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붓다
2008-10-14 (화) 00:00
크게보기“이 책 대전 선사의 『반야심경』주해는 구절구절이 모두 금옥(金玉)과 같아서 후학들에게 바른 길을 직접 가리킨 것이니, 어리석어 바른 길을 잃은 자에게는 표장(標章)이 되고, 비록 도행(道行)이 있더라도 마음속에 삿된 소견이 들어있는 자에게는 영약(靈藥)이 되며, 어둠속에 길 잃은 자에게는 밝은 등불이 되고, 문 밖에서 헤매는 사람에게는 표본이 되는 주석이며, 바른 눈을 얻지 못한 자에게는 표준이 되는 안목이다.”
-전 조계총림 방장 구산(九山) 스님의 중간서(重刊序) 중에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을 통한 선(禪) 입문(入門), 선사의 체험으로 새롭게 열어 보인 반야의 세계, 그 깨달음의 안목이 돋보이는 책이 출간됐다. 대전요통 화상의 반야심경 주해를 선사 현봉 스님이 옮겼다.
반야심경은 260자로 이루어진 짧은 경전인데, 600부 반야경전의 정수일 뿐만 아니라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응축시켜 놓아 전 세계의 불자들이 가장 많이 수지 독송하는 경전이다. 불교의 모든 법회나 의식에서 거의 빠짐없이 독송하고,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반야심경 한 두 구절은 읊조릴 정도로 대중적인 경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반야심경의 주해서도 수십 종에 달한다.
송나라 때 대전요통 화상이 주해한 이 책이 수십 종의 반야심경 주해서 중에서도 백미로 손꼽힌다. 사전적이거나 교학적인 주해서가 아니라 선사(禪師)가 직접 체험한 반야(般若)를 구절구절마다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비로소 교(敎)와 선(禪)이 둘이 아니라는 말을 체득하고, 교학에 머물던 이가 마음 법을 깨달아 선수행자로 환골탈태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파초껍질을 벗기듯이 한 꺼풀 벗겨내고 또 한 꺼풀 벗겨내어 곧바로 모든 것을 다 벗겨버려 더 손댈 곳이 없게 되면 본래의 근원으로 되돌아 간 것이니 오온이 공하여져 부모에게서 생겨나기 전과 같으리라. 모든 것을 다 태워 없애버리면 공하여도 공하지 않은 곳에 이르게 되고, 이 몸을 벗어나 모든 것을 잊고서 자취마저 사라지고 나면 온몸이 그대로 손이며 눈이니, 거기에는 가는 먼지 하나라도 묻힐 수가 없으며 이름조차 붙일 수가 없게 되어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과 육도(六度)의 온갖 만행(萬行)과 두타(頭陀)의 모든 고행을 한꺼번에 벗어나 마치 마른 나무등걸 같고 식어버린 재와 같게 되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百不會底人)’이라 하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오늘날 밖을 찾아 헤매는 현대인들이 자신의 내면을 향해 돌림으로써 자신의 참모습을 찾고, 우리 삶이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그 가운데서도 모든 것이 넉넉하게 갖추어져 있음을 일깨워 주는 선서(禪書)가 될 것이다. 값 13,500원 불광출판사
*지은이 대전·요통(大顚·了通) 화상은?
대전·요통(大顚·了通)화상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찾기 어렵다.
12세기 경 중국 송나라 때의 조동종 계통인 보봉·유조(寶峰·惟照)선사의 법을 이은 제자 가운데 가흥부(嘉興府) 보은(報恩)의 대전·통(大顚·通)선사(禪師)가 있으니 그분이 아닌가 추측 된다. 주해 속에 인용된 말 가운데 가장 늦은 것이 보봉유조(1084~1128) 선사의 게송(偈頌)이며, 조선에서도 태종(太宗) 때인 영락(永樂) 신묘년(辛卯年, 1411년)에 중간(重刊)하게 되었다 하니, 이 주해서는 1150년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전선사는 반야심경을 주해하면서 여러 경전과 인도 중국의 여러 선사들의 말씀을 두루 인용하고 노·장(老·莊)과 논어(論語)의 글을 뽑아 쓰는 것을 보면 선사이면서도 교학(敎學)과 도가(道家)나 유가(儒家)의 학문에도 두루 통한 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옮긴이 현봉(玄鋒)스님은?
현봉(玄鋒) 스님은 1974년 승보종찰 송광사(松廣寺)에서 구산(九山)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5년 송광사에서 구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였으며, 송광사, 봉암사, 해인사, 백련사, 수덕사, 극락암, 월명암, 수도암, 칠불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행하였다. 조계종 제11, 12대 중앙종회의원과 법규위원, 정광학원 이사 및 재심호계위원 등의 이름을 띠기도 하였고, 조계총림 유나와 송광사 주지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송광사 광원암(廣遠庵)에서 농사일을 하며 지내고 있다.
*옮긴이 현봉 스님의 말
몇 년 전 봄에 장흥(長興)의 탐진강(耽津江)가에 있는 용호정(龍湖亭)에서 팔순이 넘은 어느 노유(老儒)를 만나, 처음으로 이 『대전화상주심경(大顚和尙注心經)』을 얻어 보게 되었다.
그 분이 말하기를 “6․25전란이 끝난 이듬해 어느 행상이 찾아와서 몇 권의 묵은 책을 내놓으며 ‘전화(戰禍)로 폐허가 되어버린 보림사(寶林寺)의 부서진 불상에서 나온 책인데 사랑방의 벽지(壁紙)나 될까 하여 팔러 다닌다.’고 하기에 아까운 생각이 들어 쌀 한 되를 주고 이 책을 구해 두었던 것이라.” 했다. 그러나 불가(佛家)의 글이라서 좀체 이해가 되지 않아 그냥 책 궤짝 속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한번 읽어보라고 하면서 나에게 건네어 주었다. 오랜 연륜 탓인지 서슬이 닳아지고 몇 자는 좀이 슬긴 했으나 거의 완전하였으며 내용을 읽어보니 참으로 얻기 어려운 보배를 만난 듯하였다.
그 책의 발문(跋文)을 보니 영락(永樂) 신묘년(辛卯年: 1411년 조선 태종 11년) 고창현(高敞縣: 오늘날의 전북 고창군) 문수사(文殊寺)에서 공선(空禪)이라는 스님과 몇몇 동참인(同參人)들이 발원(發願)하여, 『화엄경』의 「보현행원품」과 야보(冶父) 도천(道川) 선사의 『금강경』 주해와 대전(大顚) 선사의 『반야심경』 주해를 중간한다고 하였다.
그 해(壬戌) 겨울에 당시 송광사 조계총림(曹溪叢林) 방장(方丈)이시던 구산(九山) 큰스님께 이를 뵈어 드렸더니 “참으로 희유(稀有)한 주해서(注解書)다.” 하시면서 “이를 영인(影印)하여 널리 법공양(法供養)하도록 하라.” 하시기에 큰스님께 중간서(重刊序)를 청하여 이듬해(癸亥) 정초(正初)에 이를 영인하여 제방(諸方)에 유포하였다.
이 책의 저자(著者)인 대전(大顚) 요통(了通) 선사에 대한 정확한 문헌은 역자(譯者)의 과문(寡聞)한 탓인지 아직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추측컨대 중국 송(宋)나라 때의 조동종(曹洞宗) 계통인 보봉(寶峰) 유조(惟照) 선사의 법을 이은 선사 가운데 가흥부(嘉興府) 보은(報恩)의 대전(大顚) 통(通) 선사가 있으니 그 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분의 법계(法系)는 다음과 같다.
…동산(洞山) 양개(良介) → 운거(雲居) 도응(道膺) → 동안(同安) 도비(道丕) → 동안(同安) 근지(勤志) → 양산(梁山) 연관(緣觀) → 대양(大陽) 경현(警玄) → 투자(投子) 의청(義靑) → 부용(芙蓉) 도계(道楷) → 단하(丹霞) 자순(子淳)(?~1119) → 천동(天童) 정각(正覺)(1091~1157) → 보봉(寶峰) 유조(惟照)(1084~1128) → 대전(大顚) 요통(了通)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 등에 행적(行蹟)이나 기연어구(機緣語句)가 없이 이름만 실려 있을 뿐이나, 인명(人名)이 동일하고 주해의 내용이 선가(禪家)적인 해석이며, 선종 가운데에서도 여러 선사들의 말씀을 두루 인용하긴 하였으나 조동종 계통 선사의 말씀이 비교적 많은 편이며, 인용된 어구(語句) 가운데 가장 연대가 늦은 것이 단하(丹霞) 자순(子淳) 선사(?~1119)의 게송과 보봉(寶峰) 유조(惟照) 선사(1084~1128)의 게송 구절이며, 영락(永樂) 신묘년(辛卯年: 1411년)에 조선에서 이미 중간(重刊)된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하여 준다. 그러니 이 『반야심경』의 주해서는 1150년경에 저술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전 선사는 송(宋)대의 선사들이 거의 그러하듯 화엄(華嚴)의 원융사상(圓融思想)에도 많은 영향을 받은 듯하며, 이 주해서 가운데 화엄(華嚴)․법화(法華)․열반(涅槃)․유마(維摩)․능엄(楞嚴)․반야(般若) 등의 경전과 서천(西天)이나 중국의 여러 선사들의 말씀을 두루 인용한 것을 보면 선사이면서도 교학(敎學)에 널리 통달하였던 분임을 알 수 있고 나아가 노․장(老․莊)의 글을 이끌어 쓰고 논어(論語)의 말을 뽑아 쓰는 것을 보면 도(道)와 유(儒)의 학문도 두루 섭렵(涉獵)하였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반야심경』은 너무나 잘 알려진 경이다. 그 문장이 간결하고도 오묘하여 팔만장경(八萬藏經)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만큼 그 해석도 사가(師家)의 견해에 따라 제각기 다른 맛을 내게 마련이다.
이 주해서는 경의 제목 10자(字)와 본문 260자(字)를 모두 63절(節)로 나누어 주해하였다. 그러나 술어를 풀이하여 전문(全文)과 연결시키면서 구조적(構造的)으로 이해시키려는 사전적(辭典的)이고 교학적(敎學的)인 주해가 아니라 선사(禪師) 스스로 체험한 반야를 『반야심경』의 구절마다 그대로 전부 드러내 보이는 직설적(直說的)이고 선적(禪的)인 주해라는 점이 특이하다.
이 주해서를 중간(重刊)하던 해(1411년)는 조선이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다. 그 때에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일체중생이 다 같이 교화(敎化)에 젖기를 발원하여 『화엄경』의 정수인 「보현행원품」과 『금강경』 주해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야보(冶父) 도천(道川) 선사의 주해와 함께 대전(大顚) 화상의 『반야심경』 주해를 중간한다고 하였다. 당시에 이미 수십 종의 『반야심경』 주해서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대전 화상의 주해를 간행한 것은 이 주해가 백미(白眉)로 평가받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의 문명사회는 끝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갈수록 그 양상이 다원화되고 변화는 가속화되어 간다. 이리하여 우리는 잠재된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하며 온갖 편리와 풍요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밖을 향해 다른 것을 추구할수록 자신의 내면을 향해 정관(靜觀)하는 성찰(省察)이 필요하고, 변화가 심할수록 불변하는 고정적(固定的)인 힘이 강해져야 하며, 양상이 새로워지고 다원화될수록 근원적이고도 통일적인 본래의 참모습(實相)을 뚜렷이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통일적이고 고정적인 구심점이 약한 채로 질량과 속도가 늘어나면 역학적인 관계에서도 불균형이 심해지기 마련이다.
우리가 물질문명의 풍요 안에서도 빈곤함을 느끼고 갖가지 사상의 범람 속에서도 갈증이 멎지 않으며 급변하는 가운데서도 지루함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눈을 바깥으로 향해 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주심경(注心經)』은 800여 년 전에 저술된 『반야심경』의 주해서이지만, 오늘날 밖을 향해 분주히 헤매는 우리들의 눈을 자신의 내면을 향해 주시하도록 하여 우리들의 삶이 본래 아무것도 없는 그 가운데서 모든 것이 넉넉하게 됨을 일깨워주는 금언집(金言集)이 될 것이다.
이 『주심경(注心經)』을 옮기어 남에게 보인다는 것이 비탈 밭이나 가꾸면서 살아가는 산골의 납자(衲子)에게는 분외(分外)의 일인 줄 알지만 이 책을 만났던 희유한 인연을 생각하고, 주해의 끝부분에 ‘이 주해서를 만나보고 기뻐하는 사람은 이를 간행하여 널리 베풀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도록 하라.’ 하신 뜻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이를 다시 정리해 본 것이다. 옮긴이의 좁고 얕은 소견으로 대전 선사의 본뜻을 그르치지 않았는지 크게 저어할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창 문수사에서 중간할 때의 발문(跋文)을 함께 옮겨 실은 것은 그것이 바로 이 책을 만나는 우리들 모두의 염원이기도 한 때문이다. 2008년 가을 옮긴이 현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