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재 | | 2009-06-22 (월) 13:21
4. 인터뷰와 담마토크(interview & Dhamma talk)
일상의 수행시간표 외에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은 사야도(sayadaw 큰스님), 여기에선 우리에게 계를 내리신 계사(戒師) 스님과의 인터뷰가 있다. 우리말로 굳이 바꾸자면 옹색하지만 신행상담이라고나 할까. 통역은 영어와 한국어와 일본어이다. 내용은 그간의 3∼4일 동안 수행에서 얻은 정신적 변화를 점검하는 것을 위주로 그 알아차림의 현상에 대한 질의응답이다. 교리적 문답이 아니다 오로지 ‘정신과 물질’로 분리해 관찰한 내용이다.
우리는 ‘몸과 마음’이 있는지는 알았어도 한 번도 이것을 혹은 지속적으로 이것을 분리해서 관찰한 적이 없다. 이 수행은 마음이 몸을 보는 것이요, 마음이 마음을 보는 수행이다. 위빠사나 수행 중의 몸과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의 구체적인 내용이 스승이 묻고 답하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스승이 수행 중에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가 물으면 수행자는 자기가 앉아서 혹은 걸으면서 한 그대로 좌선 시에는 ‘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계속 명칭을 붙여서 알았고 행선시에는 ‘오른발 왼발’을 명칭을 붙이며 “알아차렸습니다”를 대답한다.
이는 사람의 사위의(四威儀)인 행주좌와 중행(行住坐臥中行)에는 발걸음의 ‘왼발 오른발’을 주즉입선시(住卽立禪時)에는 ‘서있음’과 들숨날숨을 알아차리고 좌와시(坐臥時)엔 배의 ‘일어남 사라짐’ 등 발과 배에 기준점을(bace camp) 설치해 놓고 놓침이 없이 알아차리는 것이다. 수시로-아니 쉴 사이 없이 찾아드는 망상(妄想)이나 번뇌(煩惱)가 오면 그것을 ‘번뇌망상’이라고 알아차리면 신기하게 그 망상은 사라진다. 사라지는 끝을 알아차렸으면 즉시 마음을 몸의 베이스캠프(base camp)인 ‘배’와 혹은 ‘발’에 붙이는 것이다.
이렇게 순일한 알아차림을 답하면 사야도는 그 다음 단계의 점차적인 수행방법을 일러준다. 예(例)를 들면 ‘이제 배의 일어남 사라짐에서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봐라!’는 등의 보는 방법도 얘기하신다. ‘사라짐의 끝자락을 보면 자연히 보이고 알게 된다. 억지로 사유와 숙고로써 만들어 알려고 하지 말라!’
경행도 이제는 ‘왼발, 오른발’의 1박자에서 ‘들어 놓음’의 2박자로 알아차림 하라! 이런 식의 가르침이고, 다음번의 인터뷰에서는 그 상태를 점검하고 잘못을 시정하고 그 다음의 방법을 제시한다. 사야도와 인터뷰 없이 더 수승한 정신세계를 자기 알음알이로 판단하고 진행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도그마에 빠지게 되고 대승에서 즐겨 쓰는 무기공에 빠진다. 그런 점을 철저하게 끄집어내고 교정해준다. 관념적인 얘기는 이곳에서 웃음거리다 오로지 현재 실재하는 리얼리티(rearlity)만을 얘기하고 답한다. 즉 궁극적 진리인 빠라마타(Paramatha)의 ‘몸(28), 마음(1), 마음부수(52), 열반(1)’의 네 가지에 국한된 수행이다. 관념(Panatti)을 떠나라고 훈련하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오로지 ‘여기 그리고 지금(here & now)’이다. 그 위에서 궁극적 진리만을 살피는 것이다.
오온 중 상(想)은 표상(表相) 작용이 아닌가. 이름 붙이고 모양 그리고 이런 것은 철저한 관념이다. 여기에서는 알아차림(sati)을 상(想)이라 한다. 세속(世俗)의 삶을 관념적 진리의 삶이라고 한다. 대승의 가르침과는 이런 것에서 간격이 있게 된다. 그래서 사야도의 지시대로 따르고 수행하다보면 7가지 청정을 닦아 10가지의 지혜를 증득하고 아라한까지 16단계에 이르는 단계별 발전을 스승이 지도 점검해주는 것이며 철저하게 그 성장을 가이드한다.
그래서 수행과 교리를 배우는 것을 100원 짜리에 비교하면 사야도와의 인터뷰는 10,000원짜리라고 한다. 한국어 통역이 별로 신통찮아 디테일(detail)한 부분은 잘 전달되지 않지만 묻고 또 묻고 하다보면 20∼30분이 금방 지난다. 빨리 끝냈으면 하는 눈치조차 없다. 알 때 까지 답해준다 이 얼마나 훌륭한 지도자의 모습들인가. 대승 쪽처럼 주장자 날아오고 할이 터지고 죽비소나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에는 그 사야도와 담마 토크(dharma talk)가 있다. 사야도가 1차적으로 미얀마어로 설법을 하면 이어 영어로 통역하고 두 번째는 한국어 다음은 일본어의 순서로 통역한다. 기타 나라 승려와 요기(yogi)들을 영어로 해야 한다.
담마토크의 주제는 설법 사야도의 저서로써 주(主)를 이루는 것은 사념처경 수행을 위빠사나로 하는 것을 설한다. 다음은 니까야 이야기, 아비담마나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에서 인용하고 자타카(부처님의 전생담) 얘기도 있다. 모두가 흥미진진하고 말로 설명하면 누구라도 쉽게 이해되는 담마토크다. 40~50분의 대화(talk)가 끝나면 질의응답시간이다.
관념적인 질문이 나와도 사야도가 짜증낸 걸 못 본다. 그저 자비로운 웃음속에 궁극적 진리 안으로 유도하고 대답해가신다. 특히 기도에 대한 질의를 한 딜라신(한국의 보살님)이 있었다. 답은 간단하다 ‘수행자의 축적된 성향이 싸마타(Samatha)로 흘러가는 것을 위빠사나로써 통찰 지혜수행을 하라’ 로 수행자의 방향성을 뚜렷이 제시할 뿐 탓하고 평하지 않는다.
5. 수행생활과 이 나라의 합장 문화
언젠가 도올 김용옥 선생이 MBC에서 금강경 강좌를 하실 때 귀담아 들었든 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난다. 그가 20대에 어느 사찰에서 공부할 때 아는 스님의 승복을 빌려 입고 고향집을 다니러 갔었단다. 그때 거리에서 만난 보살님들이나 거사님들의 합장인사에 너무나 놀라고 무안스러웠다는 얘기다.
빅쿠(Bikkhu)는 아라한의 깃발인 가사를 수지한 최사의 수행자로 대접받는다. 오전 중에는 시내(市內)에서 버스도 택시도 공짜로 타는 수가 있고 전국 어느 곳에서나 오전 중(11시전)에는 탁발의 안행을 볼 수 있는 나라다. 이 같은 문화에 승려의 사회적 위상은 대단한 것이다. 아무튼 빅쿠를 만나는 이의 모두는 가든 길이나 하던 일을 멈추고 공손히 합장 배례하는 것이다. 선원에서는 100%의 모습이다. 나도 처음에는 도올같은 심경이었다. 한국에서와 같이 빅쿠는 합장의 예로 답하지 않는다. 그냥 가던 길을 눈길도 주지 않으며 도도하리만치 가야한다. 빅쿠가 되어 합장의 예를 올리는 것은 부처님과 사야도(스승)뿐이다. 허긴 일반 불자들이 올리는 비쿠에 대한 합장인사는 대상이 외국인이라서도 아니고 잘 생기고 건강하고 젊은 비쿠이기 때문이 아니다. 입고 있는 가사장삼을 이곳에서는 아라한의 깃발이라고 칭한다. 아라한이 되기 위해 빅쿠가 그 깃발을 온몸으로 세우는 것에-당간지주- 예를 올리는 것이다.
사원 내에서 공양간의 150여명 자원봉사자도 모두 일손을 놓고 똑바로 선채 빅쿠의 행렬이 끝날 때까지 합장하고 서 있다. 경행 중 만나는 나이어린 딜라신(이곳 상좌부에서는 비구니가 없다. 그 계를 내리는 계단이 없어졌기 때문에 계를 지키는 여인이란 뜻으로 딜라신이라한다) 3명이서 나와 마주치자 길거리에서 신발을 벗고 그대로 3배의 예를 올린다. 한번은 나무 밑에서 잠깐 쉬는데 지나가던 보살 네 명이서 땅바닥에 꿇어 앉아 3배의 예를 올리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보니 나도 당연시 봐지는가. 오! 부끄러워라. 난 아직 도과를 성취 못한 풋내기 수행자인 것을!
오! 경배를 올리는 모든 불자님들 경이롭고 아름다워라! 모든 이들 고통을 여의고 행복하고 건강하시고 도과를 얻으시도록 마음속으로 축원하고 또 축원해주었다. 이와 같이 이곳에서 불교는 종교이며 생활에 녹아든 중요한 일부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