는 간곡함도 뒤로한 채 떠나십니다. 왜이겠습니까? 그분 자신 출가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이 테크닉(technique)의 불완전성을 간파하신 것입니다. 즉 ‘여기에는 답(答)이 없다’였습니다.
이와 같이 당대의 내로라하는 두 스승으로부터도 답을 구하지 못한 그 분은 더 이상 찾을 스승이 없자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고심하시던 중 당시에 ‘니간타라마뿟다’가 이끄는 자이나교와 여러 외도(外道) 수행자들이 필수로 여기는 ‘고행(苦行)’이라는 것에 혹시 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되어 고행(苦行)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네란자라 강(江)가에 앉아 장장 6년의 고행이 시작됩니다. 크게보기
붓다께서 콘단냐 등 다섯 고행자에게 첫 설법을 했던 장소인 사르나트의 다미카 스투파 앞에 있는 샤아도의 모습.
그분의 술회처럼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미래세에서도 ‘나와 같은 철저한 고행자는 없다’라고 단언할 만큼 극심한 고행을 하셨으나 당시 알려진 대로 업(業) 덩어리인 몸을 괴롭힘으로써 괴로움을 벗어나고, 악도(惡道)를 벗어나며, 나아가 윤회의 업이 소멸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아차리시고 왕자생활의 29년간의 감각적 쾌락의 생활과 6년 동안의 쓰라린 고행을 양극단으로 이해하시고는 악기의 현에 비유해보이시며 이 두 삶의 35년 동안에 위대한 중도(中道)의 길을 발견하시고 고행을 중단하셨습니다.
고행을 중단하자 엊그제까지 고따마를 깎듯이 공경하던 꼰다냐 등 다섯 고행도반들은 붓다의 고행 포기를 외도시(外道視)하며 비난하였습니다. 4선정, 4처천의 수행과 6년간의 고행의 끝머리에서까지 고따마가 얻어낸 결론은 ‘아니구나! 안 되는구나’였습니다.
고따마는 ‘고통과 윤회의 끝막음이 안 되는구나’를 아시고서 그렇다면 또 다른 어떤 길이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0살 때 부왕이 주제하든 농경제에 참예하였다가 잠부나무아래에서 잠깐 들어봤던, 체험했던 아나빠나 사띠(Anapana-sati, 안반수의, 들숨날숨 알아차림)를 떠올리시며 그 수행을 시작하십니다.
고행으로 쇠락한 몸은 수자타의 정성어린 유미죽 공양으로 회복하시며 보리수 아래에서 길상초를 깔고 앉아 괴로움과 윤회를 벗어나는 법을 얻지 못할 때는 이 자리에서 죽음을 맞으리라는 굳은 결심으로 정진하시던 어느 날 밤 초저녁에, 밤중에, 그리고 새벽녘의 세 차례에 걸친 깨달음으로 삼명(3明)과 해탈(解脫)을 얻은 과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가. 아나빠나 사띠(Anapana-Sati)
이와 같이 고따마가 3명해탈(三明解脫)을 얻으신 아나빠나 사띠(Anapana-Sati)란 무엇이며 어떻게 시행하는 것인가.
이제부터 이것을 붓다의 가르침대로 간결하게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어디까지나 개괄적이며 그 세부사항은 그것을 밝힌 경전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숨을 쉽니다. 무정(無情)까지도 호흡을 한다는 사실은 현대의 과학에서 증명되었으니, 모든 존재는 호흡을 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존재가 호흡하지 않으면-생명이 숨을 쉬지 않으면- 죽음이라 규정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생명(生命)의 원천(源泉)이요, 명근(命根)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이 이 가르침의 주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을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하기에 최상(最上)임을 설파하신 것입니다. 그 대상의 선정의 중요성은 위의 설명 등으로 수행자 각자가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장구(長久)하나 이해가 가능) 고따마께서 이 아나빠나 사띠(Anapana-Sati)를 어떻게 어렸을 적 시행하시게 되었고, 또 그것을 어떻게 기억해 내셨는가는, 그분의 무수한 생(生) 동안의 업(Kamma)이 작용하셨던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전생(前生)에 수행하셨던 과보와 헤아릴 수 없는 선근공덕의 업(Kamma)이 작용하여 그것으로 초선정(初禪定)에 드신 것은 무수한 생(生) 동안에 닦아 온 공덕이요, 선정을 익히고, 고행의 시행으로도 생각하는 바의 목표에 이르지 못함을 알게 된 것도, 그리고 유년의 아나빠나 사띠(Anapana-Sati)를 떠올린 것도 모두가 그분의 업(Kamma)의 작용입니다.
이 수행에 대한 구체적인 법문과 테크닉의 경전적(經典的) 근거는 대승(大乘)에 전래되어온 안반수의경(安槃守意經)으로 한역되어 한국불교에도 전해져 왔습니다. 이 원전(原典)은 중간크기의 경(經)의 모음집인 ‘맛지마니까야’에 있습니다. 원전이 산스크리트어로, 다시 한문(漢文)으로, 또 우리말로 전해오는 과정에서 원문의 해석상의 문제 등 많이 난해(難解)해졌지만, 요즈음은 팔리어(pali어)를 우리글로 바로 옮겨 쓴 경전들도 많이 나와 있으니, 그 경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현대(現代)를 사는 우리들은 불음(佛音)을 생생한 원어(原語)로 접하게 되는 광영과 복록과 가피를 누리고 있습니다.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힌 원문을 맞이하시어 읽어보시고 그대로 실제의 수행을 하시면 되겠습니다.
미리 말씀 드렸듯이 졸고 ‘수행기Ⅱ’는 본인이 시행해보고 체험함 사항들을 경전 위주가 아닌 경전에 근거하며 시행 위주로 펼쳐 보이는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이것을 실천 수행해야 할 당위성과 그 안내를 중심으로 설명해 나가겠습니다. 경전을 구체적으로 끌어다 붙여 설명하는 것은 두서도 없고, 장황해지고, 또 다른 사족이 됨으로 그 근거와 방법들을 익히시며 동시에 백번 듣고 읽는 것보다 실천수행이 가장 중요하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크게보기
아나빠나 사띠 수행법은 무엇보다도 스승과 도반이 매우 중요하다. 혼자서 수행을 하다보면 잘못된 길로 빠져들 가능성이 커 매우 위험하다.
이 수행은 무엇보다도 눈 밝은 지도자(선지식 또는 선체험자)의 지도를 받아야합니다. 눈 밝은 지도자란 정(正)과 사(邪)를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이걸 초심자(初心者)가 어떻게 아느냐? 그래서 경전공부도 같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전에 밝히신 대로 익히고, 알고, 시행하시는 분인가 하는 것은 어느 정도 헤매다(?)가 보면 판별이 가능합니다.
특히 지혜를 얻어가는 수행은 ‘스승이 필수’입니다. 이 시대에 ‘스승’은 있는가, 스승이라고 경배할만한 분이 있는가 하는 시대적 아픔 때문에 스승 대신에 ‘지도자’ 또는 ‘가이드’라는 말을 저는 많이 사용합니다.
다음으로 ‘도반’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도하는 분과 좋은 도반은 이 수행의 필수입니다. 특히 눈 밝은 분, 좋은 선우(善友, Kalayanamitta)는 완성(完成)입니다. 그냥 책을 보고서 나름대로 수행을 해가는 것은-들은 풍월로 지레짐작해 나가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위험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도그마(dogma, 독선)입니다. 우린 주위에서 이런 분들을 가끔 보지 않습니까? 환경 때문에 나름대로 정신세계를 얻어가다가 접신(接神)을 하게 되고, 나아가 내림굿을 하고 공수를 받고 하는 샤만(shaman)들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꼭 유의하십시오. 수행의 진전이 이런 곳에는 없습니다. 수행의 진전이 잘 이루어졌다 해서 완성(完成)이란 없는 것인데, 그분들은 그것을 완성으로 착각합니다. 수행 중에 어떠한 것을 체험하고 얻었다 해도 그것은 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니 과연 독선적 견해에 집착해서 머물러 버려야 되겠습니까, 더 높은 지혜를 얻어가야 합니다. 그럴라치면 앞서 언급한 확실한 가이드(선지식)가 있어야 합니다. 저 역시 그런 스승이 필요함을 스스로 익히고 지도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공부란 그렇습니다. 내가 하고자하면 스승이 보이고, 또한 스승이 찾아옴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은 하고자하는 의지와 그에 따른 노력(viriya), 정진이 중요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이론(理論)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론을 바탕으로 실천하는 것은 수행입니다. 그 결과로 체험하고 증명하는 것은 시행하시는 분의 몫입니다. 현존(現存)하는 지구상의 사람의 수를 약 73억이라 추정합니다. 그분들의 정신세계는 73억 가지로 각기 다른 점이 많을 것입니다. 그것을 획일적으로 도형화하고 도식화해서 그 테크닉과 펼쳐진 정신세계를 설명한다는 것은 붓다 말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무리일 수도 있습니다.
수행하시는 분의 정진력(viriya)에 따라 얻어지는 지혜의 점차와 크기는 다 다릅니다. 흔히들 말하는 근기에 따라 얻는 시간의 차이와 크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붓다는 경전에서 명료하게 밝히시고 확신을 주며 수기(受記)하십니다.
*잘 설파되어있다- 어떠한 논리로도 반박 할 수 없다.
*시공(時空)을 초월한다- 2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서양에 관계없이 이루어진다.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으며 도(道)와 과(果)는 동시성(同時性)이다. 단박에 내생이 아닌 금생에 이루어진다.
*너도 해도 되고 나도 해도 된다- 선택받은 분들의 몫이 아니다.
*‘와서 보라’이다- 와서 믿으라는 말이 아니다. 네가 해보고 증명됨을 보라는 것이다.
*열반(Nibbana)으로 인도한다- 지고(至高)하고 완전한 행복(幸福)에 이른다.
*이미 선각(先覺)들이 증명했다- 25 부처님과 수많은 성자들에 의해 증명됐다.
라고 환히 밝혀 놓으십니다.
인류의 문화가 기록된 이래 2000여 년 동안(西歷)을 서구에서는 모든 것을 신(神)의 섭리와 개입(介入)과 작용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눈부신 물질문화의 출현 훨씬 이전인, 무려 2600년 전에 설파된 동양의 한 위대한 성자의 말씀이 서구(西歐)에 알려진 것은 20세기 말 무렵이었습니다.
세기의 대석학 ‘토인비’는 ‘20세기에 가장 큰 사건은 붓다의 가르침이(동양의 사상이) 서구에 전래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신적 사상과 양식은 서구의 정신문화에 크렉(creak, 삐걱거림)을 형성하였고, 발전된 과학과 모든 사상까지도 21세기 이후 인류의 사상의 대안은 붓다의 사상에서 밖에는 찾을 수 없다고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토인비의 예지를 증명하듯, 그때부터 21세기 초입인 지금 서양에서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인 수가 급감하고(대략 20% 안팎) 붓다의 가르침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지 않습니까? 대승권의 고승(高僧)들보다는 불교(佛敎)를 연구하는 서구학자들의 저서와 강의가 훨씬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예상한 대로 불교의 역수입 현상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서구의 내로라하는 명상 수행자들의 말이나 그 활동들이 인터넷망을 통해 너무 많이 확산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분들의 말씀들을 우리는 여러 매체를 통해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새로운 것인 양 혹은 새롭게 발견한 진리인 양 떠들어대는 내용들은 기실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이미 붓다께서 설법하시고 가르쳐주신 수행의 기법들을 자기들 나름대로 체험하고 증명한 것을 체계화하여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추세라면 머지않은 장래에 ‘불교의 르네상스’가 열리지 않을까 고무적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서구로부터의 전법(傳法)과 서구적 논리의 수입을 탓하고 폄하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미 서구화 되어버린 우리의 문화에서는 난해한 한문의 가르침보다는 훨씬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 또한 훌륭한 지도(map)이고 안내자(guide)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나빠나 사띠(Anapana-Sati)에 대해 맺는말로 들어가겠습니다.
아나빠나 사띠(Anapana-Sati), 얼핏 이 단어에만 매이면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림이 무슨 도(magga)인가? 그걸 시행함으로써 무슨 깨달음을 얻어 갈수 있는가? 의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는 당연한 의심입니다. 붓다의 당부처럼 붓다의 가르침은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큰 의심이 있으면 있는 채로 그대로 시행해 보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마치 영롱한 구슬처럼 모양과 색깔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늘 사람이 5색 구름을 타고 우주공간을 날아다니는 환상과 같은 것일까요? 사람들은 이와 같이 정신의 세계에서만 얻어지는 이 깨달음(bodhi)을 물질화해서 생각하기 일쑤이며 이것을 동경하고, 또 갖겠다는 욕심으로 심각한 ‘깨달음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중병환자를 우리는 자주 보게 됩니다. 특히나 한국불교에서는 그 병이 도드라집니다.
깨달음(bodhi)은 붓다께서 설파하신 법문이나 제시하신 수행의 점차로 얻어진 것은 앞서 말한 물질적 요소의 형태가 아닙니다. 얻으면 얻을수록 환상과 모양으로는 견줄 수 없는- 세간의 어떠한 감각적 쾌락이나 어떠한 하늘나라의 즐거움도 능가하는- 오직 정신세계의 전개일 뿐입니다.
우리는 불교공부를 지어가면서 붓다에 대한 신심(信心, Saddha)을 바탕으로 접근해가고 탐익해 갑니다. 불교에서 믿음이란 맹목적(盲目的)인 것이 아닙니다. 붓다 그 자체의 뜻이 ‘깨달은 이’ 라는 뜻이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로지 고따마 싯다르타에게만 주어진 붓다라는 고유명사는 그분이 깨달으신 분이라는 것을, 그분의 가르침에서, 그 가르침의 시행을 통해서 ‘확신에 찬 믿음’, 즉 깊고 깊은 ‘신뢰감’을 갖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 신뢰감으로 접근해 가십시오! 그분은 4선정, 4처천, 6년의 고행으로도 번뇌 망상의 완전한 소진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아나빠나 사띠(Anapana-Sati)의 수행으로 드디어 번뇌 망상의 완전한 소진을 얻으셨고, 그래서 깨달음의 경지를 얻으셨습니다.
앞에 서술했듯이 들숨날숨이 모든 생명체의 원동력이라는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이 아니고 이 원천을 ‘알아차림(Sati)'하는데 그 목적을 두셨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데 명상에서부터 알아차리고 나아가 우리들 일상(日常)의 행주좌와(行住座臥)에서도 사띠(Sati, 알아차림)하라 가르치십시오. 그리고 이와 같은 호흡의 사띠(Sati)는 꼭 절에서만, 선원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지요. 아무 곳이나 사띠(Sati)를 하면 그곳이 곧 수행처입니다.
의학적으로 3분 이상 숨을 쉬지 않으면 뇌에 혈류장애를 일으키며 지속되면 결국에는 죽음에 이릅니다. 붓다 재세시에 붓다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어느 순간에 달렸느냐?”고 한 빅쿠(Bikkhu)는 “하루밤 사이입니다”라고 답했고, 또 다른 빅쿠는 “밥 한끼의 순간에 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붓다께선 “너희는 아직 공부가 덜 되었구나 도과의 성취가 어렵겠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한 빅쿠가 답합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호흡에 있습니다. 바로 내 뱉은 숨 들어 마시지 못하면 죽습니다”라고. 그러자 부처님께서 “너는 공부가 되었구나. 도과(道果)를 성취하리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숨 쉬는 자체의 중요성을 얘기하지만 그 중요성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요. 그 행위를 사띠(Sati)하는 기법은 생명을 도관(道觀)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꼭 호흡만을 사띠(Sati)해야 하는가하는 의문이 생기시죠? 그래서 아나빠나 사띠(Anapana-Sati)에서는 사띠(Sati)의 대상을 다양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사람의 행위 형태를 4위의라고 하여 행주좌와(行住座臥)라고 합니다. 엄청난 행위를 하는 것 같지만 정작은 이 네 가지로 구분됩니다. 그래서 행(行)에서는- 걷는 것에서는 칼의 움직임이 호흡보다 커서 잡기 쉬움으로 발에 사띠(Sati)를 두어 ‘왼발, 오른발’부터 사띠(Sati)해 가는 것이요, 주(住)- 멈춰서고, 좌(座)- 앉고, 와(臥)- 누워서는 가장 강하고 알기 쉬운 부분이 호흡입니다.
그렇다면 왜, 발의 움직임이나 들숨날숨을 보라고 하고 또 봐야하는가? 발바닥 보고, 콧 구멍보는 데서 무슨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 의심이 가지 않습니까? 그것은 이 과정(道)을 통하여 깨달음(果)을 얻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자, 돌이켜 보십시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생각은 잡생각, 망상, 번뇌임이 보이지 않습니까. 대상에 따라 두 순간도 머물지 않는 마음이 대상이라는(내 주체와는 관계없는) 손님들로 들끓는 것이 흔히들 말하는 생각(잡생각, 망상, 번뇌)이라는 것들이지요. 확률이 거의 제로(Zero)에 가까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서 우리의 순수의식을 읽고 이 같은 번뇌망상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면 이 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지배하는 주인을 번뇌 망상에서 사띠(Sati, 알아차림)로 바꾸는 일이 바로 들숨날숨 알아차림의 수행입니다. 한 순간이라도 놓치면 여지없이 그 자리를 파고드는 것이 번뇌 망상입니다. 진리라는 것이 요원한 곳에 휘황찬란하게 자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금 여기’에 소박하게 우리와 함께 항상하고 있음을 우리는 수행을 하기 전에 몰랐을 뿐입니다.
자! 이제 이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면서 하느냐’ 아니면 ‘명근(命根)으로 그냥 할 뿐이라며 모르면서 하느냐’가 수행을 하시는 분인지 안 하시는 분인지를 갈라놓습니다.
이제부터는 들숨이라 알고 숨을 들이마시고, 날숨이라고 알고 숨을 내보내고, 거친 숨, 긴 숨, 짧은 숨, 미세한 숨이라 알아차리는 아나빠나 사띠(Anapana-Sati)를 생활화 합시다! 글: 도이, 연방죽선원 약수연수행처 상임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