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에는 만일사(萬日寺)라는 절이 있다. 천년고찰이다. 오랜 절들이 으레 그렇듯이 이곳에도 고추장에 얽힌 이야기가 내려온다. 만일사의 전설은 지어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장맛비가 쏟아지는 7월 하순, 고추장 시원지 만일사를 찾아 떠난다. 듣기만 했지 가보지 못한 절이기에 애써 시간을 내 먼 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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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사는 백제 무왕(673년)때 처음 세워진 사찰로 조선 초기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 무학대사에 의해 중건된 절이다. 만일사라는 명칭은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자 만일 동안 이곳에서 기도하였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평생 모은 재물보다 단 삼일간이라도 쌓아올린 마음닦는 공부의 공덕이 더 크다는 초발심자경문의 내용을 새겨놓은 절 입구의 표지석을 지나 경내로 들어드니 제일 먼저 오른쪽 축대 위로 오랜 세월을 머금은 비각이 눈에 띤다. 만일사의 내력, 고추장 시원지의 기록을 담고 있는 높이 175cm, 폭65cm, 두께 16cm의 비석이다. 6.25동란으로 완전히 소실된 것을 1954년에 다시 세웠고 1998년에 일주문, 대웅전, 요사채 각 1동씩을 건립하였다. 절 아래로 산안 마을과 무직산, 성미산 등 수려한 연봉이 바라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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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만일사비는 1658년(효종9)에 건립된 것으로, 크게 개석, 비신, 그리고 대석으로 나뉘어져 있다. 개석의 높이는 약 52cm, 너비 약 91cm의 기본상 반원형으로 재질은 사암이다. 개석 정중앙 위쪽에 높이 약 13cm의 복발과 비슷한 모양이 조각되었으며, 좌측과 우측에는 원형으로 돌출되게 하였다. 개석의 앞뒷면에는 모두 음각선으로 조각된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도량의 정면에는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겹처마에 풍판이 달린 맞배지붕의 목조건물이다.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형기둥을 세우고 다포형식을 하고 있다. 편액은 ‘대웅전’이라고 적혀있고 주련 4기가 걸려 있다. 창호는 중앙칸이 4분합이고 좌우 협칸은 각각 2분합이다. 내외부에는 화려한 금단청으로 나한상과 동자상 및 산수화가 그려져 있다. 외벽에 그려진 그림은 불벽에는 부처가 있고 벽에는 16나한상과 모란도 및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내부의 천장은 우물반자로 되어 있고,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화려한 조각의 수미단 위에는 석가모니불 좌상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뒤로 돌아가면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삼성각은 축대위에 세워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덤벙주초 위에 원형기둥을 세우고 주심포형식을 하고 있으며 겹처마에 풍판을 단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목조건물이다. 편액은 ‘삼성각’이고 주련은 4기가 걸려 있다. 창호는 빗살창이고 중간칸은 2분합이고 좌우 협칸 3분합으로 되어 있다. 내외부에는 단청이나 외벽화 등은 없다. 특이한 것은 산신탱의 호랑이가 백호로 그려져 있는 점이다.

사찰이 세워진 입지는 전체적으로 계곡에 자리한 형국이다. 축대를 쌓아 그런대로 절터를 만들었지만, 아무래도 옛 절터가 위쪽으로 따로 있을 것이다. 절을 지키는 무아스님께 물으니 역시나 원래 절터는 위쪽이라고 알려준다.

다 알다시피 순창은 고추장 고을이다. 순창 고추장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높은 지명도를 갖고 있다. 순창과 고추장은 하나로 묶여서 일컬어져야 되레 자연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순창 고추장의 시원지(始原地)가 바로 만일사(萬日寺)라는 절이라는 사실은 아는 이는 의외로 드물다.

손톱만큼의 근거만 있어도 온갖 의미를 부여해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일반 사회단체나 이웃종교를 생각한다면, 고추장 시원지가 만일사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일에 소홀한 것을 순진하다고 해야 할 지, 초연하다고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만일사가 고추장의 시원지가 된 내력은 이렇다.

“어느 날 이성계가 스승인 무학대사가 자신의 건국의 발원하며 기도하던 만일사를 찾아가다 순창의 한 농가에 들렀다. 거기서 점심을 먹었는데 고추장 맛이 기가 막혔다. 훗날 왕좌에 오른 이성계는 그 날의 그 맛을 수라상에 올리라 명했고, 순창고추장은 역사적인 특산품으로 등극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절 입구 오른편에 서 있는 만일사비(碑)의 내용이 옛일을 말해준다. 마멸이 심해 지금은 글자를 판독하기 어렵지만, 이성계, 무학, 고추장 등의 글자를 확인할 수 있다.

만일사의 고추장은 여느 고추장과는 맛 자체가 다르다. 심지어 절과 수십 미터 떨어진 아랫마을에서 똑같은 재료로 담근 고추장 맛과도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 만일사 터의 기운이 뭔가 크게 다르다는 의미다. 그야말로 최고의 고추장을 위한 모든 조건을 만일사는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매년 2월말이면 절 아래 산안마을에서 할머니들이 절에 올라와 고추장을 빚었다. 만일사 텃밭에서 고추를 직접 재배했었고, 넉넉하게 담가 이웃과 나눠먹고 외지에 팔기도 했다. 고추장과 함께 된장도 만들었다. 고추장의 명성에 눌려 된장은 소문이 덜 났지만, 된장 맛 또한 어디다 내놔도 떨어지지 않는다.

옛날에는 정월대보름이 지나면 고추장을 담그기 알맞은 길일인 말(馬)날을 택해 할머니들이 절로 모여 들었다. 그날 담가야 장맛도 좋고 이물질이 끼지 않는다는 속설 때문이다. 이곳의 할머니들의 대대로 내려오는 고추장 담그는 법을 자연스럽게 익힌 사람들이다. 오랜 세월 무심코 장을 담가온 이들의 감(感)은 어떤 레시피보다도 정확하게 장맛을 낸다. 땡볕에 바싹 말린 고추에 찹쌀과 메주를 섞고 굵은 소금을 덮은 뒤 사흘밤낮 동안 만든 고추장을 장독에 담아 90일에서 100일을 숙성시키면 이성계가 격찬했던 바로 그 고추장이 완성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몇 해 전부터 절에서는 고추장을 담그지 않는다. 고추값이 콩값보다 2~3배는 비싼 탓이다. 더 큰 문제는 고추장을 담글 사람이 없는 것이다. 수십 가구가 사는 절 밑 산안마을은 여느 산골처럼 대부분 노인들만 살고 있다. 그저 절 마당에 늘어선 장독대만이 이곳이 옛 고추장의 시원지임을 쓸쓸히 알려줄 뿐이다.

산 안에 있어 산안마을이라 불리는 이곳은 강원도 두메산골을 무색하게 할 만큼 험한 산세로 둘러싸여 있다. 마을 위 만일사가 위치한 회목산의 정상은 해발 630미터 남짓의 지리산 줄기이다. 높지는 않지만 그 깊이가 높이의 한계를 보완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지역의 험준함은 이곳이 한국전쟁 무렵 빨치산의 총본산이었다는 점에서도 잘 입증된다. 만일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빨치산을 이끈 이현상의 유적지가 남아 있기도 하다. 소설 남부군의 배경지가 바로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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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사에서 내려다 보는 전망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특히 만일사 법당 뒤, 삼성각 옆의 작은 절벽을 이룬 바위는 무학대사가 앉아 참선을 하며 이성계를 위해 기도를 했던 장소로 알려진다. 제법 편편한 이 바위에서는 만일사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고, 절 앞 정면으로 펼쳐진 산 능선에 도장처럼 생긴 바위가 선명하게 보인다.

기도하는 보살에게 물으니, 옥쇄바위란다. 무학대사는 저 옥쇄바위를 바라보며 이성계의 개국과 등극을 기원했고, 마침내 그 기도가 결실을 이뤘다고 전한다.

만일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아직은 미완성인 종각자리에 놓여진 평상 위에 앉으니 산안마을에서 계곡을 거슬러 올라온 바람이 신선하기가 그지 없다. 장맛비가 내리는 터라 몹시 후덥지근한 날씨인데도 개운하다. 어찌나 바람결이 신선한지 모기가 없을 정도란다.

새벽 3시, 무아 스님의 낭낭한 도량석 소리에 눈을 떴다. 대충 세안과 세수를 하고 법당으로 갔다. 새벽 4시, 생명의 기운이 강하게 밀려오는 시간에 고즈넉한 산사에서 부처님께 올리는 예배처럼 성스러운 장면도 드물다. 잣죽으로 아침공양을 마친 후 무아 스님께 내 주는 절에서 직접 길러 덖은 녹차맛을 만끽했다. 구수하다. 절의 살림에 보태기 위해 인근 3천평 땅에 차밭을 만들고 조금씩 수확해서 만든 차란다. 그러나 일손이 부족해 여간 힘겹지 않단다. 쌀 한 톨에 7근의 땀이 배어 있다는 말씀처럼 이 찻잎 하나에 무아 스님과 절 식구들의 정성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차향이 더욱 소중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고추장 시원지 순창 만일사, 이곳에서 태조 이성계가 그만 맛에 넋을 잃었다는 고추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면, 신도도 많지 않고, 규모도 크지 않더라도 이 절의 중흥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남기며 절을 나선다. 멀리서 합장 배웅을 하는 무아 스님과 기도보살의 밝은, 그러나 조금은 아쉬움을 담은 표정이 가슴을 훈훈하게 만들고 있다.