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15 (금) 00:00
육조단경 성지 대감사서 혜능을 생각하다
혜능은 광효사와 육용사가 있는 광주 땅을 떠나 조계산으로 간다. 소주(현 소관)에 들른 것은 조계산 보림사(현 남화선사)에 주석하다가 소주 자사 위거(韋據)의 간청이 있어 대범사(大梵寺)로 와 <단경>을 설한다.
순례 일행은 소관으로 가 대감사(大鑑寺)를 참배할 예정이다. 그런데 대감사가 그 당시 <단경>을 설했다는 대범사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대감사는 혜능대사가 입적한 지 1백여 년 만에 내려진 시호 대감(大鑑)을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도 대사가 입적한 후 5백여 년이 지나서 창건된 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감사는 <단경>을 설한 곳이 아니라 훗날 <단경>을 발간하여 널리 유통시킴으로써 유명해진 절이 아닐까.
조영록 박사는 현지를 답사한 결과 실제 대범사로 추정되는 터를 찾았다고 발표한 적도 있다. 대감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무강교가 있는데, 바로 그 다리를 지난 첫 교차로 지점인 언덕배기(혜민 북로(惠民 北路) 51호)에 무강을 마주보고 자리한 대범사가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조 박사는 대범사가 9세기 초에는 우리나라 조계종 종조인 도의국사가 구족계를 받은 절이기도 한 보단사(寶壇寺)로 불려졌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조당집> 17권 ‘설악 진전사 원적선사전’에 도의국사가 오대산을 참배한 후 ‘보단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고 기록돼 있는데, 조 교수는 혜능대사가 처음으로 <단경>을 설한 것을 기리기 위해 <단경>의 또 다른 이름인 <법보단경(法寶壇經)>의 ‘보(寶)’자와 ‘단(壇)’자를 차용해 ‘보단사’로 불렀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대범사가 훗날 보단사로 그 이름이 바뀐 까닭은 혜능대사가 설한 <단경>의 내용과 사상이 남방 전역에 그만큼 뿌리내렸다는 방증이 아닐까. 원래 경(經)이란 부처의 가르침만을 뜻하고, 수행자들의 저술은 논(論)이나 소(疏)로 부르는데, 유독 혜능대사의 법문만큼은 유일무이하게 경을 붙여 <단경>이라 했던 것이다.
저물 무렵에야 소관시에 도착하여 시내 저잣거리 한편에 있는 대감사로 들어선다. 사천왕문 안에서 중국스님이 금색 표지로 된 <단경>을 순례 일행에게 무료로 나누어 준다. ‘단경성지’ ‘대감선사’라는 두 개의 편액이 <단경>을 설한 장소라는 것을 강조하지만 그래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차와 다구를 파는 저잣거리 안에 있어 그런지 대감사 경내가 너무 비좁다. <단경> 서품에는 보림사에 주석하고 있던 혜능대사가 소주 자사 위거의 초청으로 대범사로 와 설법하는 광경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혜능대사께서 대범사 강당 가운데 높은 법좌에 올라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며 무상계를 수계하셨다. 그때 청중은 승니와 도속 모두 1만 여 명이나 되었다. 소주자사 위거 및 여러 관료 30여 인, 유사 몇 명이 함께 대사에게 마하반야바라밀경을 설해 주시기를 청했다. 도를 배우는 이들이 이 종지(宗旨)를 계승하고 서로 전하여 의지하는 기준으로 삼고자 이 단경을 설하셨다.’
현재 대감사의 규모나 위치로 볼 때, 1만 여 명이 대사의 설법을 어떻게 들었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 다만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시내에 대감사가 자리한 것으로 보아 당시 여러 사찰들 중에서 <단경>을 발간하고 유포했던 ‘단경성지’가 아니었는지 짐작이 될 뿐이다.
대웅보전으로 들어가 방금 받은 금색 표지의 <단경>을 앞에 놓고 잠시 눈을 감는다. 그러자 문득 <단경> 속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청정하면 석가요 평직하면 미타요
‘부처를 이루고자 할진대 자기 성품을 향하여 지을 것이요 몸 밖을 향하여 구하지 말라. 자성이 미혹하면 중생이요 자성을 깨치면 부처니라. 자비는 관음이요, 희사는 세지(勢至)가 되고, 능히 청정하면 석가요, 평직(平直)하면 미타요....’
부처가 되려 하지 말고 이미 부처임을 깨달으라는 말씀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혜능대사의 견성성불이란 성품을 보고 닦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품을 보고 그대로 깨닫는 주체가 부처라는 말씀 같다.
‘본래 바른 가르침에는 돈(頓)과 점(漸)이 없다. 사람 따라 바탕에 총명함과 우둔함이 있어 우둔한 사람은 차츰 계합하고 총명한 사람은 단박에 깨친다. 그러나 스스로 본심을 알고 본성을 보면 차별이 없다. 돈이니 점이니 하는 것은 헛이름을 붙인 것이다.
내 이 법문은 위로부터 내려오면서 먼저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으로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고, 무주(無住)로 본(本)으로 삼았다. 무상이란 상에서 상을 여읨이요, 무념이란 생각에서 생각이 없음이요, 무주란 사람의 본성이 선하거나 악하거나 밉거나 곱거나 원수거나 친하거나 모질거나 거친 말을 하거나 속이고 다툼을 당하거나 할 때 그 모두를 공(空)으로 돌려 대들거나 해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단경>의 기연품에는 사람 냄새 물신 나는 이런 일화도 있다. 법달(法達)은 홍주 사람인데, 7살에 출가하여 항상 <법화경>을 읽었다. 어느 날 혜능대사를 찾아와 절하는데 머리가 땅에 닿지 않았다. 혜능대사가 꾸짖었다.
“그렇게 머리 숙이기가 싫으면 무엇 하러 절을 하느냐. 네 마음속에는 필시 무엇이 하나 들어 있는 모양인데 무엇을 익혀 왔느냐.”
“<법화경>을 외우기 이미 삼천 독(讀)이 넘었습니다.”
“네가 설사 만 독을 해 경의 뜻을 통달했을지라도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면 도리어 허물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구나. 내 게송을 들어라.”
절은 본래 아만을 꺾자는 것
어찌하여 머리가 땅에 닿지 않는가
나라는 것이 있으면 허물이 생기고
공덕을 잊으면 복이 한량없는 것을.
“네 이름이 무엇이냐.”
“법달이라 합니다.”
“네 이름이 법달이기는 하나 아직 법에는 이르지 못했구나! 다시 내 게송을 들으라.
네 이름을 법달이라 하나
힘써 외울 뿐 쉬지 못했구나
허투루 외우는 것은 소리만 따를 뿐
마음을 밝혀야 보살이 되느니
너 나와 더불어 인연 있기에
내 이제 너를 위해 말하노라
침묵이 부처임을 믿는다면
입에서 저절로 연꽃이 피리라.
법달이 게송을 듣고 깊이 뉘우치며 말했다.
“앞으로는 반드시 모든 것을 공경하겠습니다. 제가 <법화경>을 외워도 아직 경의 뜻을 모르므로 마음 한 구석에 항상 의심이 있습니다. 대사께서는 크신 지혜로 경의 뜻을 가르쳐 주십시오.”
“법달이 법은 통달했어도 네 마음은 모르는구나. 경에는 본래 의심이 없는데, 네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는 것이다. 네가 <법화경>을 왼다고 하니 묻겠다. <법화경>은 무엇으로 종(宗)을 삼는다고 생각하느냐.”
“어둡고 둔해 다만 겉으로 글자나 읽었을 뿐 어찌 그 뜻을 알겠습니까.”
“나는 글자를 모르니 네가 경을 한 번 외워 보아라. 내 마땅히 너를 위해 설하리라.”
법달이 큰소리로 경을 외워 비유품까지 이르니 혜능대사가 말했다.
“그만 외거라. 이 경은 본래 인연출세(因緣出世)로 종을 삼는 것이니, 비록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나 다시 이를 넘지 않는다. 인연이란 무엇인가. 경에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이 한 가지 큰 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했으니 큰 인연이란 부처님의 지견(知見)이니라. 세상 사람들이 밖으로 미혹하여 상(相)에 걸리고, 안으로 미혹하여 공(空)에 떨어지니 만약 상에서 상을 여의고, 공에서 공을 여의면 즉시 안팎으로 미혹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 법을 깨달으면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리니, 이를 부처님의 지견이 열렸다고 하느니라.(중략) 너는 경의 뜻을 잘못 알지 않도록 삼가라. ‘이것은 부처님의 지견일 뿐 우리들 분수에 맞지 않는다.’ 하는 견해를 짓는다면, 이는 바로 부처님을 헐뜯고 경을 비방하는 일이다. 이미 부처이며 지견을 갖추었으니 어찌 따로 열 것이 있겠느냐. 부처님 지견이란 곧 너 자신의 마음이니 따로 부처가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법달이 물었다.
“만약 뜻을 안다면 수고롭게 경을 외우지 않아도 좋겠습니까.”
“경에 어찌 허물이 있다고 네가 외우는 것을 못하게 하겠느냐. 다만 막히고(迷) 트임(悟)이 사람에 달려 있고, 더하고 덜함이 자기에게 달렸으니 입으로 외고 마음으로 행하면 경을 읽는 것이요, 입으로는 외워도 마음으로 행하지 못하면 오히려 경에 읽히는 것이니라. 다시 내 게송을 들어라.”
마음이 미혹하니 <법화경>에 읽히고
마음을 깨치니 <법화경>을 읽는구나.
아무리 경 외워도 자성을 못 밝히면
뜻과는 오히려 원수처럼 등지네
무념(無念)으로 경을 외우니 바른 길이 또렷하고
유념(有念)으로 경 외우니 그릇된 길 헤매는구나
유념 무념 모두 다 계교(計較) 않으니
길이길이 백우거(白牛車; 자성)를 타고 노니네.
법달은 게송을 듣고 크게 깨쳤다. 그런 뒤 슬피 울면서 말했다.
“법달은 이제까지 실로 한 번도 <법화경>을 읽지 못하고 <법화경>에 읽혀 왔습니다.”
대감사 법당을 땅거미가 지는 시각에 나서는데, 혜능대사께서 법달에게 꾸짖었던 것처럼 내게도 ‘부처가 되기를 바라지 말고 네 자신이 부처임을 깨달으라.’고 사자후를 토한다. 미망의 나에게 읽히지 말고 이미 부처인 나를 읽으라고 불벼락을 치는 것 같다.
茶提 정찬주(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