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근의 고찰 파주 보광사를 찾아 나선다. 지하철 3호선 삼송리역을 벗어나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시큰한 바람 자락이 앙칼지게 귓불을 더듬는다. 아침에 집 대문을 나설 때만 해도 간밤에 내린 눈이 골목길에 소복이 쌓여있어 눈덮인 산사의 풍광에 대한 기대감이 자못 컸다. 하지만 이곳 보광사 가는 길목인 삼송리 일대는 적설량이 그리 많지 않아 슬며시 걱정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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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길 건너 버스정류장에서 금촌행 버스를 기다린다. 금촌행 버스는 수시로 오고 가건만 보광사를 지나가는 버스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질 않는다. 버스노선도의 배차간격 밑에 누군가가 써놓은 낙서에 공감을 하는 순간이다. 노선도에 표기된 배차간격은 25~30분. 그 밑에 '배차간격 1시간 ㅆㅂ'이라고 유성 펜으로 적어 놓은 낙서. 내맘을 그대로 표현해 놓은 것만 같아 속이 다 후련하다. 근 50분을 기다렸는데도 버스는 종 무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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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정류장에 혼자 남겨지길 수 차례. 기다림에 서서히 지쳐 갈 무렵 도착한 버스가 '왜 이렇게 반가운 거니!'

한참이나 치밀던 부아는 어느새 반쯤 삭아 내렸다. 버스에 올라 빈자리를 찾아 앉고 나니 서서히 시간 걱정이 들기 시작을 한다. 정오가 되기 전에는 보광사에 도착을 해야 할텐데, 삼송리역에서 보광사까지는 삼십여개쯤의 정류장을 있어 조바심이 인다. 그런 걱정에 잠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문득 운전석 옆 좌석 할머니와 기사의 대화가 귓전에 들려온다.

동네 얘기며 버스 기사의 근황을 주고 받는 할머니들. 서울에서 지근거리인데도 영락없는 시골 버스의 그런 풍경이다. 지방에서 버스를 타면 늘 마주치는 광경을 이곳에서도 다시 만난 것이다.

할머니가 주섬주섬 장바구니를 뒤지더니 빵 두 개를 꺼내 버스 기사에게 건넨다. 시장할 때 잡숴. 아이구. 할머니나 궁금할 때 잡숩지. 뭘 이런 걸…

보고만 있어도 훈훈해지고 기분 좋아지는 모습이다. 좀 전에 일어났던 울화도 시간 걱정도 봄눈 녹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이 버스는 한번도 급출발이나 급정차를 하지 않는다. 손님이 타면 손님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출발을 하고, 버스가 정류장에 진입할 무렵이 되면 서서히 속도를 줄여서 정차를 한다. 모두 손님의 안전을 위한 버스 기사의 작은 배려이다. 이 작은 배려에서 부처님의 자비심을 깨닫는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전부 '평상심이 도'라는 가르침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좀 전 내심 골을 부리고 싶던 생각에 부끄러운 마음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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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제법 속도를 내어 달린다. 길도 좋고 간밤에 내린 눈은 이미 제설이 끝나 도로도 미끄럽지 않다. 내리는 이 없고 기다리는 이 없는 정류장은 모두 그냥 지나치니 생각했던 것 보다 빠르게 고양시에 진입을 한다.

고양시내에서 아파트 단지 몇 군데를 돌아 버스는 다시 지방도로로 들어선다. 이제 몇 정류장만 더 지나면 보광사 앞에 도착할 것이다. 버스가 고개를 따라 구불구불 오르기 시작한다. 이 고개가 됫박고개다. 이 됫박고개를 넘으면 고양시에서 파주시로 넘어가는 것이다. 됫박고개를 넘어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보광사의 일주문 앞이다. 일주문 앞에서 합장인사를 올리고 보광사로 오른다. 초입 돌탑들이 흰 눈에 덮여 하얗다.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한참을 오르니 보광사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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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을 돌아 보광사 경내로 들어선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전각이 대웅보전이다. 다시 찾아보는 보광사의 대웅보전. 여전히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채 고색창연하다. 이태 전 늦봄 이곳 보광사를 찾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제일 먼저 이곳 대웅보전에 눈길이 꽂혔었다. 빛 바랜 단청과 풍화가 많이 진행되어 속살까지 드러난 기둥 하며 쉽사리 보기 힘든 대웅보전의 민화풍 벽화까지 마치 각인된 기억처럼 그 모습이 새록새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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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사의 대웅보전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고 하나의 갤러리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대개의 절집 전각의 담벽은 진흙벽으로 쌓아 회칠을 한 후 그 위에 불화를 그리는데 심우도나 팔상도의 그림이 보통인데 보광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 보광사의 대웅보전의 벽화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 대웅보전의 벽체는 흙벽이나 회벽이 아닌 나무 판을 끼워 맞춘 판벽으로 되어 있다. 이 판벽에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불화와 민화가 뒤섞여 있는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다. 나무 판에 그려진 그림들은 한눈에 봐도 불화 보다는 민화에 가까운 그림들이다. 우리 미술사에 정통하지는 않지만 짧은 소견으로는 조선후기의 그려진 것들이 아닌가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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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눈길을 부여잡는 그림은 호랑이 그림이다. 우리 민화에서 주된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그림이 호랑이도 인데, 그 해학적인 모습의 그림을 이렇게 절집 벽체에서 만나니 더 반갑다.

또 다른 작품들 역시 민화풍으로 그려진 불화로 중압감 보다는 푸근함과 친근함을 더해주는 바라보기 편한 그림들이다.

그런데 이곳 그림들이 아슬아슬하다. 내구성이 약한 나무 판벽에 그려서 인지 벽화의 풍화 속도가 빠르고 퇴색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보존처리가 어렵다면 채색이라도 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진귀한 모습을 어디서 쉽사리 볼 수 있단 말인가.

대웅보전 현액을 한번 올려다 보고 다시 삼배를 올린다. 이곳 현액은 영조의 친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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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사는 신라 진성여왕 8년 894년에 도선국사가 비보사찰로 창건하였으며 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의 말사이다.

이곳 보광사는 영조대왕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지난해 시청률을 뜨겁게 달구던 드라마 '동이'의 주인공인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대왕의 친모인 숙빈 최씨의 묘인 소령원이 인근에 위치해 있어 숙빈 최씨의 능침사찰이었기 때문이다.

또 어실각에는 숙빈 최씨의 위패와 영정을 모셨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어실각 옆에 향나무를 심었다는 영조의 애틋한 효심을 엿볼 수 있는 사찰이다. 이런 사실에 연유에서 보광사는 효를 상징하는 절이 되었다.

보광사의 전각들을 돌아본다. 전각들 하나하나 마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래서 아름답고 안온하다. 그러던 중 눈에 띄던 현수막의 내용. 작년, 원인 모를 화재로 불타버린 설법전을 다시 건립하는 불사에 동참해 달라는 현수막이다.

우리 전통사찰이 제일 조심해야 할 재앙이 화재다. 이렇게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화마에 의해 순식간에 잃는다면 이 보다 더 애석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소식들을 접할 때 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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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지은 영각전 위의 호국대불 앞에서 참배를 드리고 보광사를 빠져나와 영묘암에 들른다. 흰눈 하얗게 덮고 있는 암자가 소담스럽다. 영묘암에서 도솔암으로 향한다. 고령산 7부능선에 위치한 도솔암. 그 작은 암자로 가는 길은 몹시도 가파른 오르막 길. 포장 안된 흙 길은 눈이 치워져 있어 그나마 미끄럽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그 가파름에 몇 번이고 숨이 깔딱깔딱 넘어간다.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의 도중. 어느새 흐리던 하늘에서 햇빛이 드러나기 시작을 한다. 보광사에서 올려다 볼 때 도솔암 부근에는 하얀 눈꽃이 가득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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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르자. 서두르자. 저 흰 눈꽃이 햇볕에 전부 사라지기 전에. 숨은 턱까지 차 올라도 쉴 겨를이 없다. 이태 전에도 이 길을 오르면서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는데…. 도솔암 입구에 다다르니 숲 사이로 환상적인 하얀 설경이 펼쳐진다. 눈꽃 가지들이 장관이다. 도솔암으로 들어선다. 작은 전각 달랑 네 채 뿐인 도솔암이 온통 하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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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하나 없는 암자에 누가 눈은 치워 놓은 것일까. 아무리 인기척을 해도 허공의 메아리만 같다. 예까지 올랐으니 고령산 앵무봉의 설경을 놓친다면 천추의 한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고령산을 향해 올라간다.

나뭇가지마다 맺힌 하얀 눈꽃이 진저리 치게 아름답다. 이윽고 도달한 고령산 앵무봉. 봉우리 하나가 온통 눈꽃 밭이다. 극락세계가 예인가? 세상 근심 하나 없으니 좋고 눈에 보이는 것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으니 내게는 이렇게 눈꽃 가득한 고령산 앵무봉 정상이 극락인 셈이다. 그 앵무봉에서 연신 쏟아내던 말. 그래. 난 극락세계에 온 거다. 여기가 극락세계였던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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