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8일(토요일). 아침부터 날씨가 장난이 아니게 춥다. 따뜻한 방바닥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자니 그 달콤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쏙 사라져 버린다.

‘어젯밤에 눈이 제법 많이 내렸는데. 이런 날 아침이면 겨울 산의 풍경은 그림 같이 아름답기만 할 텐데…’

산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면서도 막상 이부자리 속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무릎도 썩 좋지는 않고, 날씨도 몹시 추우니 이불 안의 편안함을 선택할 좋은 핑계거리가 있는 셈이다. 지기들과 산행 약속을 한 것도 아니면서도 그런 핑계로 내 스스로에게 미안함을 덜어보려는 심사일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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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망월사 영산전의 설경. 기암절벽 아래 자리한 전각과 눈덮인 도봉산이 보여주는 설경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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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사로 접어드는 길목에 자리한 대원사의 설경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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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 계곡수가 소를 이뤄 색다른 설경의 맛을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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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사 오르는 길에 있는 불자가 새겨진 샘터. 꿀맛같은 감로수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자꾸 망월사의 눈 내린 풍경이 아른거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난해 봤던 그 설경이 떠올라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나는 작년에도 눈이 내린 후 눈이 오면 좋아 이리저리 날뛰는 개처럼 도봉산을 뛰어올랐던 것이다.

11시경. 도저히 안 되겠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부랴부랴 산행장비를 챙긴다. 올 들어 처음 하는 겨울 산행이니 쑤셔 박아 둔 장비들 찾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방한용 귀 덮개와 아이젠, 스패츠를 찾아서 배낭에 넣고 물을 끓여 보온병에 담고, 주섬주섬 등산복을 입으면서 버프도 함께 착용한다.

그러기를 무려 한 시간여. 집 대문을 나서던 시간이 12시가 다 되었다. 지하철을 타고 망월사역에 도착하니 어느 새 시간은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다. 신흥대학을 지나 망월사탐방지원센터까지는 그래도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다. 아스팔트 포장도로인지라 제설작업이 잘 돼 있는 덕이다.

드디어 망월사로 오르는 계곡으로 접어드니 흰 눈이 발목까지 쌓여 있다. 그러나 그 동안 설경을 만끽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간 때문인지 눈이 잘 다져져 패츠를 착용할 필요까지는 없으니 좋다.

계곡은 온통 흰 눈 천지다. 눈 쌓인 계곡은 얼지 않았고 청정한 계곡 물은 영롱하니 햇빛을 투과해 바닥까지 비추어 속살을 내보이고 있다. 눈 쌓인 계곡의 소에서 또 다른 맛을 가진 설경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본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산길이 점점 가팔라진다. 다행히 내내 좋지 않던 무릎도 속을 썩이지 않으니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서서히 땀이 나고 더워지기 시작을 한다. 외투 하나를 벗어 배낭에 매달고 조끼 차림으로 오른다.

하산하는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본다. 이 추운 날 셔츠에 조끼 차림으로 산을 오르고 있으니 아마도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체온이 많이 올라가면 벗어서 허리춤에 매달고 가는 것이 훨씬 낫다. 외투 안이 축축해지면 셔츠도 젖어들고 정작 매서운 추위와 맞닥뜨리는 곳에서는 몸이 얼어붙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덕재샘에 이르니 걸음걸이가 조금씩 느려진다. 5개월 만에 하는 산행이라서 그런지 다리가 많이 무겁다. 다행히 체력에는 문제가 없는데, 조금 불어난 체중이 다리에게 부담을 주는 모양이다. 그래도 쉼 없이 계곡 산길을 따라 오른다.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망월사가 조금씩 그 모습을 내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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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사 영산전으로 오르는 길. 그 사이에 부토탑과 문수굴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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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전을 오르면서 그림처럼 앉아 있는 천중선원을 내려다본 경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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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전과 함께 바라본 조망. 멀리 수락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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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산전 앞에서 망월사 전경을 내려다본다. 이런 설경이 해마다 눈내리면 망월사앓이를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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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를 얹은 돌담 너머에 있는 낙가보전의 멋들어진 추녀.


드디어 망월사. 망월사의 작은 문으로 들어서면서 합장을 하고 망월사의 푸근한 품속으로 폭 파묻힌다.

먼저 영산전으로 올랐다. 영산전 앞에서는 그림 같은 조망과 망월사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산전 앞에서 산아래 펼쳐진 세상을 내려다본다. 수락산도, 불암산도 한 눈에 들어오고 의정부 호원동 일대는 손바닥만 하게 보인다.

천상에서 사바세계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이럴 것이다. 설국으로 바뀐 세상 풍경은 그 어떤 수묵화 보다 아름답다. 이런 풍경은 신선이 신묘한 붓으로 산수화 한 폭을 그려 놓은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암을 병풍처럼 두르고 흰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망월사의 전경은 탄성을 절로 일게 할 정도로 환상적이다. 신선들이 사는 세상이 있다면 바로 이 모습이지 않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망월사의 설경이 그리워 해마다 나는 겨울이 되어 눈이 오면 ‘망월사앓이’를 하게 되는 것이다. 기왕에 오를 것인데, 게으름 부리지 말고 조금만 더 서두를 것을!

지금은 스님들의 동안거 기간이다. 이곳 망월사 선방에서도 납자들의 혹독한 수행정진이 한창이다. 때문에 경내를 걷는 걸음은 몹시 조심스럽기만 하다.

망월사는 역대 큰스님들이 거쳐 간 수행처로 무척 유명한 사찰이다. 망월사의 선원은 천중선원(天中禪院)이라는 이름으로 불리 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도봉산의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그 만큼 하늘과도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천중이라는 이름이 붙여 진 듯하다. 선방의 이름이 ‘하늘 가운데’이니 말 그대로 예가 천상이 아니고 또 어디가 천상이라는 말인가. 그런 이곳이 흰 눈으로 눈부시게 장엄을 했으니 이곳이 천상이고 선경(仙景)인 것이다.

조계종의 종립선원인 천중선원은 예로부터 많은 운수납자들이 머물며 정진하는 유서 깊은 간화선의 수행도량으로 지금도 많은 수행자들이 찾는다. 도인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명망이 높은 망월사이고 천중선원인 것이다. 그렇게도 그리움 많던 망월사를 한동안 돌아본 뒤, 포대능선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을 한다. 당초 계획은 망월사까지만 오른 후 하산 할 계획이었으나 막상 망월사에 오르고 나니 정상은 디뎌보고 싶은 욕심이 발동한 것이다. 예까지 왔는데 그냥 내려가기가 너무도 아쉬운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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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포대능선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천상의 풍경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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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수락산의 전경. 눈덮인 아름다운 설경이 천상에서 바라다본 사바세계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포대능선의 정상 봉우리. 칼바람보다 무서운 곡괭이바람이 휘몰아친다. 칼바람은 뺨을 후려치는 따귀 맞는 느낌이라면 곡괭이바람은 매섭게 달려 온 바람이 얼굴을 후려치면서 퍽퍽 쇠붙이로 찍어대는 느낌이라 곡괭이바람이라고 표현하게 된 것이다.

벗었던 외투를 다시 입고 버프로 눈 아래까지 가리고 나니 조금은 살 것 같다. 포대능선을 진입해서 다시 세상을 내려다본다. 봉우리에 쌓인 하얀 눈을 밟고 섰으니 마치 구름 위에 서있는 듯하다. 흰 구름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격이니 지금 만큼은 내가 곧 신선이다. 어떤 수사로도 표현이 어려운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조망이다.

포대능선을 마저 걸어 다락능선으로 하산을 생각해 보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야만 한다. 다시 망월사로 내려 와서 해우소 앞 긴 의자에 자리를 잡고 컵라면 하나로 요기를 했다. 뜨끈한 국물이 들어가니 온 몸이 다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망월사 해우소 앞도 풍광이 기가 막히게 좋은 곳이다. 흰 눈을 뒤지어 쓴 기암 아래 영산전 전각이 멋들어진 풍경으로 눈에 들어오고 그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면서 뜨끈한 컵라면 국물을 들이키면 온갖 상념이 독백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지금 보고 가는 이곳 도봉산과 망월사의 풍경은 그대로가 천상의 풍경이다. 이 아름다운 천상의 풍경을 보았으니 사바세상으로 돌아가거든 이곳의 풍경은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고 신선들이 부탁을 해도 나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말할 것이다. 설사 그것이 곧 천기누설이라고 하더라도 이 아름다운 풍경을 세상 사람들에게 말해 주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