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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 경내로 들어선다.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는 커다란 표지비석이 반갑고 뿌듯하다. 어느 왕릉이나 그렇듯 홍살문이 나타나고 정자각까지 신도와 어도가 이어진다. 정자각 안을 들여다보니 왕실 젯상이 재현되어 있다. 왕과 왕비의 젯상은 역시 화려하고 품위가 있어 보인다. 정자각은 건물이 '丁'자 모양을 하고 있어 정자각으로 불리며 능에 제사를 모시는 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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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자각은 태종이 없애 버린 것을 훗날 현종이 신덕왕후를 다시 왕후에 복위시키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런 것만 보더라도 당시 태종은 얼마나 신덕왕후를 미워했는지 알만하다. 정자각 너머 능침에는 여인의 한처럼 남은 잔설이 아직도 하얗게 쌓여 있다.

태조 이성계는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를 지극하게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인 향처와 서울에서 새로 얻은 부인인 경처를 두는 풍습이 있었다. 향처인 한씨 부인이 태조가 건국을 하여 즉위하기 전 승하해, 신덕왕후 강씨가 왕비로 책봉 되어 조선의 제1호 왕비가 되었다.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첫 만남은 전설이 되어 전해질 정도로 아름답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던 중에 심하게 목이 말라 우물을 찾게 되는데 때 마침 그 우물가에 아리땁고 고운 고을 처자가 있어 물을 청하게 된다. 그 처자는 바가지 가득 물을 담아 버들잎 한 움큼을 띄워 건네주었는데, 태조가 버들잎을 띄운 연유를 묻자 “갈증이 심하여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라고 처자가 답을 하자 그 갸륵한 마음씨에 반해 이성계는 그 처자를 부인으로 맞아들였고, 처자는 훗날 신덕왕후가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웬만한 옛날이야기라면 자주 등장하는 내용으로, 이 보다 진한 조선의 로맨스도 많지 않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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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의 신덕왕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신덕왕후가 죽은 후에도 이어지는데, 정릉 동쪽에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흥천사를 세웠다. 이 원찰에서 정릉에 재를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써 아침 수라를 들었다고 하니 이성계가 신덕왕후를 얼마나 극진하게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이 흥천사는 조계사의 말사로 연산군 때 소실되었는데 연산군의 훼불이 자행되던 당시라 절은 새로 짓지 못하고 불상과 기물만 양주 회암사로 옮겼다가 선조 때 옛날 함취정 자리에 신흥사라는 이름으로 옮겨지어지게 된다. 그 후 정조 때 승려 성민, 경신이 새로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인 정릉 입구 맞은편 돈암동에 옮겨 세워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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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工'자 모양의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는 흥천사 전각에는 신덕왕후의 원찰이라서 그런지, 지금도 당대 명필이던 흥선 대원군의 친필 현액들이 많이 남아 있다.

정릉의 능역은 넓고 클 뿐만 아니라 산림이 울창해서 지역주민들에게 휴식처 및 운동을 겸하는 산책코스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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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을 지나 산책로를 따라 오른다. 작은 휴게소 옆으로 약수터 하나가 보인다. 이곳은 할머니가 관리를 하기 때문에 할머니약수터로 불리는 약수터다. 그 약수터 옆으로 돌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남북통일이라고 비문이 보인다.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동 주민들이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그 비석 위로 높이 30~40Cm의 석축으로 된 작은 제단이 하나 보인다. 능안에 무슨 연유로 제단이 놓여있는 것일까? 알고 보니 정릉2동 마을주민들이 매년 음력 10월 1일 지내는 산신제로 옥황상제와 토지신에게 상을 차려놓고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제사라고 한다.

서울에서 이렇듯 마을제사가 남아 있는 곳이 드문 일인데, 정릉3동은 웃말(윗 마을)로, 정릉이 있는 정릉2동은 아랫말(아랫마을)이다. 지금도 웃말과 아랫말은 시월 초하루면 정성껏 제물을 준비해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정릉동이 서울시로 편입되기 전에는 고양군 정릉리였다. 정릉동이 지금의 정릉동이 되기 전에는 사을한리라는 지명을 갖고 있었는데 살한리의 우리말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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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능말 또는 능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가 구한말 정릉계, 정릉리로 불렸고, 현재 행정구역이 정해지면서 정릉동이 된 것이다.

원래 정릉(貞陵)이 있던 중구의 정동도 곧을 정(貞)자를 쓰는 정동이고 정릉이 있던 곳이 연유가 돼서 붙여진 동명이니, 왕비의 능 하나가 두개의 동네의 이름을 결정한 것이다. 그 만큼 당시나 지금이나 왕릉은 그 시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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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 내에는 산책로가 잘 조성이 되어있다. 솔숲 울창한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산책로는 총 둘레 2.5km로 산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운동량을 제법 필요로 한다. 땀방울이 송글송글 영글어갈 즈음. 문득 들려오는 어르신 두 분의 이야기에 눈과 귀가 번쩍 뜨인다.

“아마 저것보다 더 대단한 사랑나무는 없을거야.”

“그럼. 작품이지. 작품이야.”

마치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내게 들려주는 소리만 같다.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던 숲을 들여다보았다. 소나무 두 그루가 마치 칡 덩쿨처럼 얽혀있는 모습이다. 다 알다시피, 연리지 또는 연리목은 자연이 만들어낸 현상 중에 가장 신기하고도 보기 드문 현상이다. 연리지나 연리목은 대개 서로 떨어진 나무가 가지끼리 연결돼 한 몸을 이루거나 뿌리를 얽어 한 나무가 돼 있는 모습이다. 그 모습 때문에 사랑나무라고 불린다.

그런데 정릉 산책로에서 만난 소나무는 더욱 신묘하고 기이한 모습이다. 나무 기둥줄기의 뿌리 부분은 분명 두 그루의 소나무인데, 세월이 지나 두께가 두꺼워 지면서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두 개의 기둥 줄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곧게 자라던 줄기의 중간 부분부터는 마치 나무가 서로의 사랑을 탐닉하듯 서로의 몸을 꼬아 휘감아 오르고 있는 것이다.

진한 부부애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 순간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극진한 사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가 소나무로 다시 태어나 이렇게 영원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의 정릉. 이곳 정릉 숲에는 이처럼 두 그루의 소나무가 아름답게 사랑을 나누고 있는 ‘사랑나무’가 서 있다. 역사와 전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깃든 이 정릉 숲을 거닐며,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사랑나무도 찾고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느껴보자.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아주 작은 관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